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98화 (198/1,000)
  • 199화 또 팬미팅 (2)

    다음 날 오후 여섯시 오 분 전.

    나는 일찌감치 정모 장소에 나와 있었다.

    가산디지털단지역 5번 출구.

    길거리에 널려 있는 포장마차들 사이로 회사원들이 바쁘게 오간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지하철 역 입구에서 잡지를 파는 아저씨에게 5천원을 주고 잡지 한 권을 샀다.

    “오오, 내 얼굴 나왔네!”

    나는 잡지 귀퉁이에 작게 실린 내 얼굴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한국 게임계의 초신성! 끓어오르는 고인물의 카리스마!>

    프로리그 습격사건에서 앙신 조디악을 격퇴한 일로 나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원래 유명했던 인지도가 더더욱 빵빵해진 것이다.

    심지어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조차도 내 이름이나 얼굴을 알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팬미팅 자리에 변장을 하고 나왔다.

    긴 생머리 가발과 마스크. 깔창을 신어 키도 꽤 크게 위장했다.

    ‘후후후. 그냥 평범한 팬인 척 하고 모임에 끼었다가 깜짝 놀래켜 줘야지.’

    수많은 여자들이 나를 보고 꺅- 외치는 것을 상상하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 이러다가 팬이랑 엮이는 거 아냐? 잘 나갈 때일수록 스캔들 조심하랬는데.’

    오늘 오는 팬들은 100% 다 여자들이니 좋으면서도 걱정이 된다.

    여대생 11명, 커리어 우먼 13명, 여고생 6명.

    이 중에 미성년자는 일단 제외하고, 나머지는 24명인가?

    ‘아니, 나는 뭐 벌써 이런 생각을…잊어버리자. 착한 생각 착한생각.’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툭-

    내 어깨와 부딪치는 사람이 있었다.

    “……?”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는데 굳이 내 어깨를 치고 갈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리는 순간 상황을 바로 납득했다.

    “어이고. 죄송합니다.”

    덩치가 일반인의 두 배는 나갈 것 같은 턱수염 근육질 아저씨가 나를 보며 중후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아, 네. 아니에요.”

    내가 바로 사과를 받아 주자, 아저씨는 한번 꾸벅 목례를 하고는 나를 스쳐 지나갔다.

    “휴, 되게 무섭게 생겼네.”

    얼굴만 보면 조직 생활을 하시던 분인 줄 알겠다.

    ……한데?

    그 털보 아저씨는 이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가산디지털단지 역 5번 출구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툭-

    누군가 또 내 어깨를 치고 갔다.

    “아이쿠. 미안해요.”

    부드럽게 웃는 얼굴.

    키가 1.9미터가 넘고 전신이 터질 것 같은 근육으로 뒤덮인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역시 나를 지나치는가 싶더니 이내 가산디지털단지역 5번 출구 앞에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설마 아닐 거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순간.

    툭-

    내 어깨를 또다시 치고 가는 사람.

    “앗, 죄송해요.”

    태권도 도복을 입은 다부진 체격의 빡빡머리 남학생이었다.

    방금 도장에서 격한 운동을 끝내고 온 건지 도복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 남학생 역시도 나를 스쳐 지나가 가산디지털단지 역 5번 출구 아래…….

    ‘…제발.’

    나는 슬슬 오싹함을 느끼기 시작되었다.

    이거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분위기…….

    그때.

    툭-

    또다시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이가 있다.

    “Sorry Boy♂.”

    키가 2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근육질 흑인이 나를 내려다보며 눈을 찡긋했다.

    ‘…….’

    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다만 두 눈을 꽉 감고 신에게 기도할 뿐이다.

    하지만.

    내 기도는 무참하게 짓밟히고 유린당했다.

    맨 처음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던 털보 아저씨가 근육 가득한 팔을 들며 걸걸한 목소리로 외쳤기 때문이다.

    “어이! 내가 ‘딸7I겅듀™’이외다! 우하하하! 인천 앞바다에서 배 타다 왔소!”

    그러자, 큰 키에 근육질의 몸을 가진 다른 남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아! 제가 ‘마카롱마싯땅♥’이에요! 하하하! 요 앞 헬스장에서 트레이너 겸 보디빌더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다.

    “허허허! 저는 ‘별님두개’입니다. 군에서 일하고 있고요. 계급은 소장입니다. 현재 특전사 부대에서 복무중이지요.”

