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12화 (212/1,000)
  • 213화 여덟 다리 대왕 (4)

    볼락과 정어리는 기름이 많이 나오기로 유명한 바닷물고기다.

    끓여서 압착하면 놀랄 만큼 많은 지방 기름이 나오는데 이는 마가린이나 쇼트닝, 비누 등으로도 만들지만 선박 등 중기계를 돌리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

    *       *       *

    “추워 보이는데 몸 좀 녹여.”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아래로 던져 버렸다.

    빙글-

    시뻘건 불빛이 8자를 그리며 아래로 하강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덟 다리 대왕의 발치에 있는 암초에 부딪혀 물 위로 떨어졌다.

    풍덩!

    횃불은 그대로 물속에 잠겼다.

    ……하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화르르르르륵!

    파도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던 기름에 불이 붙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자연히 물 위를 타고 번져 여덟 다리 대왕의 전신을 타올랐다.

    [크-아아아아악!?]

    여덟 다리 대왕은 깜짝 놀라 다리를 휘저었지만 이미 몸에 잔뜩 엉겨 붙은 기름들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쏴아아아아아…

    비가 내린다.

    하지만 기름투성이가 된 채로 비를 맞아 봐야 기름이 씻겨 내려가진 않는다.

    때문에 불길은 여덟 다리 대왕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고 있었다.

    물 위에서 무언가가 불타는 것은 실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드레이크는 그것을 보고 감탄했다.

    “그렇군! 그 무거운 해파리를 굳이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가 있었어!”

    “맞아, 오일텐타는 기름이 많은 생선들만 대량으로 잡아먹거든. 선공형 몬스터도 아니니 평화적으로 끌고 오기도 좋지.”

    나는 드레이크를 업고 계속해서 절벽을 타올라갔다.

    절벽 꼭대기 즈음에 다 와 갈 무렵.

    콰-쾅!

    밑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불길이 오일텐타의 몸에까지 번져 내장 안에 남아 있던 잔여 기름에 불을 당긴 모양이다.

    후욱-

    열풍이 불어 우리의 몸을 절벽 위까지 떠밀었다.

    우당탕!

    우리는 뼈다귀 산 위를 나란히 나뒹굴었다.

    거대한 갈빗대의 매끄러운 굴곡을 타고 굴러 떨어질 뻔 했으나 드레이크가 쇠뇌의 시위를 내 팔목에 휘감아 잡아당겨 준 덕분에 낙하는 면할 수 있었다.

    “……!”

    나는 바로 고개를 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쿠르르륵-

    아래는 이미 불지옥이었다.

    오일텐타는 ‘무한성장’ 특성을 가지고 있는 B+등급 몬스터답게 엄청난 덩치를 자랑한다.

    자연히 그 안에 농축, 내장되어 있는 기름의 양도 엄청날 수밖에 없다.

    (전에도 말한 것이지만, 해풍과 해류의 도움이 없었다면 끌고 오지도 못했다)

    부유섬의 해안 대부분이 기름에 오염되었을 정도로 피해는 심각했다.

    그런 곳에 나는 불을 당겨 버린 것이다.

    부직! 뿌지지직! 콰쾅!

    거센 불길이 섬의 중앙부로 옮겨 붙는다.

    거미줄은 강철보다 단단하고 점액보다 끈적하지만 불에는 약하다.

    전체의 70%가 거미줄, 그리고 부패한 시체의 가스로 이루어져 있는 이 섬은 이내 불에 활활 타기 시작했다.

    폭풍우가 해안가의 기름을 섬 전역으로 날려 보내는 통에 화재는 더욱 빠르게 몸을 키우고 있었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물의 비, 기름의 비, 불의 비가 뒤섞여 내린다.

    [갸아아아아악!]

    [차르륵! 차르륵!]

    [궤에엑! 기이익!]

    곳곳에서 거미들이 기름비에 닿아 죽어 가고 있었다.

    굴속에 숨든, 높은 곳으로 피하든, 불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다.

    치솟는 온도와 지독한 매연 역시도 무서운 적이었다.

    거미들은 불을 피해 발버둥 치다가 이내 다리를 배 쪽으로 모으고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리고 불길은 죽은 거미들의 바싹 마른 시체를 장작삼아 더욱 더 세를 불린다.

