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10화 (210/1,000)
  • 211화 여덟 다리 대왕 (2)

    부유섬 심장부의 중앙에는 커다란 번데기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숨을 쉬는 듯 약동하는 고치.

    안에서는 체액이 끓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늦지 않았어! 아직 변태 전이다!”

    드레이크는 재빨리 쇠뇌를 들었다.

    퍼펑!

    고래잡이용 작살과도 같은 화살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심지어 촉에는 불까지 붙어 있었다.

    펑! 퍼펑! 퍽!

    드레이크는 계속해서 불화살을 날렸다.

    타닥- 타닥- 화르륵-

    화살촉에 붙은 불은 주변으로 튀어 화재를 일으켰다.

    이내 점액에 들러붙은 불길은 번데기를 빙 둘러 태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뻥!

    번데기의 등이 세로로 길게 갈라지며, 그 안에서 왈칵 쏟아져 나온 체액이 주변의 불길을 순식간에 진압했다.

    촤아아아악-

    자욱한 수증기가 일어나며, 그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손을 들어 드레이크를 막았다.

    “더 이상은 화살낭비야.”

    “뭐? 아직 늦은 건 아니지 않나?”

    “많이 늦었어. ‘완전변태’ 특성을 가진 놈에게 시간을 너무 많이 줘 버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완전변태’ 특성. 그것은 HP가 0이 되었을 때 한 개의 목숨을 더 부여받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HP가 0이 된 지 100초 안에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 번데기 집을 짓고 우화 준비를 마쳐야 한다.

    그 상태에서 또 100초를 버틴다면 풀 HP 상태로 부활하게 된다.

    문제는…….

    “잠깐. 벌레 계열 몬스터들은 탈피나 우화 시 진화하잖아? 그럼 위험 등급도…?”

    드레이크는 사색이 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조각으로 갈라진 번데기, 자욱한 수증기 사이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방이 꽉 찰 정도로 거대한 몸.

    육중한 거미의 몸 위에 돋아난 인간의 상체.

    그 모습은 아름다우나 그만큼 위험하게 느껴진다.

    머리의 양갈래 뿔은 거대한 왕관처럼 빛났고 등에는 따로 여덟 개의 거미다리가 돋아났다.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 -등급: S / 특성: 맹독, 벌레, 즉사, 킬 체인, 변온, 내성(耐性), 점성(粘性), 살금살금, 백전노장, 불완전변태

    -서식지: 부유섬 심장부

    -크기: 42m.

    -먼 옛날, 용과 악마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죄 없는 수많은 짐승들이 죽어 가던 시절.

    한 거미가 고뇌했다.

    ‘나는 홀로도 완전한 존재인지라 위험과 두려움을 모른다지만, 시류(時流)에 휘말려 죽어 가는 저 작고 가여운 생명들은 어이 할 것인가?’

    거미는 오랜 생각을 마친 뒤 여덟 개나 되는 다리를 넓게 펼쳤다.

    끝없이 몰아치던 폭풍우도 거미의 단단한 몸뚱이를 뚫을 수는 없었고 이로 인해 모든 다리 여덟 개 달린 것들이 그 품 안에서 근근하게나마 명맥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나왔다!’

    거미형 몬스터의 정점(頂點).

    ‘젖거미(C+)’ → ‘망자거미(B)’ → ‘철거미(B+)/굴거미(B+)’ → ‘거미 대모(A)’ → ‘다리 많은 여제(A+)’ → ‘여덟 다리 대왕 큘레키움(S)’으로 이어지는 진화 트리.

    그렇다.

    나는 지금 거미 계열 몬스터의 정점(頂點).

    궁극적인 완성형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심해의 악몽 크라켄.

    단일 개체 주제에 일 개 왕국을 멸망시킬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몬스터.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몬스터인 ‘여덟 다리 대왕’은 그 크라켄과 위험 등급이 같았다.

    S급 몬스터 큘레키움.

    […홋 …홋 …홋.]

    그녀는 막 탈피한 몸을 기울여 우리를 내려다본다.

