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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200화 (200/1,000)

201화 일일 퀘스트 노가다 (1)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나는 게임에 접속했다.

이번에는 ‘고인물’로서의 접속이다.

리그가 끝나고 정모도 끝났다.

고인물로 게임에 들어오는 것이 상당히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여어.”

드레이크 캣.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이 파트너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게 꽤 오래간만이라 그렇다.

드레이크와 나는 만나자마자 악수를 나눴다.

그는 여전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붉은 후드와 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망토 속의 장비들은 꽤 변한 티가 났다.

나는 그 장비들을 한번 슬쩍 훝는 것만으로도 그가 그간 꽤나 하드한 플레이를 해 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크라켄 레이드 이후로 처음이군. 잘 지냈나?”

드레이크의 안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지. 너는?”

내가 안부를 되묻자, 드레이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말한 대로 40레벨을 넘겨 놨다.”

놀랍게도 그의 레벨은 42.

마의 40구간을 꽤 넘어선 상태였다.

레벨은 사실상 게임 플레이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스토리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레벨의 의미가 점점 중요해지기에 드레이크의 업적은 상당히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서대륙 정글을 돌아다니고, 동대륙의 사막도 가 보고, 남대륙의 유적지들도 돌아보고, 북대륙의 설산도 다시 돌아다녔지.”

드레이크는 레벨이 오른 만큼 관록도 많이 붙었다.

앞으로의 레이드에 함께해도 되겠다는 믿음이 약간 더 두터워졌다.

더군다나.

“어진. 선물이 있다.”

“……?”

드레이크는 나에게 깜짝 선물을 안겨 주었다.

우리는 초보자 마을의 창고로 향했다.

창고지기 NPC 왈도에게 말을 걸자, 그는 쾌활한 인사와 함께 열쇠를 건네준다.

[아, 왔는가 자네! 잘 관리되고 있으이! 힘세고 강한 물건!]

드레이크는 왈도에게 열쇠를 받아 넓은 공터 제일 외곽으로 걸어갔다.

텅텅-

드레이크는 공터 위에 있는 가장 커다란 창고로 가서 철문을 몇 번 두드린다.

“이게 내가 새로 인수한 창고지.”

“오오, 특대형이네. 돈 좀 썼겠는데?”

“이 안에 뭐가 있는지 짐작이 되나?”

“……?”

그의 자신만만한 말에 나는 턱을 짚었다.

뭘까?

뭔데 그 근엄한 드레이크가 이렇게 칭찬을 바라는 아이와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나는 창고를 한번 쓱 둘러보았다.

수백 평은 족히 나갈 것 같은 대형 창고.

임대비도 꽤나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것을 굳이 빌렸다는 것은…….

“자. 공개!”

드레이크는 답지 않게 쾌활한 어조로 자물쇠를 열었다.

그러자, 내 눈에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세상에!”

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내 눈에 보인 것은 아이템이었다.

-<슬라임 아대> 방어구 / D

슬라임의 촉촉한 기운이 깃든 아대다.

속도와 방어력을 약간 올려 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방어력 +5

-민첩 +5

-특성 ‘재생하는피부’ 사용 가능.

녹색에 말랑말랑한 손목 보호대.

손목에 착용하면 몸이 아주 약간은 빨라지는 아이템.

그리고 그 옆에는 또 다른 아이템이 있다.

-<고블린의 손가락> 반지 / C

고블린 중에서도 유난히 날쌘 개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녀석들은 대부분 손가락이 긴 편인데 중부대륙의 사냥꾼들은 그 손가락을 잘라 자기 손가락에 걸고 있으면 고블린의 민첩성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민첩 +20

-특성 ‘순간고속’ 사용 가능.

고블린의 손가락뼈로 만든 반지.

손가락에 끼면 역시나 몸이 조금 빨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옆에는 또 또 다른 아이템이 놓여있다.

-<총총도마뱀의 혓바닥> 목걸이 / C

물 위를 총총 뛰어다니는 도마뱀의 긴 혓바닥을 잘라 내서 말린 것이다.

