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86화 (186/1,000)
  • 187화 MVP 로얄스타 (1)

    ‘매드독 올킬이 10분 컷이었죠? 이번에는 8분 컷 예상합니다.’

    대회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나는 폭탄선언을 해 버렸다.

    기름에 떨어진 불꽃처럼.

    내가 터트린 폭탄은 뜨거운 호응으로 번져 간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무대 위 캡슐에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까지, 관객들의 환호성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나는 공약을 지켰다.

    …….

    지금부터 펼쳐질 이야기는 내가 공약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8분간의 기록이다.

    *       *       *

    로그인을 알리는 환한 빛무리와 함께.

    쿵!

    나는 필드로 떨어져 내렸다.

    오늘의 맵은 ‘육중한 밀림’

    거대한 크기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자라나 있는 원시림(原始林)이다.

    근육질의 거인/악귀타입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때때로 초대형 파충류들이 출현하는, 말 그대로 모든 것들이 크고 육중한 땅.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과거의 기억과 똑같은 맵이다.

    나비효과가 꽤나 일어났을 텐데도 기본적인 것들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느낌.

    나는 주변에 돋아난 거대한 활엽수들을 둘러보았다.

    후끈하고 습한 대기.

    나무 밑동의 기본 지름들이 15미터가 넘어 간다.

    높이는 어지간한 고층 빌딩 수준들.

    현실 세계에서 거대한 나무로 통하는 바오밥나무도 이곳에 오면 평범한 잡목 취급을 받을 것이다.

    필드에 출현하는 몬스터들은 주최측에서 이미 싹 정리해 둔 상태라서 주변은 고요했다.

    “맵 상성이 나랑은 별로 안 좋네.”

    땅 밑으로 촘촘히 뻗은 나무뿌리들 때문에 지진이나 와류의 데미지가 감소된다.

    대기에 습기가 많아서 화염 데미지 역시도 반감.

    여러모로 나에게 불리한 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가장 귀찮은 이유는…….’

    내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 순간.

    폴짝!

    건너편의 천지패황 진영에서 선수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박보연.

    아마추어 리그에서 천지패황 1군으로 바로 들어온 랭커이며 독특한 메타를 사용하는 플레이어였다.

    공식 경기는 처음인지라 한국 랭킹은 아직 없다.

    하지만 업계 전문가들은 그녀의 가능성을 꽤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번 리그가 끝나면 아마 랭킹 40위 안팎으로 배정될 것이라는 것이 정설.

    신인이라서 그런가 데이터가 많이 없었기에 그녀를 상대한 선수들은 어려움을 표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상태였다.

    ‘박보연, 02년생, 현실 직업은 연예기획사 연습생, 키는 162cm, 몸무게는 49kg, 혈액형 O형, 시력 양쪽 다 2.0, 가정환경 부1 모1 군대 간 오빠 1, 별자리는 물병자리, 좋아하는 음식은 작고 아기자기한 군것질거리, 추구하는 삶은 미니멀 라이프…….’

    훗날, 그녀는 뛰어난 게임 실력과 귀여운 외모로 게임계의 국민여동생이라고 불리게 된다.

    실제로 나중에 ‘니아’라는 걸그룹으로 데뷔하게 될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그녀에게 입덕한 팬들이 많아서 정보는 제법 알려진 편이었다.

    ‘뭐 그것도 얼마 뒤의 일이지.’

    지금 이 순간은 그저 덜 알려진 신인 프로게이머에 불과하다.

    한편.

    “……흡!”

    박보연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동그란 눈을 부릅떴다.

    “우리를 8분 안에 끝내겠다고 하셨죠?”

    “…….”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거예요. 그쪽은 저 하나로도 10분은 넘게 소모할 테니까요.”

    아무래도 그녀는 나를 쓰러트린다는 목적이 아니라 시간을 끌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출전한 듯싶다.

    내가 경기 전에 내뱉었던 ‘8분컷’ 공약을 실패로 만들겠다는 의지.