    그 기세가 생각보다 엄청났기 때문에 우리도 빨리 몸을 피해야 했다.

    오-오오오오!

    불길 속에서 여덟 다리 대왕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고통에 겨워 지르는 비명일까?

    아니면 분노?

    그것도 아니면 죽어 가는 자식들을 보는 슬픔?

    모든 것이 타들어가는 가운데 여덟 다리 대왕의 속도 타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한편.

    드레이크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만의 외곽을 돌아보았다.

    “배! 배는!? 우리 배도 타 버리면……!”

    “조각배이긴 하지만 아크레에서 제일 비싼 배야. 방화코팅도 해놨으니 걱정 말라고.”

    나는 미리 배에 감아 두었던 닻줄을 힘차게 당겼다.

    만 저편에서 배가 천천히 끌려오는 게 보인다.

    나와 드레이크는 배에 탄 채 열심히 노를 저었다.

    바다로 나와 돌아본 부유섬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커다란 비닐봉지나 스티로폼을 태워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태우기 전에는 부피가 크던 것이 일단 불에 닿기만 하면 놀라울 정도로 작게 쪼그라든다.

    액체처럼 부글부글 끓다가 졸아붙는 과정에서 시커먼 매연도 무척 많이 나오고 악취도 심하다.

    부유섬이 꼭 그와 같았다.

    커다란 섬이 어느새 형편없을 정도로 쪼그라든 것이 보인다.

    지글거리는 소리가 폭우와 천둥을 가려 버릴 정도로 컸다.

    밤하늘의 먹구름보다도 많은 매연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깎단도 먹였고 둥지도 불태웠어. 이제 모든 건 하늘에 달렸다.”

    나는 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배를 세우고 닻을 내렸다.

    저 멀리, 부유섬의 정상 가장 높은 곳에 여덟 다리 대왕이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놈의 육체는 아직 건재하다.

    HP도 아직 꽤 남았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시간문제였다.

    깎단은 놈의 멱줄을 천천히 조일 것이고 자연 치유력이 뛰어나던 육체는 이미 화마에 잠식당했다.

    그토록 아끼던 부하들과 삶의 터전은 불과 폭풍우에 휘감겨 급속도로 사그라지는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와 여덟 다리 대왕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고 섰다.

    우르릉- 쾅!

    쏟아지는 폭우 사이로 벼락 한 줄기가 내리 꽂혔다.

    일순간 허옇게 물든 바다를 양 사이에 두고, 나와 여덟 다리 대왕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

    “…….”

    나는 뱃전에 앉아 불타는 섬과 그곳의 마지막 대왕을 바라본다.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은 실로 오연한 자세로 서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을 묵묵히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옆에 있던 드레이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데 어진.”

    “…응?”

    “여덟 다리 대왕의 위험 등급이…S급이었던가?”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드레이크는 얼굴로 흐르는 빗물을 닦았다.

    그리고 질문을 이었다.

    “…음, 맨 처음에 이 섬에 들어올 때…네가 했던 말이…진(眞) 보스의 등급은 S+이라고…….”

    그렇다.

    드레이크가 부유섬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볼 때 나는 분명 이 섬의 진짜 보스는 S+등급의 몬스터라고 했다.

    “…….”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섬을 향해 턱짓한다.

    “잘 봐. 어떻게 되나.”

    “……?”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느덧 부유섬은 원래의 크기의 5%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대부분의 땅은 부글부글 끓다가 기화해 버리고 나머지는 재가 되어 물 밑으로 녹아들듯 가라앉았다.

    모든 작은 거미들은 싸그리 불타 버렸다.

    오로지 높게 솟은 뼈다귀의 산과 그 위에 오연히 선 여덟 다리 대왕만이 천둥과 폭우, 화마를 견디고 서 있을 뿐이다.

    바로 그때.

    [오-오오오오오오!]

    섬의 거미가 자신을 제외하고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여덟 다리 대왕이 변이를 일으켰다.

    놈은 그동안 묵묵히 고고하게 서 있던 자세를 버렸다.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수많은 다리로 자신의 몸을 찢어발긴다.

