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09화 (209/1,000)
  • 210화 여덟 다리 대왕 (1)

    부유섬 중심부에서 맞닥뜨린 중간 보스 ‘거미 대모’

    놈은 내가 풀어 놓은 살육 벌들의 대부분을 잡아먹고는 탈피를 시작했다.

    <다리 많은 여제> -등급: A+ / 특성: 맹독, 벌레, 즉사, 킬 체인, 완전변태

    -서식지: 부유섬

    -크기: 20m.

    -이 세상 모든 다리 많은 것들의 위에 군림하는 존재.

    먹이사슬 안에 적수가 없는 대형 충왕종 몬스터들도 그녀의 앞에서는 날갯짓 소리를 조심할 정도이다.

    고위 몬스터로의 진화.

    그 요건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어떤 몬스터는 수없이 많은 전투경험을 통해 진화하고, 또 어떤 몬스터는 특정한 환경에서 변이를 일으켜 진화하기도 한다.

    간절한 감정에 의해 진화하는 몬스터도 있고 먹이를 많이 먹어야 진화하는 몬스터도 있다.

    일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단 진화를 하게 되면 본래 전투력의 10배 이상 강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모든 진화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한 가지만은 공통적이다.

    진화 직후의 순간에는 매우 약해진다는 것이다.

    특히나 벌레 특성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한 편이었다.

    “딜 타이밍이다! 쏴!”

    나는 드레이크를 향해 손짓했다.

    드레이크는 바로 내 말대로 움직였다.

    가장 굵고 긴 화살로 점사.

    한 발 한 발 묵직한 화살들이 다리 많은 여제의 물렁물렁한 몸뚱이에 박힌다.

    나 역시도 폭딜을 꽃아 넣기 시작했다.

    어차피 깎단으로 도트데미지를 입혀 놓은 이상 마동왕 메타로 나가는 것이 조금 더 효율적이다.

    나는 지진과 와류의 힘을 주먹에 담아 다리 많은 여제를 두들겼다.

    콰쾅! 우르르르릉!

    섬을 뒤흔들 정도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광역을 초토화시킬 수 있을 위력의 주먹이 오로지 한 개체를 향해서 쏟아지고 있다.

    [끄윽! 끄르륵!]

    다리 많은 여제는 거미 대모보다 훨씬 강력했고 보유한 특성 역시도 더 많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덜 벗겨진 갑각이 그녀의 다리에 지저분하게 걸려 있다.

    상반신 역시도 허물에서 반쯤 빠져나오다 만 상태라서 손을 움직이기도 불편하겠지.

    “원래 싸움 도중에 변신하면 다 그런 거야.”

    나는 다리 많은 여제를 사정없이 쥐어 팼다.

    악당을 상대하는 마법소녀나 괴수를 상대하는 변신 로봇의 맹점도 바로 이런 것이리라.

    변신이나 합체를 할 거면 해 놓고 와서 싸워야지 왜 전투 도중에 해? 그걸 누가 기다려 준다고.

    나와 드레이크는 모든 힘을 다해 딜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빠르게 드러났다.

    쿵-

    다리 많은 여제의 HP가 0이 된 것이다.

    -띠링!

    <세계 최초로 ‘다리 많은 여제’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레이드 랭킹 집계 중...>

    <1위. ‘고인 물’ ‘드레이크 캣’>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결국 다리 많은 여제는 허물에서 몸을 채 빼내지도 못한 채 수많은 무릎을 꿇었다.

    땡그랑!

    나와 드레이크의 앞에 각자 아이템이 하나씩 떨어졌다.

    -<거미어미의 죽음사슬> 갑옷 / A+

    다리 많은 여제는 조금의 손해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건드린 적은 죽을 때까지 추적해 보복한다.

    -물리 공격력 +5,000

    -방어력 +500

    -특성 ‘킬 체인’ 사용 가능 (특수)

    -<다리 많은 여제의 허물발톱> 한손무기 / A+

    탈피에 실패한 거미의 허물을 깎아 만든 단도.

    안에는 지독한 독과 저주가 갇혀 있다.

    -물리 공격력 +3,500

    -특성 ‘맹독’ 사용 가능 (특수)

    -특성 ‘즉사’ 사용 가능 (특수)

    철조망과 쇠사슬로 이루어진 갑옷.

