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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16화 (216/1,000)
  • 217화 트롤 참교육 (1)

    -띠링!

    [로그아웃 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와 주세요.]

    .

    .

    “휴.”

    나는 캡슐에서 몸을 일으켰다.

    겨우 겨우 죽지 않고 로그아웃 할 수 있었지만 몇 시간 내내 미친 듯이 노만 젓느라 몹시 피곤하다.

    “세상에, 아무리 첫 클리어가 특별하다지만…설마 고정 S+급 몬스터가 둘이나 마중 나와 줄지는 몰랐네.”

    폭식과 부패의 악마성좌,

    ‘파리 대왕 벨제붑’

    VS

    용암과 불길의 용군주,

    ‘붉은 용 모르그마르’

    하필이면 열일곱 서브스트림 중 가장 위험한 두 존재를 맞닥뜨리게 될 줄은 몰랐다.

    “어지간한 유저였다면 그 둘의 싸움에 휘말려드는 것만으로도 죽었겠는데?”

    기껏 첫 클리어를 했는데 저런 괴물들이 나타나 치고받고 싸우면 상당히 황당할 것이다.

    심지어 거기에 휘말려 죽기라도 한다면 더욱 그렇겠지.

    그나마 나는 드레이크와 함께 미친 듯이 노를 저었기에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것이지 만약 혼자였다면 무조건 죽었을 것이 분명하다.

    보통 첫 클리어는 그 이후의 클리어보다 더 어렵고 난해하다지만, 설마 이렇게 압도적으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뭐, 그래도. 크라켄과 여덟 다리 대왕을 잡았으니 문고리 3인방 중 둘은 클리어한 셈이군.”

    ‘문고리 3인방’

    그것은 후에 대격변의 문을 열어줄 문고리가 되는 세 마리의 몬스터들을 가리킨다.

    심해 깊숙한 곳에 서식하는 크라켄. 부유섬 심장부에서 특수한 과정을 거쳐야만 만날 수 있는 보스 여덟 다리 대왕.

    그리고 이제 마지막 하나! 딱 하나가 더 남았다.

    대격변을 불러올 마지막 핵심 몬스터가.

    “음, 마지막 놈은 조금 까다로운데…….”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그 고생을 해 가며 겨우겨우 잡았던 ‘크라켄’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던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

    하지만 마지막 몬스터는 그 둘을 합친 것보다 더욱 더 꽁꽁 숨겨져 있어 발견하기 어렵다.

    심지어 강한 것도 괴이할 정도로 강해서 공략 난이도 역시 앞의 두 몬스터에 비해 가파르게 상승한다.

    ‘식인황제’

    고인 물인 나조차 가급적이면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몬스터.

    “…하지만 별 수 있나. 그놈을 안 잡으면 대격변 자체가 일어나지 않으니.”

    현실 세상에는 싫어도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게임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목적지로 향하는 길의 수를 떠올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기본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게임.

    한 목적지로 가는 데에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길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안정적이며 정석적인, 그리고 비용이 적게 드는 길을 택했다.

    “‘터미널(Terminal)’로 가는 게 가장 빠르겠군.”

    나는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탁-

    머리에 썼던 캡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눈앞을 가득 채운 모니터와 팔 다리에 붙어 있는 선들을 제거하고 바로 캡슐방을 나섰다.

    “땀을 너무 많이 흘렸네.”

    나는 축축해진 속옷을 벗어던졌다.

    벨제붑을 만날 때 몸이 머금고 있던 수분을 식은땀으로 죄다 방출해 버린 기분이다.

    거실로 나가 에어컨 제습 버튼을 누르고 습해진 몸을 말렸다.

    그동안, TV의 케이블 채널에서는 광고들이 방영되고 있었다.

    “……어?”

    순간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윤솔.

    그녀가 보인다.

    [톡! 톡톡! 트로피콜라! 톡 쏘는 상큼함! 함께 마셔요!]

    그녀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음료수를 마시며 어색한 댄스를 춘다.

    댄스 동작은 허리를 휘두르거나 팔을 채찍처럼 구불거리는 등 꽤 격렬했는데 춤이라곤 춰본 적 없어 보이는 윤솔이 소화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안무를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니, 쟤는 뜬금없이 저기서 뭐 한대?”

    뷰티 방송으로 확 뜨더니 CF까지 들어와 버린 것인가!

    ‘근데 저 이상한 댄스랑 콘셉트는 또 뭐람?’

