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203화 (203/1,000)
  • 204화 일일 퀘스트 노가다 (4)

    드레이크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사정없이 떨리는 시야, 한없이 솟구치는 분노.

    “……이게 뭐냐?”

    드레이크는 상대가 NPC라는 사실도 잊고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NPC인 농장주 레글리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왜? 뭐? 어디서 눈을 고 따위로 떠? 주인이 마음에 안 들어!?]

    그는 일일 퀘스트의 보상으로 내민 자루를 흔들어 보였다.

    [자, 빨리 받아가. 고맙습니다-하는 것 잊지 말고. 어허, 어른이 뭘 주시면 두 손으로 받아야지! 이렇게 일 가르쳐 주고 돈까지 주는 사람 요즘 드물어요. 자, 어서 받어. 팔 떨어져.]

    레글리가 내민 자루에는 시커먼 가루들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원두를 볶고 거른 뒤 남은 커피 찌꺼기였다.

    안주인 마리는 그 자루를 보며 깔깔 웃었다.

    [호호호! 저 쓰레기도 막상 남 주려니 아깝네. 집 주변에 뿌려 두면 거미 같은 것들 쫓기에 좋은데. 퇴비로 써도 되고.]

    “…….”

    드레이크는 멍한 표정으로 커피 찌꺼기가 든 자루를 받아들었다.

    그렇게 해서, 일일퀘스트가 종료되었다.

    으레 일일퀘스트를 주는 NPC들은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수고했다는 둥 감사 인사를 하지만, 레글리 내외는 조금 달랐다.

    [쯧! 기껏 일 다 가르쳐 놨더니 나가네, 무슨 철새도 아니고. 요오오오즘 것들은 당최 근성이 읎어, 근성이!]

    [요즘 젊은 애들은 당최 뭘 안 하려고들 하잖아요 여보. 그래도 우리 농장에서 일했던 커리어랑 기술 있으면 어딜 가서도 밥값은 하면서 살겠죠 뭐. 호호호! 우리는 아주 자선사업가라니까.]

    레글리와 마리의 대화를 들으며 드레이크는 처음으로 NPC를 향해 살의를 품었다.

    바로 그때.

    툭툭-

    나는 드레이크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거, 빌려 줄까?”

    내가 드레이크에게 내민 것은 흰색의 가면이었다.

    -<피카레스크(Picaresque) 마스크> 가면 / A+

    사이코 연쇄살인마의 얼굴 가죽을 도려내어 그대로 건조했다.

    쓰는 순간, 집계는 시작된다.

    -특성 ‘연쇄살인’ 사용 가능

    -공격력 +48 (특수)

    ※이 가면은 착용자의 카르마 수치를 대신 적용받습니다.

    ※가면을 착용한 순간부터 Kill 수에 따라 공격력이 증가합니다.

    ※1Kill 당 상승하는 공격력은 1입니다.

    ※Kill 수의 집계는 오로지 플레이어 캐릭터에 한정되어 이루어집니다.

    카르마라는 것은 ‘업(業)’이라는 개념이다.

    과오를 저지를 때마다 조금씩 축적되는 것으로 쌓기는 쉬워도 해소하기는 어렵다.

    단순히 플레이어뿐만이 아니라 NPC를 상대함에 있어서도 카르마 수치는 쌓인다.

    아니, 오히려 플레이어를 죽이는 것보다 NPC를 죽였을 때 얻는 카르마 수치가 더욱 높다.

    단순히 살인이나 폭행으로만 쌓이는 것이 아니라 불손한 언행, 도둑질, 퀘스트 실패, 하다못해 실수로 툭 부딪쳐서 쌓일 수도 있는 것이 이 카르마 수치이다.

    이 카르마 수치가 많이 쌓이면 NPC와의 거래들이 대부분 불가능해지며 아이템 구매, 판매, 수리, 감정, 교환 등 역시도 할 수 없다.

    상점에서 살 수 있는 소모품의 수가 제한적이 되거나 아주 불가능해 지기도 하고 사냥으로 얻은 아이템을 매각할 때에도 수수료가 꽤나 큰 폭으로 달라진다.

    물론 퀘스트를 받거나 클리어하는 것도 제한이 생기며 때에 따라서는 NPC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호감도와 인기도, 매력 수치 등과도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피카레스크 마스크’는 그 모든 업보(業報), 즉 카르마 수치들을 대신 적용받아 준다.