남부 밀림의 원시부족들은 이 혓바닥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다닌다고 한다.

-민첩 +15

-이동속도 +3%

-특성 ‘눈치빠르기’ 사용 가능.

이번 아이템은 목걸이다.

역시나 몸을 약간이나마 빠르게 해 주는 옵션이 붙어 있다.

“……대단한데?”

나는 눈앞에 있는 아이템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단순히 이 세 아이템만 보고 감탄한 것이 아니다.

드레이크가 내게 보여 준 이 거대한 창고 안이 모두 이런 아이템으로 가득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날쌘두더지의 발톱손(C), 마라톤두꺼비의 머리띠(D), 폭주호저의 가시갑옷(C), 빠른삵의 털가죽 장갑(C), 스피드 킹 바분의 여덟다리 신발(C+), 민첩한 코볼트의 팔찌(D)…….

어마어마한 수의 D~C급 아이템들.

드물지만 C+급 아이템들도 군데군데 섞여 있는 것이 보인다.

공통점은 모두 민첩이나 이동속도 증가 옵션이 붙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을 언제 다 이렇게 모았대?”

나는 민첩 아이템의 산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평소에도 늘 드레이크에게 신신당부를 하긴 했었다.

아무리 잡스러운 아이템이라도 민첩 옵션이 붙어 있다면 무조건 모아 두라고.

게임이 후반부로 갈수록 민첩 옵션만큼 중요한 것이 또 없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드레이크는 그 말을 명심했던 모양이다.

그는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맵 각지를 돌 때마다 민첩 옵션이 붙은 아이템들은 꼭 수거했지. 거지로 보였는지 가끔은 사람들이 잡템들을 그냥 주기도 하더군.”

그렇다.

필드를 돌다 보면 가끔 D~C등급의 아이템들이 버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부분 동 등급 아이템 중에서도 옵션이 심각하게 구려 별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그런 것들이라고 해도 민첩 옵션이 붙어 있기만 하면 싹 주워 모은 듯싶었다.

“그런데 어진. 이렇게 많은 아이템들을 어디다 쓰려고 모으는 건가?”

나는 드레이크의 질문에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싶다.

“그래. 이렇게까지 해 줬는데, 알려 줘도 될 것 같네.”

나는 드레이크에게 작게 귀뜸했다.

“…나중에…게임…후반부가…되면…….”

내가 세우고 있는 계획.

그것들의 극히 일부가 처음으로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전체 계획이 아니라 극히 일부만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드레이크는 믿기 힘들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약한 몬스터들이!?”

“응. 그때 아마 꽤나 도움이 될 거다.”

나는 증거를 대기 위해 내 인벤토리 안을 보여 주었다.

-<와두두 여왕의 알> ?

벌레도 식물도 아닌 존재의 알.

안에는 꿈 많은 소녀 ‘쥬딜로페’가 잠들어 있다.

-5% 확률로 시끄러움

-부화조건: ???

투명한 캡슐처럼 생긴 알 안에 옥색 머리카락, 붉은 눈의 소녀가 잠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어린 여왕 ‘쥬딜로페’> -등급: F / 특성: 간택, 갹출

-서식지: ?

-크기: 0.1m.

-멸종위기종의 마지막 여왕. 아직은 작고 겁이 많다.

쥬딜로페를 본 드레이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F급 몬스터라니! 이렇게 약한 몬스터가 존재했나? D급이 가장 낮은 등급인 줄 알았는데…….”

“신기하지?”

내가 피식 웃자, 드레이크는 손을 뻗어 쥬딜로페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려 했다.

하지만.

[웅앵!]

쥬딜로페는 어느새 눈을 뜨고는 손을 X자로 만들어 드레이크의 손길을 단호히 거부했다.

참고로 그녀는 나 외에 모든 존재의 접근을 경계하고 있었다.

“으음, 나는 안 되는 모양이군.”

드레이크는 쩝 소리를 내며 손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새로 얻은 펫인가?”

