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94화 (194/1,000)
  • 195화 앙신(殃神) (4)

    누가 그랬던가?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고.

    평생에 걸쳐 했던 경험이 결국 한 자락의 꿈이라는 소리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우리가 꾸는 꿈은 깨어나기 30초 전에 꾸는 것이라고.

    그것이 비록 아무리 길고 긴 꿈이었더라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사내를 보면 그 말은 꼭 맞는 말 같지도 않다.

    “끄아아아아아!”

    검은 머리에 창백한 피부를 가진 사내.

    그는 지금 침대에 누운 채 몇 시간 동안을 바둥거리고 있었다.

    퍼억-

    이내, 그는 두꺼운 이불을 걷어차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조디악 번디베일.

    그는 축축해진 침대를 내려다보며 숨을 헐떡거렸다.

    등에 아주 약간의 식은땀이 맺혔다.

    “젠장 또 그때 일이…지겹도록 울궈 먹는구만.”

    조디악은 자리에서 일어나 보드카 병 주둥이를 입에 물었다.

    “푸하!”

    그는 퀭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빡빡 깎은 머리 곳곳에는 흉터 자국들이 가득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흉터와 문신들.

    언뜻 보기에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온 것 같지가 않다.

    “이건 절대로 꿈이 아니지. 암, 꿈일 수가 없지.”

    조디악은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볼을 꼬집어 봐서 아프지 않으면 꿈이라는데, 무통증 증후군을 앓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때가 많다.

    조디악은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추어 보았다.

    “휴우. 그래도 잘 보니 섹시한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거친 남자 같잖아.”

    조디악은 이내 미소를 되찾았다.

    물론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억지로 위로 잡아당긴 것에 불과하지만.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침대 옆을 바라보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 몸 섹시?”

    그러자.

    조디악의 옆, 침대 구석에 누워있던 한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테이프로 전신이 꽁꽁 묶였다.

    입과 눈은 테이프로 단단하게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버둥거리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는 그녀의 집 안방이었고 이런 꼴이 되기 전에 남편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침대를 축축하게 적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흠흠흠-♪”

    조디악은 거울을 보며 면도를 시작했다.

    이내, 그는 깔끔해진 턱을 거울에 비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찌이익-

    그리고 면도칼을 들어 여자의 입술에 붙은 테이프에 대고 살짝 그었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으으으…….”

    여자는 신음 소리를 냈다.

    조디악은 낄낄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미안. 졸려서 한숨 잔다는 게 1시간이나 자 버렸네.”

    “으…으으으…….”

    “생각 좀 많이 해 봤어?”

    “…내 남편…남편은……?”

    그녀의 질문에 조디악은 고개를 흘끗 돌렸다.

    침대 밑에는 경동맥이 잘려 즉사한 남자의 시체가 뒹굴고 있다.

    조디악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살아 있어. 응급조치 후 가둬놨으니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면 살 수 있을 거야.”

    “지, 진짜지? 정말이지?”

    “그럼~ 천하의 ‘도깨비’를 상대로 거짓말을 했으려고? 아무리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조디악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자,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아는 건 다 말할게. 어차피 나는 말단이었고 그 바닥도 완전히 떠났지만. 그러니 제발 남편만은…….”

    조디악은 웃는 얼굴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거렸고 때로는 웃었다.

    그리고 때로는 지독한 무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이내.

    조디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한국으로 가라 이거지?”

    그는 짜증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동양 촌구석이 은근히 영향력 있네.”

    불평과 함께, 조디악은 면도날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어 여자의 목을 깔끔하게 그어 버렸다.

    사뿍-

    붉은 피가 이미 붉은 시트에 스며든다.

    조디악은 주방으로 가 손에 장갑을 꼈다.

    그리고 소화기를 들어 안방 곳곳에 분사했다.

    욕실에는 뜨거운 물을 콸콸 틀어 놓았고 집 안 히터는 최고 온도로 설정했다.

    창문과 문은 모두 닫아놓았고 빈틈없이 테이프로 밀봉했다.

    “자, 그럼. 아듀.”

    조디악은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문을 닫고 고리를 잠갔다.

    마지막으로 우편함에 있는 우편물을 모두 수거하고 손에 낀 장갑을 소각로에 던져 넣었다.

    그것으로 끝이다.

    캘리포니아 주 오렌지카운티의 어바인 시 108번지, 작은 주택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       *

    -Tingling!

    [Deus ex machina welcomes your visit!]

    조디악 번디베일은 게임에 접속했다.

    그의 캡슐은 GPS 위치를 특정할 수 없게끔 특수한 처리가 되어 있었는데 그 때문에 감도도 낮고 부피도 컸다.

    신형 캡슐에 비해 여러모로 더 거칠고 투박했다.

    하지만 어차피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조디악이었기에, 감도가 낮은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감도가 없어도 그의 몰입력과 피지컬은 천재적인 것이었으니까.

    이내, 그는 필드를 밟았다.

    맵은 ‘육중한 밀림’

    지금부터 그가 행동을 개시할 곳이다.

    조디악은 빠르게 움직였다.

    고통을 분담해 주는 목걸이, 클로킹을 가능하게 하는 로브, 고속재생을 돕는 갑옷, 5번 중 1번은 치명타가 들어가는 클로, 몬스터를 부르는 피리, 7서클의 흑마도서….

