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14화 (214/1,000)

215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2)

폭식(暴食)과 부패(腐敗)의 성좌 ‘벨제붑’

시체의 유골에서 태어난 작은 구더기가 진화하고 또 진화한 모습.

이 세상의 모든 썩은 고기들은 그에게 우선권이 있다.

모든 역병과 그로 인한 죽음들까지 관장하는 악마지존(至尊).

이 세상의 모든 악마들 중 그에 견줄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여섯뿐이다.

‘파리 대왕…그렇군. 어쩐지 폭풍우가 점점 더 심해진다 했더니……저놈 짓이었나?’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바다는 벨제붑의 날갯짓에 의해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재해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저놈이다.

“…큘레키움의 마지막 행동이 이제 이해가 되네.”

나는 여덟 다리 대왕의 최후를 떠올렸다.

100초 간 얻은 목숨, 절대적인 힘.

큘레키움은 그것을 이용해 바다를 여덟 토막으로 갈라버리기도 했다.

그 후에도 얼마든지 나를 압박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놈은 최후의 순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다 한쪽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을 뿐.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벨제붑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 큘레키움은 ‘체념’해 버린 것이다.

자기보다 강한 괴물 앞에 섰을 때 몸이 굳는 것은 벌레들의 특징 중 하나다.

같은 S+등급이라고 해도 고정과 고정이 아닌 것은 격이 다르니까.

“으음, 큘레키움의 마지막 공격을 막아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이 녀석의 등장 때문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나는 벨제붑을 바라보며 끙 소리를 냈다.

캡슐 속 본체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린다.

그때.

벨제붑이 말을 걸어왔다.

[너 하잘 것 없는 것아.]

나를 가리키는 말이리라.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열일곱 최강자 중 하나가 지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여차하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엄청나게 시기상조지만…그래도 언젠가는 싸워야 할 적이다.

내 몸에 깃들어 있는 3신기, 그리고 최후의 무기가 있는 한 나 역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벨제붑의 말을 기다렸다.

이 거대한 파리는 이내 경멸과 오만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본래 ‘여덟 다리 대왕’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도다.]

“…….”

[곧 다가올 용들과의 전쟁을 위해, 우리 측에 힘을 실어 줄 강력한 동맹 군주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말이 동맹이지 사실 주종관계를 맺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여덟 다리 대왕이 강력한 존재이고 그 휘하의 거미들이 수도 없이 많다지만, 그래도 현 세계의 절반을 휘어잡고 있는 강력한 지배종 군주에게 거역하는 것은 무리다.

(파리가 거미를 지배하는 모양새라니 어딘가 좀 이상하게 들리긴 했다)

한편, 벨제붑의 계획을 듣자 오싹한 느낌도 들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거미 계열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중립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악마든 용이든 상관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그저 자기 배만 배불리 채울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입장.

……하지만 만약 여덟 다리 대왕이 악마 군단의 휘하로 들어가게 된다면?

악마 군단은 S급 몬스터의 가세로 엄청난 전력 상승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여덟 다리 대왕을 따라 악마 휘하로 들어오게 될 수많은 거미들은 또 어떤가?

‘메인 스토리 전개 상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큰일 날 뻔했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만큼 퀘스트 내용은 실감나고 또 생생한 것이었다.

한편.

벨제붑은 계속 윙윙거리는 날갯짓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아쉽다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너희 하잘 것 없는 것들 때문에 여덟 다리 대왕은 사라져 버렸도다!]

“…….”

[오호 통재라. 훌륭한 동맹 군주 하나가 사라졌으니 나는 헛날개짓을 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너희들 탓이로다.]

벨제붑의 안면 양쪽에 달린 크고 시뻘건 눈이 아래로 조금 움직였다.

그 거대한 안와 속에는 수억 개나 되는 작은 눈알들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다.

나의 얼굴이 벨제붑의 수억 눈동자에 각각 하나씩 담긴다.

고정 S+급 몬스터의 기세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어서 나는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마치 전신이 갈가리 찢겨져 조각조각으로 나뉘는 듯한 착각.

셀 수도 없이 많은 구더기들에게 살점을 빼앗기는 느낌이다.

“…….”

오히려 드레이크가 꼿꼿한 자세로 서서 내 앞을 지키고 있다.

그의 널찍한 등판을 보자 나는 조금이나마 진정할 수 있었다.

벨제붑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날개를 헛되이 저은 것은 기분이 몹시 상하는 일이지만, 나는 악마의 성좌답지 않게 이번 한번만은 꾹 참겠노라.]

오? 살려 주겠다는 뜻인가?

나는 3신기를 슬쩍 거뒀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솔로몬의 목걸이 역시도 잠시 품안에 넣어 두었다.

펄떡펄떡펄떡펄떡-

솔로몬의 목걸이는 원수를 마주한 이의 심장처럼 요란하게 고동치고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이내,

벨제붑이 진짜 용건을 꺼내들었다.

[그 대신, 너희 하잘 것 없는 것들이나마 내 휘하에 거두어야겠다. 여덟 다리 대왕 대신 너희들이 내 군단의 수족이 되거라!]

그와 동시에, 눈앞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띠링!

<메인 퀘스트 ‘용마전쟁의 서막’이 발동되었습니다! 악마 족 7대 성좌 중 하나인 ‘폭식과 부패의 벨제붑’이 직접 스카웃 제의를 해 왔습니다. 그의 휘하 군단에 들어가는 것을 수락하시겠습니까?>

<1. 수락 2, 거절>

드레이크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진, 뭘 골라야 하나?”

