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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08화 (208/1,000)
  • 209화 다리 많은 것들의 섬 (5)

    웨에에에에엥!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는 날갯짓 소리.

    동굴이 무시무시한 진동으로 꽉 찼다.

    붕붕붕붕붕-

    엄청난 수의 살육 벌들이 동굴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나 같이 부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몸길이 30cm 이하의 아성체(兒成體)들이다.

    <살육 벌> -등급: D / 특성: 독, 벌레, 군락

    -크기: 1m.

    -서식지: 전 대륙.

    -덩치는 크지만 느린 벌. 날개를 움직이는 속도조차 느려 높이 날 수도 없다.

    양 앞다리와 꽁무니에 붙어 있는 송곳 끝에는 맹독이 감돌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몬스터.

    살육 개미와 함께 D급 몬스터를 대표하는 보급형 초보몹이다.

    독은 꽤 세지만 어이없을 정도로 느린 공격속도 때문에 가장 약한 몬스터 반열에 들기도 한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개체수 덕분에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이 살육 벌을 먹잇감으로 삼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부유섬의 거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홋홋호호!]

    거미 대모는 앞다리를 휘둘러 달라붙는 살육 벌들을 후려쳤다.

    살육 벌들의 수는 많았지만 거미 대모에게는 그저 먹잇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후룩! 찹찹!]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붙어 오는 살육 벌들을 향해 연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부유섬에는 살육 벌이 서식하지 않아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겠지만, 데우스 엑스 마키나 월드의 모든 포식자형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이 살육 벌의 고기 맛을 좋아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한편.

    드레이크는 나를 돌아보았다.

    “오호, 벌들을 이용해 시간을 번 건가?”

    나는 대답 대신 커피 찌꺼기가 들어있던 자루를 흔들어 보였다.

    -<레글리 농장의 커피자루> D

    커피원두나 찌꺼기 등이 대충 담겨져 있는 자루.

    일꾼들이 일을 대충대충 했기 때문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간혹 벌레나 벌레의 알이 나왔다고 클레임이 걸려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살육 벌들이 쏟아져 나온 이유는 커피농장 일일퀘스트 작업 도중 벌의 알집 하나가 커피에 섞여 자루 안으로 딸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 부화한 결과가 바로 이것!

    나는 일찍이 농장 일을 하다가 살육 벌의 알집 등을 발견하는 족족 자루 속에 같이 넣었다.

    애초에 커피 밭에서 심심하면 툭툭 튀어나오는 게 살육 벌이고 그것들을 잡으면 랜덤하게 떨어지는 것이 살육 벌의 알집이다.

    그것들이 커피 찌꺼기에 휘말려 들어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레글리의 농장에서는 모든 일이 비위생적으로 대충대충 처리되니까.

    한편.

    커피 찌꺼기가 담겨 있던 자루에서는 살육 벌들이 거의 1백 마리 가까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좁은 동굴 안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거미 대모를 공격했다.

    번쩍!

    살육 벌의 두 앞다리와 꽁무니에서 날카로운 송곳이 튀어나왔다.

    송곳의 길이는 약 17cm.

    끝은 갈고리 모양의 역린이 돋아 있어서 한번 박히면 부러질지언정 뽑히지는 않는다.

    송곳의 주변에 나선 모양으로 음각되어 있는 홈은 벌의 대장에서 배어 나온 마비독이 잘 흘러내려 갈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이것이 일단 한번 목에 박히면 아무리 고등급의 몬스터라도 짧은 시간 동안 전신이 마비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닿지 않는 무기는 공허한 것에 불과하다.

    살육 벌은 너무나도 약하고 느린 몬스터.

    애초에 위험등급도 D급 정도밖에는 안 되는 녀석들이다.

    백 마리가 모인다고 해도 젖거미 한 마리 선에서 정리될 게 뻔한데 상대가 거미 대모여서는 가망이 없다.

    차라라락…

    거미 대모가 펼친 끈적한 철조망이 사방을 옥죄였다.