    뿌직- 뿌지지지직-

    여덟 다리 대왕의 단단한 외골격이 마찬가지로 단단한 다리들이 의해 터지고 갈라진다.

    “뭐, 뭐야!? 왜 저래!?”

    드레이크는 그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여덟 다리 대왕의 최후 패턴을 예견하고 있었다.

    ‘불완전변태’ 특성!

    이는 HP가 0이 되었을 때 1개의 목숨을 추가로 획득하며 전투력도 10배 가량 강해진다는 점에서 ‘완전변태’ 특성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완전변태’ 특성과는 다르게, ‘불완전변태’ 특성은 안전한 곳을 찾아 번데기를 만들어야 하는 과정을 겪지 않아도 된다.

    되살아나는 데 걸리는 시간 역시 훨씬 짧다.

    딜레이 없이 바로 되살아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다고 마냥 더 좋은 특성은 아니었다.

    완전변태의 번거로움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만큼, 패널티도 큰 편이다.

    불완전변태로 얻게 된 생명력은 1초당 1%씩 자동으로 깎여 나간다.

    또한 탈피를 통해서 얻게 된 새 몸은 시야가 온통 붉은색으로만 표시되며 피아를 전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 아닌가?

    ‘베르세르크(berserkr)’

    잃을 게 없는 광전사 모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오-오오오오오!]

    여덟 다리 대왕은 불타는 허물을 훌훌 벗어 버렸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그 모습을 만천하에 여과 없이 드러냈다.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 폴다운 모드> -등급: S+ / 특성: 맹독, 벌레, 즉사, 킬 체인, 변온, 내성(耐性), 점성(粘性), 살금살금, 뺑소니, 백전노장, 1:1, 중간자, 불완전변태

    -서식지: 부유섬

    -크기: 108m.

    -거미형 몬스터의 ‘궁극(窮極)’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그의 힘은 능히 신에 비길 만하다.

    하늘에 닿을 정도로 거대한 몸집.

    그 압도적인 위용.

    타락해 버린 여덟 다리 대왕은 불타는 섬 위에 우뚝 서 있었다.

    “…….”

    드레이크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반쯤 벌렸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세계관 근간을 이루고 있는 17마리의 ‘고정 S+등급’ 몬스터.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의 폴다운 모드는 그 17 엔트리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는 규정 외, 등급 외의 존재.

    이 세계관에서 홀로 툭 불거져 나온 이방인(異邦人)인 것이다.

    오-오오오오오-

    여덞 다리 대왕 큘레키움은 수많은 다리들을 펼친 채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놀랍게도.

    큘레키움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자 하늘에 있던 두터운 먹구름 층에 구멍이 뻥 뚫렸다.

    그토록 몰아치던 폭풍우가 일순간이나마 멎었다.

    자연재해조차도 압도하는 S+등급 몬스터의 위용.

    그 위압감은 온 해상 천지를 집어삼킨다.

    털썩-

    나와 드레이크 역시도 배에 주저앉아 덜덜 떨 뿐이었다.

    감히 싸워 보겠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는다.

    나는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눈을 부릅떴다.

    ‘불안전변태’로 인해 신의 힘을 갖게 된 큘레키움.

    하지만 그 절대적인 힘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0초에 불과하다.

    배는 이미 섬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다.

    부유섬은 거의 다 불타 사라졌다.

    제아무리 S+몬스터라고 해도 100초만 버티면 쓰러트릴 수 있다.

    오-오오오오오오!

    큘레키움은 여덟 개의 거대한 다리를 전방으로 뻗었다.

    그러자.

    …! …! …! …! …! …! …! …!

    눈앞의 바다가 8토막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기세만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버텨! 무조건 버텨야 해!”

    나는 드레이크에게 외쳤다.

    다행히 우리 둘 다 크라켄 레이드 경험이 있기에 바다에서의 생존은 익숙하다.

    몸에 밴 ‘심해’ 특성을 발현하며, 우리는 뱃전을 꽉 움켜쥐었다.

    천지가 뒤흔들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초시계는 가고 있다.

    100초.

    이 세상에서 가장 긴 1분 40초가 시작되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