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84화 (184/1,000)

185화 왕좌의 게임 (3)

어슴푸레한 비상구 불빛.

어두운 지하계단은 녹색으로 물들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중간 부분에 사람의 실루엣 하나가 보인다.

그것은 녹색 불빛과 어둠 사이에 몸을 반쯤 묻은 채 유령처럼 서 있었다.

“……?”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것은 이내 어둠에서 한 발 슬쩍 떨어져 나온다.

“…오랜만이네?”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여자.

어딘가 나른하게 느껴지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내 여자친구는 구면이긴 하되 전혀 의외인 인물이었다.

김정은.

매드독을 이끌고 있는 에이스이자 요즘 보기 드문 언령 계열 마법사이다.

사실 말이 언령 계열 마법이지 자잘한 눈속임으로 먹고사는 좀도둑 직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매드독은 오늘 나의 상대인 천지패황에게 패해 3위가 확정된 팀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저 여자가 날 보자고 할 이유가 있나?’

나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가면 때문에 티가 나지는 않았다.

“네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냐?”

말이 곱게 나오지는 않았다.

내가 묻자, 김정은은 나른한 눈매를 들어 내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여친이 남친 찾아오는 데 왜가 어딨어?”

“…….”

“미안. 농담이야. 따갑네, 시선.”

그녀는 오프숄더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을 슬슬 문지르며 짐짓 몸을 파르르 떤다.

나는 짤막하게 말했다.

“우리 감독님 놀리지 마라. 스캔들 걱정하신다.”

“그것도 미안. 생각보다 더 순진하시더라.”

“…할 말 없으면 돌아가고.”

내가 문 손잡이를 잡자, 김정은이 벽에서 등을 뗐다.

“황제 등극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왔어.”

“멀리서 보도록 해.”

“나를 가까이 둬야 할걸?”

김정은은 고혹적인 미소와 함께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작은 핸드폰이었다.

화면 안에서는 랭커들 간의 PK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매드독 VS 천지패황’

매드독이 천지패황을 올킬 직전까지 몰고 갔다가 다시 천지패황이 매드독을 역올킬 직전까지 몰고 갔던 플레이오프의 명경기.

참고로 천지패황을 올킬 직전까지 몰고 갔던 이는 바로 김정은이다.

“전략 선택을 잘못했지. 내가 후발 주자로 나갔어야 했어. ‘그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거야.”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김정은은 돈 꼴레오네처럼 말했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천지패황에 대한 비밀 정보들을 넘겨줄…”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놉.”

그러자, 말문이 막힌 김정은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호호호. 우리가 천지패황이랑 붙는 경기 영상을 봤을 것 아냐? 그런데도 그런 말이 나와?”

하지만, 나는 그녀의 대답에 너무도 쉽게 대답한다.

“안 봤는데?”

“…뭐?”

“안 봤다고. 너네 경기.”

너무도 당당한 내 대답에, 김정은은 입을 반쯤 벌렸다.

“...왜?”

“그래도 되니까.”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

김정은은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내 말이 진심인지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기에 감정을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비상계단의 어둠과 비상구 신호등의 녹색 어스름한 불빛이 나의 눈빛마저도 가려 주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자신감 넘치네. 과연 프로리그의 황제다워.”

김정은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녀에게 지나치게 차갑게 대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가 김정은에게 쌀쌀맞게 구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핵쟁이.’

그렇다.

그녀가 미래의 핵쟁이이기 때문이다.

에임핵, 매크로, 돈 복사 치트…….

아주 그냥 불법 프로그램이란 프로그램은 손대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여자 하나 때문에 게임이 한번 망할 뻔한 적도 있었다.

‘결국 회사와 유저들이 힘을 합쳐서 막아 내기는 했지만, 정말로 위험했지.’

조디악이 유저들의 목숨을 물리적으로 위협했다면, 김정은은 ‘보이지 않는 손’을 이용해서 위협했다.

가상화폐와 아이템 매물들의 흐름을 조종해 시장경제의 근간을 뒤흔든 것이다.

하루하루 떡락하는 골드 가격을 보며 나 같은 헤비 현질러는 땅을 치고 울 수밖에 없었다.