    박보연은 그 말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꼬물꼬물-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만, 그녀는 이내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평범한 선수들이 봤다면 놀랐겠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특성을 알고 있었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미니멀 라이프 링> 반지 / B

    애인을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주머니 속에 쏙 넣고 다니고 싶어 한 마법사가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랜 시간을 연구한 결과, 상대방을 아주 작게 만들면서도 본래의 신체능력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마법을 개발했다.

    물론 애인과는 헤어졌기에 그 마법을 실제로 써먹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회피율 +30%

    -이동속도 +10%

    -최대 HP +5%

    -특성 ‘주머니쏙’ 사용 가능 (특수)

    상대방을 아주 귀찮게 하는 반지이다.

    이 반지의 특성인 ‘주머니쏙’은 자기 자신을 아주 작게 만드는 능력.

    작아진 뒤에도 공격력이나 방어력 등은 그대로 유효하다.

    물론 몸이 작아지기에 보폭도 극도로 좁아져 이동 시간이 매우 많이 늘어나기는 하지만…….

    시간을 끌겠다는 일념으로 출전한 박보연에게는 더없이 적합한 아이템이다.

    ‘상대가 나만 아니었어도 말이지.’

    나는 저 풀숲 아래 숨어 있을 박보연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스슥-

    나는 땅에 양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콰쾅! 우르르릉!

    지진과 와류가 동시에 일어나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풀들이 찢어지며 그 밑의 붉으죽죽한 흙들이 속살을 드러냈다.

    하지만.

    우직- 우직- 우직- 뚜드득! 뿌직!

    곳곳에 굵은 나무뿌리들이 많아서 지진과 와류의 힘은 70% 정도밖에 발현되지 않는 것 같다.

    “아하핫! 그 정도로는 나를 못 잡지롱!”

    어디선가 박보연이 소리치는 것이 들려온다.

    회피율이 높기에 지진의 데미지도 비켜갔는가 보다.

    보아하니 어디서 나무뿌리라도 붙잡고 버티면서 숨어있는 모양이지만…….

    “아쉽지만 게임 끝.”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이내 내가 예상했던 대로 지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이잉-

    덥고 습한 기류가 와류에 의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커다란 난기류를 발생시켰다.

    그렇다.

    나는 땅을 뒤집기 위해 와류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무더운 대기와 습기가 회전하며 상승기류가 만들어진다.

    “어어어어어?”

    박보연이 당황해서 외치는 소리가 어디선가 작게 들렸다.

    그녀는 흙먼지들과 함께 허공으로 쭉쭉 딸려 올라간다.

    말 그대로 쭉쭉.

    모두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10분이 아니라 10초 컷이네.”

    나는 하늘 높이 올라가 보이지 않게 된 박보연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는 아마 먼지나 수증기와 결합해 계속 대기권을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 뒤 빗방울에 섞여 떨어지게 될 것이고.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어야겠지?’

    꽤나 지루한 여행이 되겠군 그래.

    *       *       *

    이윽고.

    몇 분 뒤, 주최측에서는 박보연을 ‘전투불가능’으로 판단해 장외 패 처리했다.

    (논의 시간은 경기 시간으로 카운팅되지 않는다)

    시합은 계속 속행되었다.

    나는 교대를 거부했고 상대측에서는 다음 선수가 출전했다.

    다음으로 나온 상대는 한국랭킹 41위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오태식이었다.

    그가 필드에 등장하자 전용진 캐스터를 비롯한 해설위원들이 다소 놀람을 표했다.

    [아, 오태식 선수가 나왔네요! 다소 뜻밖의 엔트리입니다!]

    [아시다시피, 오태식 선수가 잘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다른 로스터들에 비해 적응력은 조금 부족한 면모가 있거든요 사실.]

    [하지만 알려진 것이 많이 없는 선수이다 보니 오히려 함정카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우리 해설진도 저 선수가 그간 얼마나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잖아요?]