    혹시나 싶어 핸드폰으로 해당 브랜드 음료수를 검색하니…….

    아니나 다를까 댓글들이 꽤 많다.

    -얔ㅋㅋㅋㅋ광고만든놈 누구냨ㅋㅋㅋ댄스 저게 뭐얔ㅋㅋ

    -도랏멘ㅋㅋㅋㅋ병맛광고인가ㅋㅋㅋㅋ

    -야 근데 여자애는 이쁘다 누구임?

    -쟤 유튜뷰에서 뷰티방송 하는 애임ㅋㅋㅋㅋ

    -춤은 못 추는 것 같은데...디게 열심히 한다...

    -노력하는 게 보임 진짜ㅋㅋㅋㅋㅋ

    -열심히 할려고 하는게 귀여운데?ㅋㅋㅋ방송 보러간다

    -저분 방송 유익함ㅋㅋㅋㅋ평소 말투도 성격도 되게 조곤조곤하고 사려깊은거 같은데...춤은 뭐야 진짴ㅋㅋㅋㅋㅋㅋㅋ

    -저분 에이프리카에서도 방송하셨던 BJ부반장님이세요! 캬! CF도 들어오신건가!!!

    -누군진 모르겠는데ㅋㅋㅋㅋ열심히 사는 거 같아서 보기 좋다. 음료수 사먹어볼게~

    .

    .

    댓글 반응은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못 추는 춤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 티가 팍팍 나서인가 보다.

    “이야,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더니. 춤을 못 춰도 댄서로 성공해버리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TV 속 윤솔을 바라보았다.

    순간.

    “아차!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본래의 목적을 기억해 냈다.

    안 그래도 막 윤솔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

    이번에 새로 공략할 던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윤솔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

    게임을 한 번도 플레이해 본 적 없는, 순수하고 신선한 뉴비의 도움이 말이다.

    *       *       *

    한적한 오후.

    나는 차를 몰고 윤솔의 집으로 향했다.

    막 그녀의 집 앞 모퉁이에 있는 카페에 차를 대자 건널목 너머에서 손을 흔드는 윤솔이 보인다.

    “와아- 어진아! 여기!”

    윤솔은 간만에 보는 내가 반가운 듯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뛰어온다.

    나는 그런 윤솔에게 두 주먹을 말아 보였다.

    그리고 양 주먹을 공회전시키며 허리를 들썩였다.

    “톡! 톡톡! 트로피…….”

    “아 나! 그거 하지 마!”

    윤솔은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채로 주먹을 들어 내 어깨를 팡팡 쳤다.

    나는 오늘 그녀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만나자고 한 바 있었다.

    윤솔은 부탁이 뭔지 듣지도 않고 흔쾌히 수락했다.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줘야지.”

    “뭔지 알고?”

    “헤헤, 무리한 건 시키지도 않을 거 아냐.”

    밝게 웃는 윤솔의 태도에 나도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녀는 마침 잘됐다는 듯 입을 열었다.

    “타이밍 괜찮다. 오늘 내 방송에 특별 출연해 주시기로 한 분이 계시거든.”

    “네 뷰티 방송에? 게스트?”

    “응응, 그런데 그분이 마침 네 팬이라고 하시지 뭐야?”

    내 팬이라고?

    표정이 잠시 얼떨떨- 풀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윤솔이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엄청 떼써서 모신 분인데, 그분이 네 열성팬이라고 하시니 나도 뭔가 그분께 보답해 드린 것 같아서 좋다!”

    윤솔이 떼를 써서 방송에 모셨을 정도라면…모델? 연예인?

    그런 사람들이 내 팬이라니 새삼 감개무량하다.

    아, 어떤 분일까?

    윤솔의 방송에는 여자 게스트만 나오니 분명 여자일 텐데.

    “아휴, 이거 참. 오프라인에서 팬 만나는 건 이제 안 하려고 했는데…….”

    예전에 고인물 정모 때 아저씨들이 담배 피워서 화재신고 들어오고, 서로 캐삭빵 뜨고, 뭐 난리 부르스를 춘 덕분에 다시는 오프라인에서 팬 안 만난다고 다짐했었다.

    “크흠. 하지만 이런 상황은 뭐 또 음, 어쩔 수가 없구만 그래.”

    나는 정말로 어찌할 수가 없는 상황에 고뇌했다.

    그래서 감은 눈을 살짝 뜬 채 윤솔에게 물었다.

    “그분이 누군데?”

    내가 묻자, 윤솔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마침 저기 오시네! 언니! 여기요!”