어제 산 1만 원 어치의 골드가 6천 원 어치가 되고, 3천 원 어치가 되고 끝내 1천 원 어치가 되는 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자면…….

자연스럽게 살의(殺意)가 끓어오르기 마련이다.

과거에 그런 일을 겪었으니 당연히 지금의 김정은도 아니꼽게 보일 수밖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 우승에 숟가락 얹어 보려는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천지패황이나 너네나, 둘 다 국K-1한테 한 번씩 패한 팀이잖아? 동영상 같은 것 딱히 안 봐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러자, 김정은은 짐짓 어지러운 척 비틀거렸다.

“으윽. 여자를 때리면 못 쓰는 거야.”

“……? 내가 언제 때렸어.”

“방금 때렸잖아. 팩트로.”

나는 피식 웃었다.

상대방이 말장난을 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여유롭거나 쫄리거나.

아무래도 김정은은 후자 쪽인 것 같다.

전 경기 동영상과 천지패황 선수들을 분석한 데이터를 들고 와서 무슨 딜을 하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순순히 그에 놀아나 줄 생각은 없었다.

삐걱-

내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려 하자.

“자, 잠깐! 진짜 잠깐만!”

김정은이 드디어 본래 마음을 드러냈다.

그녀는 상당히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사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 그걸 물어보려고 불렀어!”

나를 구워삶은 것에도, 협상을 거는 것에도 실패한 지금.

그녀는 차라리 솔직하게 부딪쳐 보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뭔데?”

내가 묻자, 김정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번 경기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너는 현 시대의 랭커들보다 압도적으로 성취가 빨라.”

“…….”

“그 비결이 궁금해.”

나는 잠시 고민했다.

김정은이 설마 나의 회귀에 대해서 뭔가를 알고 있는 걸까?

‘아냐. 그럴 리가 없지.’

제아무리 눈치 빠른 사기꾼이라고 해도 내가 겪은 초자연현상을 눈치챌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정말로 어떻게 남들보다 빨리 성과를 내는지가 궁금한, 그런 순수한 여자는 아닐 텐데…….

나는 일단 대답을 아끼기로 했다.

주도권은 현재 내가 쥐고 있다.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침묵은 훌륭한 무기가 된다.

“…….”

내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김정은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 너 ‘헬퍼(Hellper)’ 알아?”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첫 번째 생각은 ‘내가 가면을 쓰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의 떨리는 얼굴 근육과 크게 팽창한 동공을 숨길 수 있었으니까.

마침 장소도 어둡다.

비상구의 불빛을 등지고 선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입은 옷도 국K-1의 펑퍼짐한 유니폼.

동요로 인해 떨리는 몸을 숨기기에는 여러모로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생각은 ‘내가 정말 과거로 돌아왔다’라는 것.

‘어리긴 어리구나.’

과거의 김정은은 이렇게나 미숙한 빌런이었던가.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누가 긍정하겠어.’

나는 피식 웃었다.

‘헬퍼(Hellper)’

이 게임을 망하게 할 뻔한 최강 최악의 버그 중 하나이다.

자신의 공격 사거리, 상대방의 시야, 공격 사거리를 모두 가시화해 줄 뿐만 아니라 자동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감지해서 피하게 하며 상대방의 HP와 움직임을 계산해 자동으로 최고의 연계 특성 콤보를 넣어 처치해 주는 자동 전투 프로그램.

더 나아가, 상대방의 움직임을 학습해 미래를 예측해서 몇 초 후 상대방이 움직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을 자동으로 공격하게 하는 둥 말도 안 되는 플레이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 프로그램을 가동하면 알게 모르게 더 많은 리소스를 잡아먹게 되어 캡슐의 하드가 급속도로 닳아 버린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핵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게 상용화되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내가 알기로 이 핵이 김정은에 의해 본격적으로 유포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렇기에 나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라. 뭐야 그게.”

그러자, 김정은은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개발도 아직 덜 됐는데.”

발음이 뭉개진 작은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배경지식이 있는 나는 알아들었다.

아마 내가 못 알아들을 줄 알고 중얼거린 모양이지만… 이번 일로 더욱 확실해졌다.

‘헬퍼는 이 여자가 만든 거였구나.’