    특이하게도 방어력보다 공격력이 더 높은 갑옷이다.

    단도는 대충 만들어진 것처럼 투박했으나 날 부분만큼은 그 무엇보다도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나는 단도가 마음에 드는군. 예전에 쓰던 것보다 즉사 특성이 터질 확률이 높아.”

    드레이크는 단도를 골랐다.

    자연스럽게 나는 갑옷을 갖기로 했다.

    “마동왕 메타에 도움이 되겠네.”

    마동왕은 고인물과 달리 기동성이 떨어진다.

    예전에 프로리그 습격사건 당시 조디악을 몇 번이나 허무하게 놓쳤던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날 정도.

    때문에 도망치는 적을 견제할 만한 방법이 필요하던 차였다.

    ‘킬 체인’ 특성은 근접 데미지를 가해 온 적을 가까이에 묶어 두는 스킬.

    ‘조금 애매하긴 한데…’

    그래도 마동왕의 약점을 약간이나마 보완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다리 많은 여제를 처치하고 얻은 사슬갑옷을 인벤토리에 갈무리하고 있을 때.

    드레이크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한데, 분명 A+등급 몬스터를 처치했는데 왜 호칭이 붙지 않는지 모르겠군.”

    원래 A등급 이상의 몬스터를 처치할 시 기여도에 따라 호칭과 특전이 붙는다.

    하지만 분명 다리 많은 여제는 A+등급의 몬스터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호칭이나 특전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끼-야아아아악!]

    죽은 줄 알았던 다리 많은 여제가 갑작스럽게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뭐, 뭐야!?”

    드레이크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죽으며 아이템까지 뱉었던 몬스터가 갑작스럽게 다시 움직인다면 누구나 놀랄 것이다.

    그것도 무려 A+등급의 몬스터라면 더더욱 말이다.

    나 역시도 흠칫했다.

    아무리 머리로 알고 있어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또 다르니까.

    “진정해. 예상했던 일이다.”

    나는 드레이크에게 말했다.

    다리 많은 여제의 특성인

    ‘완전변태’

    그것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다리 많은 여제는 HP가 0이 되었을 때 한 개의 목숨을 더 얻어.”

    “뭐라고!?”

    드레이크는 기가 막히다는 듯 되물었다.

    저 무시무시한 괴물이 목숨 코인을 두 개씩이나 가지고 있다니!

    놈은 다운그레이드 상태인 거미 대모 때도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탈피 직후인 점을 이용해서 겨우 잡았는데 설마 목숨이 여벌로 있을 줄이야!

    하지만.

    다리 많은 여제는 기껏 되살아났음에도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다만 몸을 돌려 굴속을 향해 전속력으로 도망칠 뿐이다.

    드레이크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나는 그런 드레이크의 등을 탁 쳤다.

    “완전변태 특성은 무조건 목숨을 하나 더 주는 게 아냐. 부활한 지 1분 40초 이내에 ‘특별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부활에 실패하게 되지. 서둘러야 해!”

    드레이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나를 따라 움직였다.

    우리는 벌써 저 멀리 달아나 버린 다리 많은 여제를 따라 잽싸게 이동했다.

    1분 40초는 체감 상 굉장히 길기도, 짧기도 한 시간이다.

    [차르륵!]

    [캬아악!]

    [구욱! 꾸루룩!]

    망자 거미, 굴거미, 철거미 등등…온갖 종류의 거미들이 앞을 막아섰다.

    드레이크는 그런 거미들을 향해 방금 얻은 단도를 거침없이 휘둘렀다.

    “어따, 너희들 어미가 주는 거다.”

    단도가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거미 하나의 멱이 끊어졌다.

    가끔 즉사 특성이 터져 나올 때마다 커다란 거미들이 실에서 굴러 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드레이크의 엄호, 서포트 수준은 이제 거의 달인의 경지였다.

    그동안 나는 지면에 숨겨져 있는 굴거미 굴의 숫자들을 파악해 갔다.

    “이 주변에 3개, 저쪽에 4개, 고로 중간 부분에는 함정이 없고, 또 앞쪽에 2개…여기는 안 봐도 뻔하고……깃발도 이제 거의 다 떨어졌군. 하지만 없어도 뭐 상관없어.”

