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일일 퀘스트 노가다 (3)
[애농심을 가지고 일해! 너희들이 이 농장의 주인이 됐다고 생각하면서 일하란 말야! 다 너네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 농장이 잘 되어야 너희도 잘 되지! 물론 농장이 잘 된다고 해서 네 임금이 올라가지는 않지만!]
농장주 레글리는 계속해서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짝-
채찍이 내 왼쪽 볼을 때리며 휘감겨 든다.
머리를 칭칭 휘감은 채찍은 이내 오른쪽 볼도 찰싹 때렸다.
공격력이 약해서 HP는 거의 닳지 않지만, 그래도 일하는 데에는 상당히 방해가 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레글리가 잠시 감시의 눈초리를 거둘라치면…….
[오호호호호, 자기들~ 바쁜데 미안. 그거 하던 거 잠깐 그냥 두고 저기 옆집 목장 가서 신선한 우유 한 접시 좀 얻어 오겠어? 우리 집 개가 요즘 통 식욕이 없어서…뭐라고? 지금 커피 따느라 바빠? 지금 그게 문제야!? 우리 뽀삐가 굶어 죽으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안주인 마리가 귀신같이 나타나 작업을 방해한다.
아무런 보상도 없는 퀘스트를 남발하는 그녀에게 거역이라도 할라치면 레글리가 험악한 표정을 지은 채 나타나 또다시 채찍질을 한다.
부들짱부들킹…….
드레이크는 이마에 핏줄을 세운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어찌나 짜증이 났는지 전신이 매너모드처럼 붕붕 진동하고 있을 정도.
그 와중에 그는 놀라운 작업 속도를 보이고 있다.
샥- 샥- 샥-
궁수 특유의 빠른 손놀림으로 잘 여물은 커피 콩을 따서 바구니에 담는다.
이후 바구니에 있는 커피 콩 중 상품과 하품을 선별하고 그것을 물로 깔끔하게 씻은 뒤 햇볕에 말린다.
돗자리에 말린 커피 콩을 부엌으로 가져가 웍에 넣고 센 불에 찹찹- 볶아준 뒤 그것을 종이로 만들어진 작은 봉투에 개별포장 하는 것이 일일퀘스트의 내용.
하지만 이게 말이 쉽지 직접 해 보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화덕 몇 개가 쉬지 않고 돌아가는 부엌의 열기는 가만히만 있어도 HP가 쭉쭉 닳을 정도로 무더웠다.
거기에 커피원두들이 볶아지며 내뿜는 독한 커피향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원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인데 커피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마 두통 때문에 부엌을 뛰쳐나가리라.
…그뿐이 아니다.
커피 콩이 뜨거운 열기에 의해 바삭바삭해지며 그 껍질들이 가루가 되고 또 불에 그슬린 재가 되어 허공으로 풀썩풀썩 일어나는 것 때문에 눈도 제대로 못 뜰 정도였다.
매캐한 분진이 무더운 부엌을 꽉 채우고 있다.
거기에 엄청나게 발생하는 커피 찌꺼기들을 자루에 담아 저 멀리 퇴비 저장고까지 옮기는 것도 고역이었다.
물론 이 모든 작업은 땡볕이 쨍쨍 내리쬐는 밭과 화덕의 온도 때문에 펄펄 끓는 부엌을 오가며 반복해야 하는 일.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순간은 커피나무들에게 물을 주는 시간이지만, 그마저도 나무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들 때문에 방심할 수가 없었다.
붕-
곳곳에서 살육 벌 날아다니는 소리가 요란하다.
“어억!?”
호스로 물을 주던 드레이크가 순간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레글리의 채찍에 맞아 혈압이 지나치게 상승한 것일까?
하지만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 바들바들 떠는 것을 보니 그것은 아니다.
삐죽-
드레이크의 뒤에는 크기가 30cm 정도 되는 어린 살육 벌이 날카로운 침을 뽐내고 있었다.
“으…으으윽…이 D급 몬스터 놈이…….”
드레이크는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 살육 벌을 쳐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전신에 퍼진 마비독은 적어도 몇 초는 체내에 남는다.
하도 힘들고 더워서 벌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듣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
한편, 레글리와 마리는 쓰러진 드레이크에게 계속해서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이 자식! 외근 나가서 뭐 하나 했더니 여기 짱 박혀서 퍼져 있었네! 이 자식! 일해라! 일해!]
[어머! 어머! 어머! 별꼴이야 정말! 여보! 이 사람 내가 아까 아주 사소한 부탁 하나 했더니 일 바쁘다고 못 들어주겠다면서 사람 민망하게 하더니만, 여기 숨어서 땡땡이치려고 그랬나 봐요! 직원 교육을 다시 하든가 해야겠어! 너도 괘씸하지 뽀삐야? 물어! 앙!]
나는 두 NPC에게 당하고 있는 드레이크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천하의 ‘용냥’이 일일퀘를 깨다가 이런 꼴이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뻥-
나는 드레이크를 찌른 살육 벌을 발로 걷어차 저 멀리 날려 보냈다.