    그중에서도 조디악이 믿고 있는 것은 바로 ‘하멜른의 피리’였다.

    악의 고성의 다른 루트, 그곳의 중간 보스 서큐버스 퀸을 잡고 얻은 아이템이다.

    “기왕이면 ‘할로윈 구름과자’를 갖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 피리 역시도 그에 뒤지지 않는 히든 피스다.

    조디악은 이내 피리를 불며 달리기 시작했다.

    […우어?]

    [……크르륵?]

    […쉬익?]

    거대한 나무 위, 수풀 곳곳에서 느낌표가 뜬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조디악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쥐와 아이들처럼, 조디악은 계속해서 몬스터들을 몰고 다녔다.

    이윽고.

    조디악이 찾던 몬스터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촤아아악!

    절벽 밑 폭포지대에 살며 때때로 폭포 속에서 나와 먹이활동을 하는 필드보스.

    [크-오오오오!]

    트윈헤드 오우거가 폭포를 커튼처럼 걷으며 튀어나왔다!

    “그래. 보아하니 너도 꽤 굶었구나.”

    조디악은 낄낄 웃으며 피리에 입을 댔다.

    어그로가 조금이라도 분산되면 곤란하다.

    트윈헤드 오우거는 피리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는 즉시 지금까지 모아 놓은 다른 몬스터들을 때려죽이고 잡아먹을 것이다.

    조디악은 피리소리가 끊기지 않게, 최대한 가늘고 길게 불었다.

    그리고 가능한 숨을 헐떡이지 않게끔 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날숨을 계속 불어 가며 달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크아악!]

    [쉬이익!]

    [갸아악!]

    숨이 차서 피리 소리가 끊기는 즉시 지금껏 모아 놓은 몬스터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 개체수가 줄어든다.

    타탓!

    조디악은 계속해서 피리를 불며 달렸다.

    어느덧 그는 절벽 높은 곳에 있는 거대한 둥지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하피 부화장> -등급: B

    위험등급 B.

    이곳에 서식하는 하피는 비행종 중에서도 꽤 위험한 축에 드는 몬스터이다.

    타탁!

    조디악은 클로킹을 한 뒤 재빨리 하피의 알 하나를 훔쳐 인벤토리에 넣었다.

    저놈들의 습성은 ‘알’을 깨트린 적을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간다는 것이다.

    한 가지, 설정에 구멍이 있다면 알을 ‘건드린’ 적이 아니라 ‘깨트린’ 적이라는 것.

    조디악은 그것을 알기에 하피의 알을 조심스럽게 다뤘다.

    일단 깨트리지만 않으면 하피들은 그렇게까지 크게 분노하지는 않는다.

    조디악은 재빨리 하피들의 둥지에서 도망쳤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그 뒤를 따른다.

    *       *       *

    그리고 얼마 뒤.

    조디악은 예상대로 된 판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한국 프로리그의 시상식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한 명에게 입은 피해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피해.

    “그러니까, 옛날 게임의 프로리그처럼 외부 간섭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기본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 아닌가?

    능력만 있다면 혼자서 세상 전체와 싸우는 것도 가능한 것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다.

    “자, 그럼 그리운 면면들을 찾아볼까나?”

    조디악은 트윈헤드 오우거의 눈알 구멍 속에 들어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이 많다 보니 실력을 적당적당히 숨겨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조디악은 전장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여과 없이 볼 수 있었다.

    난다긴다하는 프로 선수들, 개중에는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도 몇몇 있다.

    조디악은 그런 사람들을 위주로 주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프로 선수를 비롯한 랭커들 중에 조디악이 찾는 얼굴은 없었다.

    “…음, 얼굴을 바꿨나? 하긴, 그게 당연하겠지만…그래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조디악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쳇, 이러면 기껏 여기까지 와서 테러한 이유가 없잖아.”

    그는 심통 난 어린아이처럼 볼을 부풀렸다.

    그래서일까?

    조디악은 원하는 얼굴을 찾지 못한 화를 한국 랭커들에게 풀었다.

    “푸스스스스. 한국 랭커들은 고작 이 정도야? 북미에 비하면 뉴비들이나 다름없는데?”

    그는 클로킹을 푼 채 말을 이었다.

    “그 ‘상징’이라는 마동왕은 어디 갔나? 다시 불러와야 하는 것 아닌가 몰라.”

    어차피 찾던 얼굴을 못 찾은 바에야 저번에 ‘그놈’에게 복수나 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크윽!”

    지상에 있는 랭커들은 전원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조디악이 이끌고 온 세력은 실로 강력하다.

    작정하고 온 테러범.

    그 모습은 실로 재앙신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올라앉아 있는 저 곳까지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임에 분명해 보였다.

    빡!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기기 전까지는.

    “……!?”

    뒤통수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

    통증은 느끼지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뒤에 누가 있다.

    쭈뼛-

    섬뜩한 감각이 목덜미를 타올랐다.

    ‘……어느새!?’

    조디악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 하나가 시야에 꽉 찬다.

    “프로들이 이런 빌런 하나한테 쩔쩔매서야 쓰나.”

    조금 다른 의미로 찾고 있던 얼굴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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