    달려들던 살육 벌들은 이 철조망 그물을 제대로 뚫어보지도 못한 채 모조리 나포되었다.

    픽- 피픽- 픽-

    철조망의 가시에 베이거나 찔린 살육 벌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축 늘어져 버렸다.

    살아남은 녀석들도 철조망 거미줄을 뚫지 못하고 발버둥친다.

    몇몇 벌들은 바닥에 잘못 내려앉았다가 굴거미에게 붙잡혀 땅굴 속으로 끌려들어 가기도 했다.

    드레이크는 거미 대모의 앞을 막아서는 살육 벌들을 응원했다.

    “힘내라! 너희들이 느려 터져서 그렇지 마비독만 한 방 제대로 먹일 수 있으면 A급 몬스터도 움찔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살육 벌들이 그런 것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벌들은 그저 느리게 붕붕 날아다니다가 거미 대모의 다리에 꿰여 꼬치 신세가 될 뿐이다.

    “……이런.”

    드레이크의 안색이 침중해졌다.

    장소가 좁다 보니 마비침 한 방쯤은 명중시켜 줄 줄 알았는데, 너무 요행을 바란 모양이다.

    “어진. 계획이 실패한 것 같은데?”

    그는 나를 돌아보며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인데.”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줄 뿐이다.

    애초에 살육 벌들이 거미 대모에게 마비침을 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만약 정말 기적이 일어나 거미 대모에게 마비침을 놓을 수 있었다면 엄청난 대박이었겠지만, 나는 요행수를 바라지 않는 성격이니까.

    우적- 우적- 우적- 우적-

    거미 대모는 앞다리에 꿴 살육 벌들을 꼬치 빼먹듯 포식하고 있었다.

    ‘과연. 거미 대모는 공격받는 도중에도 먹을 게 보이면 먹는다더니, 그 말이 맞군.’

    나는 오래 전에 들었던 공략집의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거미 대모는 굉장한 식탐꾼이라서 죽인 것은 모조리 먹어치운다.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없는 부유섬의 환경 상 당연한 식성일지도 모른다.

    먹이를 먹으면 HP가 회복된다.

    이 점은 플레이어나 몬스터가 똑같았다.

    대부분의 몬스터는 풀 HP상태에서는 더 이상 사냥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만, 특이하게도 거미 대모는 풀 HP상태에서도 먹이를 꾸역꾸역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점차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뿌직! 뿌지직! 뚜드득!

    식사에 여념이 없는 거미 대모의 몸이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몸 전체에 미세한 실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환한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나는 그런 현상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탈피하는군.”

    옆에서 드레이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예전에 악의 고성에서 요르문간드가 쌍뿔칠흑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목격했었다.

    심해 속의 던전 ‘독주의 무덤’에서는 지옥주정꾼 대게가 지옥바퀴 대왕게로 진화하는 것도 봤었다.

    두 몬스터 다 탈피를 통해 상위 등급의 몬스터로 진화했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거미 대모 역시도 마찬가지의 패턴을 보이고 있었다.

    파아아앗!

    거미 대모의 전신에서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놈의 전신을 휘감는 빛!

    그리고 그 안에서 전혀 새로운 존재가 눈을 뜨고 있었다.

    <다리 많은 여제> -등급: A+ / 특성: 독, 벌레, 즉사, 킬 체인, 완전변태

    -서식지: 부유섬

    -크기: 20m.

    -이 세상 모든 다리 많은 것들의 위에 군림하는 존재.

    먹이사슬 안에 적수가 없는 대형 충왕종 몬스터들도 그녀의 앞에서는 날갯짓 소리를 조심할 정도다.

    아까보다 더욱 더 크고 강력해진 거미형 몬스터.

    위험 등급도 한 단계 올랐다.

    [오호호호호!]

    그녀는 껍질을 벗으며 웃기 시작했다.