    “안녕하세요! 저는 ‘T없이맑은예슬’이라는 닉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안팡 자동차 공업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특기는 태권도에요! 이래 봬도 미들급 1위입니닷!”

    “아이고, 이거 저는 꽤 어린 축에 드네요, 어허허허. ‘24살희은이♥’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42살 곽희은입니다. 작은 철강회사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Hello. 마이 네임 이즈 존 예(John yeah). 닉네임 이즈 ‘존★예★보★스’ 아임 프롬 필라델피아. 격투기 선수애오. 고인물 팬이애오.”

    평균 신장 1m 85cm.

    30명 전원 남자.

    ‘…….’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눈앞의 사내 그룹을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주위를 둘러보던 ‘딸7I겅듀™’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어이! 지금 한 명이 모자라는데, 그쪽이 혹시 ‘레고밟았어’ 이신가?”

    뜨끔!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네…뭐…….”

    부정을 하지 않는 순간, 나는 바로 그의 거칠고 두툼한 손에 잡히고 말았다.

    “허허허허! 뭐 그리 부끄러움이 많아! 자! 가자고!”

    ……가자니? 어디를?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모임장인 ‘24살희은이♥’, 아니 42살 곽희은 씨가 껄껄 웃으며 나에게 어깨동무를 걸어온다.

    “당연히 식당이죠! 자! 다들 배부터 좀 채우고 놉시다!”

    바로 앞에는 고기 삶는 냄새가 풍겨 나오는 허름한 함바집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부터 탐색전 없이 바로 본게임 들어가는 아조씨들이었다.

    *       *       *

    “이모니임~ 여기 선지국밥 15개, 돼지국밥 15개. 그리고 수육 10접시랑…소주 20병 주십쇼!”

    “허허, T없이맑은예슬이는 참예슬만 먹으니까 참예슬로 20병 주시구려!”

    “껄껄, 이 사람 쎈스가 아주 샘숭 쎈스 노트북이야.”

    정모 시작부터 국밥집에 들어온 아조씨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껄껄 웃으며 술과 국밥을 퍼 먹기 시작했다.

    분명 고인물 팬미팅인데 무슨 산악회나 조기축구회 모임이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 보인다.

    딸7I겅듀™는 국밥 한 그릇을 마치 종이컵에 든 식혜 마시듯 훌훌 비워 버렸다.

    그리고는 눈앞에 있는 소주병을 보며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술이 참 싫소!”

    바로 앞자리에는 내가 앉아 있다.

    나는 주량이 약한 편이기에 딸7I겅듀™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에 조금 안심했다.

    ……하지만.

    “이 싫은 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더욱 싫은 일이지. 술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야 해!”

    딸7I겅듀™는 격렬한 어조로 소주병에 삿대질을 한다.

    그러더니.

    “그러니 내가 다 마셔서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겠어!”

    엄청난 기세로 소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와하하하하!”

    그러자 그 넉살에 다른 아조시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어느덧. 아저씨들은 이 국밥집에서만 소주 90병을 비웠다.

    “…….”

    나는 텅텅 비어 가는 술병들을 보며 입을 반쯤 벌렸다.

    어쩌면 고인물 팬미팅의 최대 수혜자는 국밥집 이모일 것 같은 이 느낌적인 느낌…….

    슬슬 시간이 지나자 국밥집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에어컨의 힘이 약해져서 그런 게 아니다.

    아저씨들의 체온이 올라가서 그렇다.

    이내, 처음 한 명이 겉옷을 벗자 다른 사람들도 줄줄이 옷을 벗는다.

    때문에 런닝셔츠 바람으로 있게 된 아저씨들도 국밥집 곳곳에 많이 보였다.

    땀으로 인한 뿌연 수증기가 함바집의 천장과 비닐문에 맺혀 맑은 이슬방울이 된다.

    어차피 오늘 이 자리는 고인물 팬미팅이 전세를 냈기 때문에 보는 눈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한편.

    “…….”

    나는 말없이 국밥만 먹고 있었다.

    ‘국밥은 맛있네.’

    부글부글 끓는 국물 위에 올라간 선지가 일품이다.

    나는 술은 안 먹고 조용히 계속 공기밥만 추가해 먹었다.

    바로 그때.

    “자자, 고인물 님의 팬 여러분. 이곳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24살희은이♥’, 아니 42세 곽희은 씨가 중후한 목소리로 시선을 끌었다.