    워낙에 힘의 격차가 크니 탈피 직후인 점을 이용해 공격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어쩌지?”

    “뭘 어째. 도망가야지.”

    나는 드레이크의 어깨를 툭 치고는 냅다 뒤로 달렸다.

    쾅!

    도망치는 동시에, 나는 발을 굴러 ‘불걸음’ 특성을 발현했다.

    간쇼마루의 힘이 지면을 녹이며 뜨거운 용암을 만들어 냈다.

    뼈와 점액, 부패한 살점들이 부글부글 끓어 지면의 경사로를 흘러내린다.

    그것은 막 탈피를 끝마친 여덟 다리 대왕의 몸에 끼얹어졌다.

    치이이이이익-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호홋!]

    여덟 다리 대왕은 아직 물렁한 다리를 휘저어 용암들을 걷어 버렸다.

    화염 데미지를 입었지만 그런 것쯤은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

    하지만 자기 침실까지 쳐들어 온 적에 대한 경계심은 확실히 내보이고 있었다.

    여덟 다리 대왕은 그 육중한 몸을 들어 앞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놈이 한번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섬이 뒤흔들리는 것 같다.

    하나하나가 전봇대보다도 훨씬 더 크고 굵은 다리, 그런 것이 여덟 개나 있다.

    그것들은 시추기처럼 땅에 퍽퍽 박혔고 그때마다 크고 거대한 여덟 다리 대왕의 몸체가 앞으로 쑥쑥 전진해 나간다.

    “으아아아! 빨리 굴 밖으로!”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내달렸다.

    씨어데블을 잡고 얻은 신발의 옵션 덕분에 달리기 속도는 자신 있다.

    드레이크 역시도 민첩 옵션으로 도배를 한 상태이기에 크게 뒤처지지 않고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차라라락!

    드레이크는 마름쇠를 아낌없이 펑펑 뿌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씨어데블의 점액을 마구 흘렸다.

    여덟 다리 대왕이 추격해 오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였다.

    “동굴 밖으로만 나가면 승산이 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바로 그때.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챠락! 챠락! 챠락!]

    [킥킥킥킥-]

    굴거미.

    이 음흉한 놈들이 어느새 새로운 땅굴을 파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패턴은 본 적이 없는데!?’

    나는 새롭게 등장한 지뢰밭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무수히 꽂아 왔던 깃발들이 모두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여덟 다리 큘레키움을 최초로 잡은 이들의 인터뷰에 이런 내용은 없었다.

    내가 기억을 못할 리는 없으니 아마 인터뷰를 한 놈들이 빼먹고 말하지 않은 것이겠지.

    아니면 최초 클리어의 변수거나.

    “…어진! 다음 오더를!”

    뒤를 살피고 있던 드레이크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여덟 다리 대왕이 어느새 거의 근접해 있었다.

    놈은 ‘살금살금’ 특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움직일 때의 소리를 거의 완벽히 지워 버릴 수 있다.

    그 때문에 바로 지척에 올 때까지 놈의 접근을 알아채지 못했다.

    “…젠장!”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에는 굴거미 굴, 뒤에는 여덟 다리 대왕.

    어느 쪽이나 리타이어 되는 것은 똑같다.

    다만, 생존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더 있는 쪽은 전방의 굴거미 굴 방향이려나?

    나는 결국 인정해야 했다.

    S급 몬스터 레이드는 남에게 어줍잖게 전해들은 미래 지식으로만 성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것이 아님을.

    그리고 또한 걸어야 했다.

    일생일대의 도박수를!

    번쩍-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굴거미 굴을 살폈다.

    전방에 수없이 돌아다니는 굴거미, 그리고 놈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파 놓고 있는 함정들.

    나는 심호흡을 한 뒤 크게 외쳤다.

    ……과연 통할까? 먹혀 줄까?

    “xyzzy!”

    나는 외침과 동시에 상태창을 눌렀다.

    그리고 수치들이 눈앞에 뜨기도 전에 손을 들어 굴거미 굴이 쫙 깔려 있는 필드 위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이내 기적이 일어났다.