나는 중국 쪽에서 많이 쓰기에 그쪽에서 유입된 건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역수입이었던 것이다.

뭐 아무튼.

김정은은 그제야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나는 네 팬이기도 하고, 오늘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러 온 것이기도 하니까. 데이터는 넘겨줄게.”

“…….”

“가능한 쉽게 이겨 달라고 주는 거야. 우리가 천지패황에게 졌는데 네가 그놈들이랑 명경기를 펼친다면 우리가 없어 보이잖아.”

김정은의 말은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진짜 목적은 내가 핵쟁이인지 아닌지 떠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나는 헬퍼를 쓸 수 있는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쓰지 않았던 올드비다.

꼴랑 십만 원도 되지 않는 돈을 투자해 랭커 급 컨트롤과 피지컬을 가질 수 있다는 유혹.

하지만 나는 게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모든 유혹들을 거부했다.

그리고 수많은 핵쟁이들 사이에서 죽고 털려 가면서도 꿋꿋하게 자존심을 지켰었다.

그래서 눈앞의 여자가 더욱 짜증나는 것이다.

한편.

김정은은 눈웃음을 치며 내게 말했다.

“내가 자료 안 줬으면, 제아무리 너라고 해도 힘들었을 거야.”

김정은이 튼 영상이 재생되었다.

[콰쾅!]

[쿠르릉!]

[우지지직!]

핸드폰 화면 속에서는 연신 굉음이 터져 나온다.

“…….”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천지패황의 랭커들은 하나같이 강했다.

하지만 그뿐이다. 딱히 눈에 띄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한 명만 빼고.

“…류요원?”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에서 나에게 죽었던 랭커다.

한국 랭킹 4위. 거대한 참마도를 들고 다니던 근접 딜러.

하지만 김정은은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 어디서 아이템을 새로 맞췄나 봐. 스타일이 조금 바뀌었어.”

그녀의 말대로, 류요원은 딜러에서 탱커로 메타를 바꿨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하나에게 매드독의 정예 5명이 모조리 털렸다.

김정은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류요원은 총 전적 52전 37승이야. 그중 딜러전은 21승 4패. 경이롭지.”

“…….”

“거기에 이번에 탱커로 전직하면서 더욱 더 까다로워졌어. 모르긴 몰라도… 너희 팀 임요셉보다도 더 단단할걸?”

한국 랭킹 1위 임요셉에 버금갈 정도라?

그 점은 약간 흥미가 생긴다.

나는 김정은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공략법이란 게 뭔데?”

내가 묻자, 김정은은 어깨를 으쓱했다.

“없어.”

“…뭐?”

“없다고.”

김정은은 배시시 웃었다.

“우리도 몰라서 졌잖아.”

“…….”

“이놈 하나한테 5명의 마력과 내구도가 다 털렸어. 아무리 때려도 죽지를 않으니 방법이 있나?”

“…경기 끝났으니 이제 연구가 되었을 것 아냐?”

“우리도 아직 몰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라도 잘해 봐~”

김정은은 약 올리듯 웃으며 나를 올려다본다.

아마도 내가 당황하는 것을 보고 싶은 모양.

하지만.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1류가 못 되는 거야.”

그저 한심하다는 어조로 혀를 몇 번 차 줄 뿐.

빠직-

김정은의 살웃음이 순간 확 썩었다.

“…뭐야, 그럼 너는 공략법이 있다는 말이야?”

그녀는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하지만 내심 뜨끔하고 있는 게 빤히 보인다.

왜냐하면 내가 당황하는 모습을 기대했던 것과는 별개로 자기들도 공략법을 찾지 못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플레이 시간이 7만 5천 시간에 육박하는, 닳고 닳은 고인물이 아닌가.

이쯤 되면 고인물이 아니라 도로 위에 덮인 아스팔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난 또 뭐라고. 겨우 이 정도를 가지고 찡찡대서야 말이 안 되지.’

한편.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김정은은 계속해서 항의한다.

“류요원은 진짜 미친 탱커야! 막상 눈앞에 마주하면 저 돼지 같은 HP통을 언제 다 까나 암담해질 정도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툭 내뱉을 뿐이다.

“그건 너한테나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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