    이걸 쓰고 있는 동안 착용자는 익명의 가면 속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드레이크 하고 싶은 거 다 해.”

    나는 드레이크에게 피카레스크 마스크를 빌려 준 뒤 오두막 벽에 가서 슬쩍 기댔다.

    “…….”

    이내, 드레이크는 마스크를 착용했다.

    츠츠츠츠-

    흰색 마스크는 드레이크가 얼굴에 쓰는 것만으로도 시뻘겋게 변했다.

    한편.

    농장주 레글리와 마리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드레이크를 발견했다.

    [아직 안 갔어? 빨리 꺼져! 오늘 일은 다 끝났다고! 내일 또 오든가 해!]

    [호호호호, 우리 농장이 복지조건이 좋긴 좋은가 봐요. 아직도 노예, 아니 직원들이 안 가고 서성이는 걸 보면.]

    이윽고, 레글리는 허리춤에서 예의 그 채찍을 꺼내 들었다.

    [내 집에서 빨리 나가!]

    그는 채찍을 휘둘러 드레이크의 얼굴을 노렸다.

    짜악-

    레글리의 채찍이 드레이크의 얼굴을 한 바퀴 휘감는다.

    하지만.

    레글리는 알지 못했다.

    일일퀘스트가 끝난 이상 드레이크는 더 이상 그의 직원이 아니라는 것을.

    “…….”

    이내.

    레글리 농장의 전(前) 직원이었던 드레이크 캣이 움직였다.

    뚝!

    그는 거실 중앙으로 가 테이블을 뒤집었고 이내 다리 하나를 손으로 분질러 꺾었다.

    실팍한 물푸레나무 몽둥이가 바로 준비되었다.

    [요오오오즘 것들은 당최 노오오오오오오력을…….]

    [호호호, 요즘 세상에 우리 같은 농장 주인들 없…….]

    레글리와 마리는 정해진 대사를 내뱉을 수 없었다.

    드레이크가 몽둥이를 쥐고 레글리와 마리를 사정없이 쥐어 팼기 때문이다.

    딱! 우지끈! 빠각! 우득! 뿌지직! 까드득! 우드득! 따악! 따각!

    드레이크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몽둥이를 야무지게 감싸 쥔 채 레글리와 마리를 마구 쥐어 팼다.

    “허리 펴, 허리. 디스크 나간다. 서, 똑바로 서, 똑바로 서라고 그러다 부러져. 거기 딱 대, 거기. 치워, 아냐 아냐 됐어 그대로 있어, 내가 치우게 해 줄게.”

    머리고 허리고 다리고 손이고 어디고를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매타작.

    [억! 어억! 왜 왜 이랙걱꺼억! 나 농장 으악! 주인이야으악! 자넨 장유유서도 없느흐악! 갸악! 껙!]

    [꺄악! 미친놈이 사모 패냌컥컼크엑 꺅 킁 켁! 노인공…곀! 살려주세욬크칵! 케엑!]

    1분도 채 되지 않아 농장주 부부는 반쯤 실신한 채 바닥을 나뒹굴게 되었다.

    “……후.”

    드레이크는 나지 않는 땀을 훔치며 한숨을 쉬었다.

    달그락-

    박살난 테이블 다리가 바닥에 둥글어 다닌다.

    눈 깜짝할 새에 4개의 테이블 다리가 모두 부러져 버렸다.

    [호에에에엥-]

    레글리는 피 땀 눈물을 뿜어내며 바둥거렸다.

    그래도 일단 테이블 다리가 죄다 부러졌으니 매타작은 멈췄다.

    뭐, 그동안 사람 다리도 죄다 부러진 것이 문제지만.

    하지만.

    그들의 수난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뭐, 좀 더 손에 쫙쫙 달라붙는 거 없나?”

    드레이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무언가 신박한 아이템을 발견했다.

    그것은 커피 콩을 털던 홀태였다.

    묵직한 홀태는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 빛난다.

    [허억!?]

    [히익!?]

    레글리와 마리는 혼미해진 정신으로도 헛바람을 집어 삼켰다.

    탈탈탈탈탈탈탈-

    커피 콩을 탈곡하던 홀태가 이제는 레글리와 마리의 영혼을 탈곡한다.

    구타를 자행하고 있는 드레이크에게, 나는 넌지시 말했다.

    “에이, 살살해. 아무리 피카레스크 마스크가 카르마 수치를 완벽하게 대신 흡수해서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마음껏 두들겨 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지만 말이야.”