끽-
살육 벌은 이내 죽으면서 작은 아이템을 떨군다.
나는 그것을 인벤토리에 갈무리한 뒤 드레이크를 부축해 일으켰다.
“조심해. 저 벌들은 느려서 그렇지 독은 세다고.”
“으으으, 벌도 열 받지만. 저 NPC 부부가 더 열 받는다.”
“조금만 참자. 이제 다 했잖아.”
내 위로를 들은 드레이크는 이를 악물었다.
앞서 나가고 있는 파이오니아들에게는 1시간 1시간이 소중하다.
지금 1시간 앞서 나가는 것은 나중에 엄청난 메리트를 가지기 때문이다.
한데 이 농장에서 귀중한 24시간을 낭비해야 하다니, 드레이크로서는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커피를 수확하고 볶아도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오르긴 오른다.
정말 개미 눈곱만큼.
하지만 여기서 쌓은 경험치와 숙련도는 다른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양도 너무나도 미미한 것이다.
거기에 레글리와 마리 부부의 폭언과 채찍질 때문에, 플레이어들은 사실상 이 일일퀘를 하지 않는다.
레글리의 채찍질을 견딜 수 있는 고수라면 굳이 이런 잡 퀘스트를 깰 필요가 없고, 이런 잡 퀘스트의 보상이 필요할 정도의 하수라면 레글리의 채찍질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남부에 있는 중소농장들이 망해 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만, 레글리와 마리 부부만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면되어 사장되어 가는 퀘스트.
하지만.
내가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구린 퀘스트를 굳이 골라서 수행하고 있는 이유가 있다.
지글지글지글… 촤악-
나는 웍에 든 커피 콩을 들들 볶으며 생각했다.
“어디 보자, 이제 얼추 24시간이 다 지났지?”
이 거지같은 농장에 들어온 지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
상태창 위에 24시간을 거의 다 채웠다는 게이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제 다 끝났어(It's the end game).”
나는 유명한 오역 명대사를 입에 담으며 퀘스트의 최종단계에 돌입했다.
웍에 볶은 커피원두들을 종이 가방에 예쁘게 담았다.
커피 찌꺼기와 재들도 쓸어 모아 자루에 넣었고 비료 창고에 쌓아 둔 뒤 나무들에게 물을 주었다.
바닥에 수북하게 돋아난 잡초들도 일일이 다 뽑았고 천장에 비행종 몬스터를 막기 위한 새 그물도 쳤다.
본격적인 농장 업무는 여기까지, 그 외에도 안주인 마리가 준 잡 퀘스트들까지도 싹 끝내 놓았다.
더러운 빨래들은 깨끗하게 변해 빨랫줄에 걸렸고 신상 원피스와 구두들은 벽장에 들어갔다.
부녀회 알림판도 잘 돌렸고 아픈 개에게 약도 구해다 줬다.
옆집 사는 돼지치기 청년은 레글리가 출장 가는 날짜를 물어보기에 알려 주었다.
결국.
나와 드레이크는 모든 일일 퀘스트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 것이다!
이윽고. 요란한 알림음이 우리의 노고를 치하한다.
-띠링!
<일일 퀘스트 ‘헬반도 중소농장 취업’을 완료하셨습니다>
<농장주 레글리가 당신들을 ‘쓸 만한 놈들’로 여깁니다>
<안주인 마리가 당신들을 ‘밥값은 겨우 하는 것들’로 여깁니다>
드레이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어느 퀘스트보다 힘들었던 것 같다. 일일 퀘스트라고 해도 길어야 몇 시간짜리 과업이 보통인데…꼬박 24시간을 다 채우는 일일퀘라니, 차라리 고르곤과 1:1로 싸우는 것이 더 낫겠어.”
말을 마친 드레이크는 양 팔을 새처럼 파닥거려 보았다.
팔을 움직일 때마나 몸 구석구석에서 그윽한 커피 냄새가 올라온다.
신체 어느 구석이든 커피 냄새가 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커피 냄새가 아예 뇌까지 배어버린 것 같다.
현실 세계로 가고 나서도 한동안은 커피 마실 일은 없을지도…….
하지만.
막상 수많은 원두들을 생산해 낸 것을 보자 나름 보람차다.
결과에 상관없이 노동은 신성한 것이니까.
드레이크는 잘 볶아진 원두들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보상이 꽤 괜찮겠지?”
그의 말을 나를 의아하게 만든다.
“뭐야? 너 이 퀘스트 보상 몰라?”
“응, 모른다. 나는 이런 잡 퀘스트들은 하나도 깨지 않고 다 그냥 넘어가 버려서…….”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는 드레이크.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굉장할 거야.”
나는 픽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드레이크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무도 안 하는 일을 도맡아서 했는데. 당연히 썩 괜찮은 보상이…….”
하지만.
드레이크는 말을 끝까지 이을 수 없었다.
[어따, 오늘 수고했다.]
농장주 레글리는 드레이크를 향해 보상이 담긴 자루를 내밀었다.
그 자루 속을 보는 순간, 드레이크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진다.
“……이,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