“아니, 펫 아냐. 내가 펫이야.”

“……? 그러니까. 네가 이 몬스터를 펫으로 길들인 거냐고.”

“아니라고. 내가 이 몬스터에게 펫으로 길들여졌다고.”

“…?? 아니, 이거 번역이 잘못 되고 있는 건가? 네 펫이라는 거잖아, 이 소녀.”

“아냐. 번역 잘 되고 있는 것 맞아. 펫은 나고, 얘는 여왕님이야.”

“……???”

드레이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드레이크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한국 프로리그에 참가하기 위해, 그리고 우승하기 위해 버프가 필요했고 그 때문에 ‘와두두 둥지’라는 던전을 공략했었다고.

그리고 그 와중에 여왕의 ‘간택’ 특성에 의해 집사 1호가 되었다는 것까지도.

“…그래서. 그 버섯은 그때 생긴 거냐?”

드레이크는 내 몸의 특정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별로 얘기하기 싫은 화제였기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쥬딜로페를 잠시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자 봐. 꼬맹이 여왕님. 곧 이 모든 것들이 다 네 것이 될 거야.”

나는 쥬딜로페에게 눈앞에 있는 아이템의 산을 보여 주었다.

드레이크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나의 계획을 들어서 알기 때문이다.

한편.

[…….]

쥬딜로페는 붉은 눈을 반짝이며 눈앞에 있는 아이템의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왕의 씨앗이기 때문일까?

이 작은 소녀는 본능적으로 눈앞에 있는 것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를 인식한 듯했다.

“너는 좋겠다. 유능한 집사 구해서.”

나는 쥬딜로페가 들어 있는 알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쥬딜로페는 인벤토리에서 나오는 것을 싫어했지만 다시 들어가는 것도 싫은 듯 볼멘소리로 칭얼거린다.

하지만 막상 인벤토리 안으로 들어온 쥬딜로페는 그 큰 눈을 감고 색색 잠들었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어린아이는 잠이 참 많다.

*       *       *

나는 창고 안에 들어 있는 민첩 아이템들을 쭉 돌아보았다.

“정말 이걸 다 나한테 넘겨도 되겠어?”

내가 묻자, 드레이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너 아니면 쓸 사람도 없다.”

“고물상 가서 무게로만 달아 팔아도 돈 꽤 될 텐데.”

“티끌은 모아 봐야 티끌이지.”

드레이크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목숨빚을 갚기 위해 너를 따라다녔지만, 이번 북대륙 크라켄 레이드 이후로 깨달았다.”

“……뭘?”

“너와 함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 꽤 재밌다는 걸 말야.”

나는 그냥 한번 피식 웃어 주었을 뿐이다.

그러자, 드레이크는 한 마디를 더 했다.

“하지만 단순히 나만 재밌다고 이루어지는 게 파티는 아니지. 네가 나에게 늘 신선한 자극을 주는 것처럼, 나 역시도 뭔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도 오늘 드레이크가 그간 이루어 놓은 성과를 보며 많은 자극을 받았으니까.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프렌즈 윗 베네핏(friends with benefits)인가?”

“…그보다는 상부상조(相扶相助),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겠지.”

나와 드레이크는 서로의 문화권에 속한 문구를 교환했다.

유대감이 살짝 깊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텅-

나는 아이템들의 수와 옵션들을 모두 확인한 뒤 창고의 문을 닫았다.

뜻하지 않게 굉장한 선물을 받아버린 것 같아 기분이 약간 얼떨떨했다.

“어진. 이제는 뭘 할 건가?”

드레이크는 나를 돌아보며 기대감에 찬 눈빛을 보냈다.

레벨도 많이 올려 놨고 장비도 좋아졌다.

이제는 더 상위 등급으로 올라갈 때다.

더 강력하고 교활한 몬스터! 더 웅장하고 하드코어한 던전! 더 기상천외한 모험!

드레이크는 크라켄 레이드 때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 가는 기대를 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기대를 배신할 수밖에 없다.

“아니, 일일퀘 노가다 뛸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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