나는 식은땀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분위기 상 거절을 누르면 죽을 게 당연하고…….’

그렇다고 수락을 하자니 악마 군단 예하로 부속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이럴 거면 처음에 튜토리얼에서 용옥의 고문기술자를 잡았을 때 굳이 인간 진영을 고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제기랄, 이런 선택지에 대해서는 들어 본 게 없다고!’

나는 초조한 기색으로 눈앞의 선택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

좋은 생각이 났다.

어둠 대왕의 ‘선택’ 특성.

그것은 50%의 상황에서 언제나 최선의 길을 보여 준다.

나는 솔로몬의 눈으로 벨제붑이 준 제안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안 보여?’

나는 심장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솔로몬의 눈으로도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할지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 솔로몬 씨! 지금 당신을 타락시킨 악마가 눈앞에 있다고 눈이 멀어 버린 거요!?’

나는 황당한 마음에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솔로몬의 눈이 분노로 멀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어느 쪽을 고르든 노답이라는 건가?

나는 ‘수락’과 ‘거절’ 사이에서 망설였다.

바로 그때.

-띠링!

<‘벨제붑’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릅니다.>

벨제붑의 몸 전신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주변 바다에서 허연 수증기가 뭉게뭉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벨제붑이 화가 나자 주변의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근처 바닷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끓었다.

파리 대왕이 진노했다.

[악마 성좌는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도 너 같은 하잘 것 없는 것을 상대로는 더더욱!]

어떠한 카운트도 없었다.

벨제붑은 갑작스럽게 선택지를 거둬가 버렸고 이내 노골적인 악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친 변덕쟁이 파리 놈아! 아직 3초도 안 지났어!”

나는 기겁한 채 벌떡 일어났다.

눈앞의 이놈에게서 도망칠 방법은 없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수밖에!

“치, 침착해 드레이크! 내 말대로 하면…어쩌면…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드레이크는 이미 냉정한 표정으로 쇠뇌에 살을 먹이고 있었다.

“네가 제일 흥분했다 어진.”

“…그런가? 아무튼 전투 준비!”

나와 드레이크는 전투를 준비했다.

상대는…무려 이 세상을 17등분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지배종의 군주, 악마족의 성좌, 이 세상 모든 썩어 가는 것들과 병든 것들의 대왕.

벨제붑!

이 신화적인 괴물을 상대로 우리는 싸워야 하는 것이다!

“죽어도 너는 죽이고 죽는다!”

나는 어둠 대왕의 증오를 이어받아 전투에 임했다.

희박한 확률이지만, 벨제붑을 상대할 수 있는 방안이 분명히 내게는 있었다.

…물론 나는 100% 죽겠지만 말이다.

…….

하지만.

우리가 레이드를 시작하기 직전.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다.

콰쾅!

부글부글 끓던 바다가 요란하게 박살났다.

물 밑에서 거대한 괴물 하나가 쩌렁쩌렁한 호통과 함께 치솟아 올랐다.

[이 더러운 파리 놈!]

그것은 바다 위에 떠 있던 벨제붑과 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

드레이크는 쏟아지는 물벼락 사이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시야를 꽉 채운 것은 불타는 듯한 홍염(紅焰).

그 불길이 그대로 굳어 버린 듯한 비늘이었다!

<모르그마르> -등급: S+ / 특성: ?

-서식지: ?

-크기: 55m

-이 세상의 모든 용을 다스리는 일곱 군주 중 하나.

사막과 분화구를 지배하는 위대한 붉은 용.

“나는 최후의 불꽃. 사그라들지 않는 겁화가 되어……”

-모르그마르- <신약, 열왕기(熱王記) 상권,

열왕 7절>

레드 드래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불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시뻘건 적룡이었다.

용암과 화마의 화신(化身) 모르그마르.

머리에 돋아난 뿔끝에서는 용암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빨과 비늘 틈 사이사이로는 불길이 뚝뚝 떨어진다.

그의 등장만으로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폭발하듯 기화했다.

생김새부터가 가히 압도적인 몬스터.

적룡 모르그마르는 등장하자마자 파리 대왕 벨제붑을 향해 빈정거렸다.

[쥐새끼 시체나 파먹고 살던 구더기가 많이 컸구나.]

[…….]

벨제붑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웨-에에에에엥!

요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다짜고짜 모르그마르를 들이받았을 뿐이다.

콰쾅!

붉은 용과 파리 대왕이 맞붙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드레이크에게 노를 던졌다.

“튀어!”

“…오, 오케이!”

드레이크는 재빨리 노를 젓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고정 S+급 몬스터 둘이 싸우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금껏 흥미롭게 지켜보았던 몬스터 배틀과는 격이 다르다.

용군주(龍君主)와 악마성좌(惡魔星座).

그 둘의 싸움은 이 바다를 통째로 날려버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

내가 벨제붑의 제안을 딱히 수락하지 않았기에 모르그마르는 이쪽으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솔로몬 씨 땡큐!’

선택 특성이 잠잠했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수락도 거절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

촤악- 촤악-

우리는 열심히 노를 저어 자리를 피했다.

싸움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기 전에 도망쳐야 했다.

남길 말은 딱히 없었다.

“젠장! 어디 두고 보자고!”

패배한 뒤 도망치는 3류 악당들이나 내뱉을 법한 하나도 무섭지 않은 대사.

하지만 오늘은 주인공보다는 삼류 악당의 처지에 더욱 깊게 공감하게 되는 날이었다.

이윽고.

콰-콰콰콰쾅!

두 괴물이 맞붙은 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거, 빨리 튀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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