    그는 천지패황 팀 내 랭킹 9위로 다소 낮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출전한 것은 천지패황의 김철현 감독이 던진 신의 한 수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오태식이 사용하는 특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역시도 10년 뒤, 중국 리그로 이적해 맹활약하는 엘리트 코치 중 하나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읽는 살생부> 4클래스 마도서 / B

    모든 것이 거꾸로 적혀 있는 책.

    거울에 비추면 숨겨져 있는 어둡고 추악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한다.

    -마법 공격력 +900

    -어둠 속성 저항력 –30%

    -기록된 특성(2개):

    ‘네크로필드’, ‘속도역전세계’

    꽤나 골치 아픈 마도서가 등장했다.

    저 마도서에 기록된 특성은 두 가지.

    하나는 일정 범위 내의 망자들을 되살려 내는 ‘네크로필드’

    다른 하나는 일정 범위 내의 빠른 것을 느리게, 느린 것을 빠르게 만드는 ‘속도역전세계’

    둘 다 일정 범위 안의 필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성이다.

    ‘아, 어쩐지. 귀찮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니까.’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처음 경기 장소가 이 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불안했다.

    굵은 나무뿌리들 때문에 지진이나 와류 특성 반감, 습기 때문에 불걸음 특성 반감.

    게다가, 이 맵은 오태식의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는 맵이다.

    “하압!”

    오태식은 필드에 나오자마자 바로 특성을 발현했다.

    먼저 특정 범위 내의 망자들만을 되살려 내는 ‘네크로필드’ 특성.

    우드득- 우득- 우지직-

    땅거죽을 뚫고, 해골들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것들은 전부 경기 시작 전, 주최측에 의해 살해당한 몬스터들이었다!

    예전에 조디악이 사용했던 ‘무덤사역’ 특성에 비해 범위가 좁고 시체 선택의 기회도 딱히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매장된 시체가 많은 환경에서는 충분히 위협적이다.

    육중한 밀림에 서식하는 각종 거인, 악귀, 공룡들이 뼈다귀만 남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

    언데드들은 생전의 위험등급보다 2랭크씩 떨어진 상태로 고개를 든다.

    그 수는 그야말로 부지기수!

    그 상태에서, 오태식은 두 번째 특성인 ‘속도역전세계’를 발동했다.

    이 특성은 일정 범위 내의 ‘빠른 것’과 ‘느린 것’의 속도를 뒤바꾸는 특성.

    이내.

    필드가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언데드들은 특유의 느려터진 움직임을 버리고 날쌔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어어어어어어!

    수없이 많은 해골병들이 나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온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귀찮을 뿐이다.

    공교롭게도, 내게는 언데드에게 치명적인 카운터 특성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대망자 묘지기(특전: 언데드)’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

    그곳에서 수많은 해골병과 대망자를 잡고 얻은 특성이다.

    ‘언데드’ 특성은 언데드 종에게 데미지를 두 배로 가할 수 있는 심플한 능력.

    “꼭 그렇게, 다 살려 내야, 속이 후련했냐!”

    나는 오태식을 향해 빽 소리쳤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지진을 일으켰다.

    아무리 지형 때문에 데미지가 반감된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내 건틀릿은 깡 공격력이 3,600이다.

    거기에 언데드 특성을 발동한 탓에 공격력은 7,200으로 계산된다.

    후욱-

    내 피부가 일순간 검게 썩어 들었다.

    동시에, 땅이 요동치며 눈앞에 있던 해골병들이 우수수 골분으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콰콰콰쾅!

    해골병들이 모조리 박살났다.

    그리고 방어력이 약한 흑마법사는 내 공격을 얼마 버텨 내지 못했다.

    “으아아악!”

    오태식은 눈 깜짝할 사이에 토류에 쓸려가 죽어 버렸다.

    애초에 조디악에 비하면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흑마법 수준이다.

    초토화된 땅 위에는 이윽고 아무것도 남지 않게끔 되었다.

    사아아아아-

    나는 흙먼지와 뼛가루를 손바닥으로 휘휘 저으며 말했다.

    “다음.”

    길게 끌 생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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