    나는 드레이크를 말리는(?) 동시에 의자에 앉아 네일아트를 했다.

    험한 일을 많이 하다 보니 큐티클이 많이 생겼네 이거.

    이내, 드레이크는 레글리와 마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잘 봐라. 이제부터 네놈들 커피 밭이 어떻게 되는지.”

    드레이크는 아궁이에 있던 장작에 불을 붙여 들고 나왔다.

    그리고 레글리와 마리가 보는 앞에서 광활한 넓이의 커피밭을 깡그리 불 싸질러 버렸다.

    화르르륵… 뿌직! 뿌지직! 쿠르르륵…

    풍년이 들었던 커피밭은 순식간에 검붉은 화광에 휩싸였다.

    곳곳에서 시커먼 연기가 밤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게 피어올랐다.

    스사사사삭-

    밭에 살던 다양한 몬스터들이 재빨리 피신하는 것이 보였다.

    이 필드의 생명이 완전히 끝날 것이라는 암시였다.

    [아아아아아안돼!!]

    레글리와 마리는 울부짖었지만 드레이크의 매타작이 남긴 후유증 때문에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다.

    “……커피 마시기 딱 좋은 풍경이네.”

    나는 오두막의 창가에 앉아 홍염이 번지는 커피 밭을 바라보았다.

    밤 12시.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검은 천이 붉은 염료에 물들어간다.

    한밤중의 커피 밭이 환하게 불타는 장면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따다닥- 오도독- 투두둑-

    밖에서 원두콩 볶아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올 때마다 짙은 커피 내음이 울려 퍼진다.

    “으하하하! 장관이구만!”

    드레이크는 10년 묵은 체증이 뻥 뚫린 듯 웃어 버렸다.

    실제로는 하루 묵은 체증이지만 말이다.

    나는 밖으로 나가 드레이크의 어깨를 툭 쳤다.

    “잘 봐둬. 보통 맵의 지형은 파괴된 지 24시간 뒤면 자동으로 복구되지만, 이 맵만은 영원히 복구가 안 되니까 말이야. 이후로 노부부는 파산하기 때문에 명칭도 ‘레글리의 농장’에서 커피 원두가 탄 곳이라는 의미의 ‘탄두리’로 바뀐다고.”

    “그렇다면 더욱 쌤통이군.”

    드레이크는 고개를 돌려 얼굴이 퉁퉁 부은 레글리와 마리를 노려보았다.

    그들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이마를 바닥에 대고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일일 퀘스트가 모두 끝났다.

    *       *       *

    이윽고.

    우리는 커피밭을 떠났다.

    얻은 것이라고는 커피 찌꺼기 한 자루뿐.

    “……우리 이 일일퀘스트 왜 한 거냐?”

    드레이크는 피카레스크 마스크를 벗고는 허탈한 표정으로 물었다.

    짜증나는 농장주 내외를 마음껏 두들겨 팬 것까지는 좋았지만…… 복수는 허탈함만을 낳는 법이다.

    결국 24시간을 그냥 생으로 내버리고 말았다.

    얻은 경험치나 아이템도 보잘 것 없었고 여기서 얻은 숙련도는 다른 데 써먹을 곳도 없다.

    하지만.

    나는 눈을 빛냈다.

    “천만에, 우리는 얻은 게 있지.”

    “……뭔데?”

    드레이크의 질문에, 나는 대답 대신 양쪽 팔을 파닥거렸다.

    그러자, 내 몸에서 나는 겨드랑이 냄새가 주변에 솔솔 풍겨 나온다.

    그 냄새를 맡은 드레이크는 표정을 찌푸렸다.

    “……커피 냄새 난다.”

    “바로 그거야.”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겨드랑이뿐만이 아니라 전신 곳곳에 완전히 푹 배어 버린 커피 쩐내.

    바로 이것이 오늘 얻은 최고의 수확이란 말씀!

    “자, 가자. 몸의 커피냄새가 빠지기 전에.”

    “……어딜?”

    드레이크가 고개를 갸웃하자, 나는 핀잔을 주듯 말했다.

    “당연히 더 괴랄하고 흉악한 던전이지. 그걸 바라던 거 아냐?”

    그러자.

    드레이크의 입가가 씨익 휘어졌다.

    “그래, 이래야 내가 인정한 파트너답지.”

    드디어 기다리던 것이 왔다는 듯한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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