    깜빡-

    시야의 좌측 상단에 1픽셀 크기의 점이 생겨난 것이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점.

    그것은 바늘구멍보다도 작은 크기였지만 분명히 내 시야 안에 잡혀 있었다.

    마치 망막에 새겨진 것처럼.

    깜빡깜빡-

    나는 머리를 기울여 좌측 상단에 생긴 점을 필드로 잡아끌었다.

    그러자, 점은 필드를 오갈 때마다 흰색으로 바뀌었다가 검은색으로 바뀌기를 반복한다.

    ‘……된다!’

    나는 환희에 젖어 부르짖었다.

    지뢰찾기의 치트키.

    이것은 일종의 ‘창발적 플레이’이자 뎀의 사소한 버그 중 하나.

    버그로 인해 개발자가 예상치 못한 플레이 방법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내가 방금 외쳤던 ‘xyzzy’는 1976년에 발매되었던 'Colossal Cave Adventure'라는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에서 처음 등장한 치트 코드.

    적절한 시점에 ‘xyzzy’를 입력하면 다른 장소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굴거미 굴의 모티프가 된 ‘지뢰찾기’ 게임에도 이 치트가 등장한다.

    지뢰찾기 게임을 실행한 뒤 xyzzy를 입력하고 Shift 키를 누른 상태에서 마우스를 게임판 위에 올리면 창 좌측 상단에 1픽셀 크기의 점이 생긴다.

    이 점은 지뢰가 묻혀 있는 곳을 검은 색으로, 지뢰가 없는 안전한 곳을 흰 색으로 표시해 준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개발자는 ‘Colossal Cave Adventure’와 ‘지뢰찾기’에 대한 오마쥬로 이 치트를 장난스럽게 삽입했고 그것은 유저들 사이에서 얼마간 루머로 떠돌았다.

    나중에 지형 밸런스에 관련한 대규모 패치가 일어난 이후에는 이 버그가 완전히 사라지는 바람에 확인을 할 수도 없었다.

    (참고로 이 패치 때 씨어데블의 궁극기 ‘풍랑’을 피할 수 있는 암초도 사라진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루머를 잘 믿지 않는 성격이다.

    그래서 피그말리온의 퀘스트를 깨 버프를 받았고 순수한 계산능력만으로 굴거미 굴을 돌파하는 정통 공략법을 시도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여덟 다리 대왕이 우화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던전에 들어갈 때의 이야기고, 나갈 때는 상황이 조금 많이 달라지지 않았는가?

    이제 더는 방법이 없다.

    죽기 싫다면 이 치트를 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젠장! 내 뒤만 따라와!”

    나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꺾은 채 앞으로 내달렸다.

    눈앞에 떠 있는 작은 점이 굴거미 굴이 없는 땅을 흰색으로 표시해 준다.

    퍽! 퍼퍽! 퍽!

    드레이크가 그런 내 뒤를 바짝 따라오며 화살로 엄호한다.

    달려드는 굴거미들은 여지없이 머리에 바람구멍이 난 채 뒤집어졌다.

    오-오오오오…….

    거미들의 피해가 늘어날수록 여덟 다리 대왕이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큭!? 따라잡히겠다! 얼마 못 버텨! 잡힌다! 잡힌다! 잡힌다! 잡힌드아아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드레이크알림시계가 여덟 다리 대왕이 얼마만큼 가까이 추격해 왔는지를 실시간으로 알려 주고 있다.

    이윽고.

    쏴아아아…

    우르릉!

    철썩-

    저 앞에서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파도가 박살나는 소리 역시도 생생했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들려오고 있는 폭풍의 소리.

    이윽고. 전면에 뿌연 물안개와 칙칙한 먹구름이 보인다.

    얼굴에 와 닿는 물안개, 그 차갑고 찝찔한 습기.

    오-오오오오!

    그리고 여덟 다리 대왕의 격노성!

    목덜미에 적이 내뿜는 후끈한 입김이 와 닿는다.

    동굴 탈출이 먼저일까 보스 몬스터에게 잡히는 것이 먼저일까.

    그 운명의 기로에서.

    “…! …! …!”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내던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