    찬란한 빛무리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다리 많은 여제의 아름다운 나신에서 체액이 떨어지며 그 전에 입고 있던 갑각이 천천히 벗겨진다.

    그녀는 다리 하나하나, 털 한 올한 올을 신경 써 가며 천천히 허물을 벗고 있었다.

    “…….”

    드레이크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저렇게 크고 아름다운 몬스터가 허물을 벗고 변신하는 모습을 언제 또 보겠는가?

    하지만.

    툭-

    나는 그런 드레이크의 어깨를 쳤다.

    “뭐 해?”

    “……응?”

    “공격 안 하고 뭐 하냐고.”

    내가 묻자 드레이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워, 원래 변신 도중에는 공격하지 않는 게 매너 아닌가?”

    “야! 그딴 게 어딨어! 틈 보이면 바로 치는 거지!”

    나는 드레이크에게 핀잔을 줌과 동시에 바로 깎단을 집어 들었다.

    원래 마법소녀와 메카닉은 변신이나 합체 도중에 공격해야 제맛이다.

    막 변신하고 있을 때만큼 살결이 말랑말랑하고, 시간 많이 잡아먹고, 주의력 분산되어 있을 때가 또 없다.

    지금이 절호의 공격 기회인 것이다.

    “누가 싸우다 말고 옷 갈아입으래!? 오늘 체육은 비 오는 관계로 실내 자습이다, 이 자식아!”

    나는 깎단을 든 채 달려가 다리 많은 여제의 몸을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퍽퍽퍽퍽퍽퍽퍽퍽퍽!

    아주 좋은 딜 타이밍이다.

    나는 이걸 노리고 일부러 거미 대모에게 살육 벌들을 먹이로 주었던 것!

    드레이크 역시 정신을 차렸는지 열심히 활시위에 살을 걸고 있다.

    [꺄아아아악!]

    거미 대모, 아니 다리 많은 여제는 까무러칠 듯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치사하게 변신 중에 공격하는 것이 어디 있느냐는 태도.

    하지만 자연은 냉혹한 법이다.

    ‘만화영화도 아니고, 변신 기다려주고 뭐 그런 게 어디 있냐!’

    애초에 벌레들에게 있어 탈피라는 것은 목숨을 내걸고 하는 행위가 아닌가!

    아무런 방해 없이 혼자서 탈피하다가 허물이 발에 걸려서 그것을 빼는 데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고 죽는 개체도 많다.

    도중에 포식자에게 공격당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또한 우화 이후도 문제다.

    날개나 갑옷, 턱, 집게 등이 모두 부드럽고 연약할 때가 아니던가?

    체액이 마르고 무기들이 단단해지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그리고 그 법칙은 게임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귀찮은 특성인 ‘킬 체인’도 이 순간만큼은 봉인되는 것이다!

    심지어.

    붕붕붕붕붕-

    아직 살아 있던 몇 마리인가의 살육 벌들도 다리 많은 여제에게 복수를 시작했다.

    푹! 푸욱! 푹!

    느려서 피하기 쉽지만 일단 한 대 맞으면 무조건 전신이 마비될 수밖에 없는 살육 벌의 독침이다.

    아직 말랑말랑한 다리 많은 여제의 살결은 살육 벌의 독침에 속수무책으로 뚫렸다.

    [꺄아아악!]

    다리 많은 여제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돌려 나와 드레이크를 죽일 듯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말뚝 딜을 넣는 데 열심이다.

    깎단의 도트 데미지는 이미 들어갔다.

    지금부터는 마동왕 메타로 나서는 게 더 유리할 것이다.

    “폭딜이 뭔지 보여 줄게.”

    나는 양 손에 A+급 건틀릿 두 개를 착용했다.

    쿠-구구구구!!!

    지진과 와류의 힘이 두 손아귀에서 펄떡펄떡 날뛴다.

    그리고 그것이 탈피 직후의 말랑말랑한 살결을 가진 다리 많은 여제를 향했다.

    여차하면 섬을 통째로 뒤집어엎을 각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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