    “자, 명색이 우리가 게이머고 다 고인물 님의 팬들인데 이렇게 술만 먹어서야 되겠습니까?”

    나름 팬미팅스러운 무언가를 할 모양이다.

    하지만 분위기가 마동왕 팬미팅 때와는 전혀, 완전, 쌩판, 180도 딴판인 만큼. 내가 기대하던 무언가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말거나, 모임장 곽희은 씨는 불콰해진 얼굴로 껄껄 웃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사전에 공지한 계획표대로, 고인물 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테스트하는 퀴즈 대회를 열도록 하겠습니다!”

    음, 멘트가 좀 그렇긴 하지만…계획표는 그런대로 정상이다.

    한편, 절로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어쩌다 보니 정체를 밝힐 타이밍을 놓쳐서 아직도 가발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처지다.

    (밥 먹을 때만 마스크를 살짝살짝 내렸다)

    그 때문에 나는 나에 대한 퀴즈를 내 스스로 풀게 생긴 것이다!

    ‘나 참. 이거 너무 밸런스 붕괴잖아.’

    나에 관련된 퀴즈를 내가 모를 리가 없는 일이다.

    ‘너무 맞추면 팬들에게 미안하니까, 가만히 있어야지.’

    하지만.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게끔, 모임장 곽희은 씨는 자꾸 판을 깔아 놓는다.

    “참고로 고인물 님의 팬이라면 누구나 맞추실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문제들 위주로 준비해 왔으니 한 문제도 맞추지 못하신 분은…벌칙입니다. 아시죠?”

    벌칙?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곽희은 씨는 보란 듯 커다란 세숫대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소주와 맥주, 막걸리를 콸콸 들이붓기 시작했다.

    ‘으아, 저걸 다 먹는 거야? 미쳤어!’

    나는 인상을 절로 찌푸렸다.

    인간이 저 많은 술을 어찌 혼자 다 먹나?

    하지만, 지켜보던 아저씨들은 영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뭐야? 저 술을 혼자 다 먹는 거야? 벌칙이 아니라 특혜인데?”

    “아저씨! 그냥 그거 제가 다 마시면 안 돼요?”

    “어이쿠. 미성년자는 안 된단다. 하하하하!”

    “그건 그렇고. 꼴랑 그걸로 벌칙이 되나?”

    “거 깍두기 국물 좀 부읍시다, 마늘쫑도 좀 넣고. 해장 되게 들깨가루랑 청양고추도 듬뿍듬뿍 넣고! 가만, 내가 보드카를 좀 챙겨 왔는데 이것도 넣을까?”

    “좋지! 다 때려 넣으라고! 캬! 이제야 좀 벌주 같네.”

    팬미팅 분위기는 계속해서 내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폭주한다.

    ‘마동왕 팬미팅 때는 파티룸에서 샴페인 파티를 했었는데…….’

    지금 나는 허름하고 무더운 함바집 안에서 이 괴랄한 세숫대야를 앞두고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유다희의 얼굴이 그리워지는 순간은 회귀하고 나서 처음이다.

    갑자기 현자타임이 오려고 했지만, 그래도 나는 정신을 다잡았다.

    ‘그래.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저 술을 마실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몇 문제 정도는 맞혀 줘야겠다.’

    나에 관련된 퀴즈를 내가 푸는 것은 반칙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누군가는 꼴찌를 해야 하고 저 술을 마셔야 할 테니까.

    나는 눈을 부릅뜨고 퀴즈를 기다렸다.

    뭐가 나올까?

    내가 평소에 착용하는 아이템 이름? 즐겨 잡는 몹? 방송 횟수? 시간? 데뷔일?

    나는 무난하게 나올 만한 문제들을 생각하며 손을 들 준비를 했다.

    하지만.

    모임장의 입에서 나온 퀴즈는 내 상식 밖의 것이었다.

    “자아! 그럼 우리 고인물 님의 목에 난 점의 개수는 총 몇 개일까요?”

    ……?

    나는 두 번의 충격을 받았다.

    첫 번째 충격은 문제의 아스트랄함이다.

    뭐냐 이 말도 안 되는 문제는? 그딴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본인인 나조차도 모르는 것이 당연한, 그런 미친 문제였다.

    ……그리고 두 번째 충격은.

    “저요!”

    “어? 나 아는 거다!”

    “뭐야, 첫 번째 문제는 그냥 주는 문제인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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