    피그말리온이 걸어 준 버프 덕에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지뢰찾기 고수 난이도 클리어 시간이 60초도 걸리지 않는 나다.

    세계 신기록이 38초인 것을 감안하면 나도 꽤 잘 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

    우리는 달리는 것보다는 느리게, 걷는 것보다는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경보(輕步)랄까?

    “드레이크! 시간은 얼마나 지났어!? 지뢰 찾느라 놓쳤어!”

    “이런! 나도 지금 거미들 잡느라 바쁘다! 확인 못 했는데!?”

    나는 점점 많아지는 굴거미 굴 때문에, 드레이크는 계속 달려드는 고등급 거미들 때문에 시간을 제대로 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결국 부유섬의 끝에 도착하고 말았다.

    -띠링!

    <히든 던전 ‘부유섬 심장부’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 고인물, 드레이크>

    이내, 우리는 부유섬의 가장 깊은 곳에 섰다.

    눈앞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점액과 철조망, 뼈다귀들이 복잡하게 뒤엉켜 만들어진 문으로 그 어떤 충격에도 열릴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당연히 열쇠구멍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을 향해 화살을 몇 대 날려 본 드레이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도저히 뚫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당연하지. 문은 뚫는 게 아니라 여는 거니까.”

    나는 드레이크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섰다.

    “…….”

    한참 동안 문을 유심히 들여다본 결과, 나는 문 표면에 돋아나 있는 36개의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좋아. 아직까지는 예상대로야.”

    나는 눈을 감고 오래 전 공략집에서 본 기억을 더듬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문을 여는 방법은 여기 튀어나와 있는 36개의 점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치 스마트폰 패턴 잠금 해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점과 점을 이어 특정한 모양이나 무늬를 만들면 문의 잠금이 해제된다.

    그 방법은 매번 다르지만, 한 가지만은 공통적이다.

    바로 중앙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거미!

    <패턴 거미> -등급: D / 특성: 반복, 맹독

    -서식지: 부유섬 심장부

    -크기: 0.001m.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거미.

    남들의 행동을 반복해서 따라하는 습성이 있다.

    1mm밖에 되지 않는 작은 거미. 너무 작아서 그냥 먼지처럼 보일 정도다.

    이 녀석의 존재를 모르고 온 이들은 아마 영영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나는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기에 이 작은 거미의 중요성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신기하군. 이렇게 작은 몬스터가 있었나?”

    “만지지 않는 게 좋을걸? 쪼끄만 게 독은 무지 세다고. 우린 그냥 얌전히 이 녀석 움직임만 따라가면 돼.”

    나는 거미를 만지려는 드레이크를 만류한 채 문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작은 거미는 부지런하게 실을 지으며 문에 난 36개의 점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다.

    나는 이 작은 거미를 따라가며 점과 점을 손으로 이었다.

    이윽고.

    문의 잠금 패턴이 해제되었다.

    ㉕ ㉟ ⑰ ㉝ ⑲ ㉛

    ㉚ ⑧ ⑪ ⑥ ⑬ ㉔

    ㉓ ⑭ ⓵ ⓸ ⓽ ㉙

    ㉘ ⑩ ⓷ ⓶ ⑮ ㉒

    ㉑ ⑯ ⑦ ⑫ ⑤ ㉗

    ㊱ ㉖ ㉞ ⑱ ㉜ ⑳

    “클리어.”

    거미줄 모양처럼 길고 복잡한 패턴이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드레이크를 뒤로한 채 부유섬 심장부의 문을 열었다.

    이윽고.

    심장부 내부의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흰 점액과 뼈다귀들이 굳어 만들어진 밀실.

    역하고 후끈한 공기가 물씬 풍겨온다.

    넓은 방 중앙에는 거대한 고치 하나가 가늘게 약동하고 있었다.

    드레이크는 그것을 보며 경악했다.

    “…뭐냐 이 번데기는?”

    번데기는 얇은 피막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때문에 안에서 꿀렁거리는 체액들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까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 …! …!

    시커먼 그림자가 번데기 속에서 미친 듯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번데기가 부풀며 안에 든 체액이 요란하게 끓어오른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살짝 늦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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