    언니라?

    그렇다면 일단 여자 확정이다.

    40대 아조시가 아닌 게 어딘가!

    나는 밝은 표정, 동시에 시크한 표정, 그러면서도 전혀 기대감 없는 표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싸가지 없어 보이지는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젠틀한 억양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고인 무…….”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린 즉시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 뭐야뭐야, 왜 나를 보자마자 눈을 그렇게 떠요?”

    내 눈앞에 나타난 이는 바로 홍영화였던 것이다.

    “아 뭐야. LGB 방송국 게임콘텐츠부의 사원 홍영화 씨였네요.”

    “어? 진짜 뭐예요 그 설명조의 딱딱한 호칭! 저 막 서운할라고 그래요!”

    나는 홍영화의 쾌활한 말에 고개를 돌려 윤솔을 바라보았다.

    왜 지금 홍영화가 여기에 있는지 설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윤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번에 너 멕심배 퀴즈대회 나갔을 때 응원 갔다가 언니랑 친해졌어.”

    “동생! 완전 보고 싶었잖어~”

    “꺄악 언니 저두요오~”

    홍영화와 윤솔은 몇 년지기 친구라도 되는 양 다정하게 껴안았다.

    이윽고.

    홍영화는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며 나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헴! 오늘은 가위바위보 같은 날이네요?”

    “……? 가위바위보요?”

    “네! 가위바위보 모르세요? 가위는 바위에게 약하고 바위는 보에 약하고 보는 가위에….”

    나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 아니 스물이 넘어서 가위바위보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될 줄이야.

    “아뇨.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오늘이 왜 가위바위보 같은 날인지를 물어본 거였어요.”

    “아하.”

    홍영화는 주먹 밑바닥으로 다른 편 손바닥을 탁 쳤다.

    그리고는 해맑게 말했다.

    “어진 씨는 솔이에게 부탁이 있고, 솔이는 저한테 부탁이 있고, 저는 어진 씨에게 부탁이 있으니 이게 바로 가위바위보죠!”

    그녀의 말이 맞다.

    나는 게임 일로 윤솔에게 부탁이 있었고 윤솔은 홍영화에게 뷰티 방송의 특별 게스트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홍영화는 나에게 무슨 부탁이 있다는 거지?

    이내, 내 시선에서 느껴지는 궁금증을 읽은 홍영화는 밝게 웃으며 나를 잡아끌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뭔가 족보가 꼬이는 것 같은데…….”

    “……?”

    “제가 솔이보다 언니인데 어진 씨에게는 존댓말하고, 솔이랑 어진 씨는 서로 반말을 하는데 정작 제가 솔이에게 존댓말을 들으니까 뭔가 좀…….”

    “아, 그럼 서로 말 편하게 하죠.”

    “아이 참! 어진이두! 그러면 누나가 좀 꼰대 같잖니! 이이잉!”

    홍영화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를 툭 쳤다.

    그녀가 존댓말을 쓰기 싫어서가 아니라 반말을 듣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말을 놓는 편이 뭔가를 부탁하기에 더 편할 테니까.

    “부탁이 뭔데.”

    내가 묻자, 홍영화는 나와 윤솔 사이로 들어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으음, 내 개인적인 부탁은 아니고~ LGB측의 공식 의뢰인데~”

    호? 꽤나 솔깃한 화두다.

    다른 방송국도 아니고 LGB의 일이라면 스케쥴이 허락하는 한 무조건 맡을 의향이 있었다.

    내가 막 무슨 일이냐고 입을 열어 물으려는 순간.

    윤솔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앗! 시간이 별로 없어! 곧 생방 시간이야!”

    그러자 홍영화 역시 다급하게 짐을 챙겨 윤솔에게 붙었다.

    “빨리 스튜디오로!”

    윤솔과 홍영화.

    두 여자는 그 자리에서 호다닥 뛰어가 버린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입맛을 다셨다.

    “별 수 없네.”

    이렇게 된 이상 윤솔의 뷰티 방송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야겠다.

    윤솔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김과 동시에, 나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선택지를 그려보았다.

    이 시점에서 LGB가 내게 제안할 만한 선택지들.

    차르르륵-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돈다.

    손익계산에는 극도로 민감한 계산기가.

    이내.

    따릉!

    현 시점에서 내가 제안받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선택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딱 이맘때쯤 LGB 측에서 ‘켠김에 제왕까지’말고 다른 방송 하나를 기획했었지?’

    …이거 어째 느낌이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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