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왕좌의 게임 (2)
한편.
나는 현재 선수 대기실 락커룸 한편에 비치된 소파에 앉아있었다.
‘오늘 아침에 내가 똥을 싸고 나왔던가?’
아까부터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난다.
모닝똥을 싸고 나왔나 안 싸고 나왔나가 문득 기억이 나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흠, 편의점에서 요거트 하나 사 먹고 화장실 갔다 올까? 아니면 그냥 참았다가 경기 끝나고 갈까?’
참 고뇌가 된다.
괜히 검지손가락만 꾹꾹 누르게 되는 것이다.
(배변 활동에 큰 도움이 되는 동작임)
바로 그때.
“…사인 한 장만 해 주시믄 안 되겠심미꺼?”
큰 키의 사내 하나가 나를 향해 종이와 펜을 내민다.
액자까지 준비해 온 것을 보니 꽤나 본격적으로 준비해 온 것 같다.
“…….”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쌍칼’ 이준호.
후에 중국 리그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는 한국인 랭커이다.
‘이 사람은 분명…’
나는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이준호.
앞으로 한국 랭킹 1위 타이틀도 몇 번인가 거머쥐게 될 선수.
몇 년쯤 후에 ‘한국 리그에는 존경할 만한 스승이 없다’며 중국 리그로 이적해 버리는 인물이다.
보고 배울 스승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돌아다녔던 랭커 이준호.
그가 중국으로 갔을 때 한국 팬들은 슬퍼할지언정 분노하지는 않았다.
중국 리그가 훨씬 더 수준이 높았고 보고 배울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가 한창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을 때, 한국은 프로게이머들을 제대로 대우해 주지 못했었다.
돈줄을 쥐고 있는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꼰대였고 게임이라는 시장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게임 시장을 키워 주긴 싫지만 게임 시장에서 나오는 돈은 갖고 싶다’
이것이 그들의 태도였다.
각종 규제와 억압은 그대로였지만 성과를 내라고 다그치는 것에는 열심이다.
게임을 ‘폭력적인 것’, ‘학업을 방해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면서 본격적으로 자금을 투자해 밀어주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며 왜 저렇게 못 하냐고 칭얼거리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게임 강국 한국은 점점 옛말이 되어 갔다.
실력 있는 랭커들, 선수들, 관계자들은 점점 해외 인력시장으로 떠나갔고 시장은 점점 침체되어 가기만 했었다.
모두가 다 아는 것을 한국의 정치인, 교육인, 기업가들만 몰라 끙끙거리는 동안 모든 것이 쇠퇴일로를 걸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조금 다를 것이다.
한국 프로리그에는 ‘상징’이 필요하다.
결고 꺾이지 않을 상징이.
“…기꺼이.”
나는 흔쾌히 그의 스승, 본보기가 되기를 수락했다.
쓱- 쓰윽-
나는 종이에 사인을 해서 이준호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중국 리그로 이적하지 않고 한국 프로리그에 남아 국격을 드높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내 바람이 통한 것일까?
“…….”
내 사인을 받아든 이준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한국 프로리그의 자존심! 쌍칼 이준호 선수에게’
그는 잽싸게 그 사인을 액자에 끼워 넣었다.
내가 적어 준 멘트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러자.
“저, 마동왕 선수…저도 한 장만…….”
“저, 저도요!”
“사진 한 번만 같이 찍어 주실 수 있나요?”
이준호가 튼 물꼬로 물이 졸졸졸 흘러들어온다.
수많은 선수들이 내 앞으로 줄을 섰다.
“얼마든지.”
나는 이번에도 기꺼이 사인에 응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홍지노가 혀를 찼다.
“…쳇.”
뭐라고 혼자 툴툴거리는 그.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인 대기줄 끝에 슬쩍 가 서는 그를 보며, 임요셉은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연예인들의 연예인, 선수들 중의 선수를 보는 느낌이다.
“자, 자. 줄 서요.”
“미리 멘트 생각해 놓으세요.”
이연호가 새치기 하는 선수들에게 주의를 준다.
마태강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번호표를 나눠 주고 있었다.
내가 막 선수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있을 때.
“마왕아.”
락커룸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엄재영 감독이 작게 손짓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 실례.”
나는 사인을 받기 위해 남아 있던 선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일어났다.
하필 공교롭게도, 남아 있는 선수는 딱 한명.
홍지노 하나뿐이었다.
“…젠장. 왜 하필 내 차례에….”
내가 책상에서 일어나자 홍지노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그러자.
탁-
홍지노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를 낚아채는 손이 있었다.
“너는 특별히 내가 해 주지.”
그는 임요셉이었다.
임요셉은 매직을 들어 홍지노의 종이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아 뭐야! 네 꺼는 필요 없다고!”
“이거 왜 이래? 공식적으로는 내가 한국 랭킹 1위야.”
“네가 무슨 1위야! 1위는…마동왕 선수지!”
“너 나보다 랭킹 낮잖아? 그러면 겸손하게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아아악! 마동왕 것이 아니면 필요 없다고!”
“특별히 ‘멍청이’라고 적어 주지.”
“뭐 임마?”
“아니면 3연뻥은 어때?”
“이게 진짜!?”
.
.
임요셉과 홍지노가 티격태격 싸우는 것을 뒤로하고, 나는 락커룸을 나왔다.
“빨리, 빨리!”
앞서 걷는 엄재영 감독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해 보였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걸까?
나는 엄재영 감독을 따라 복도로 나가 비상구 앞의 막다른 골목으로 향했다.
굳게 닫힌 철문과 그 옆의 비상구를 제외하면 꽉 막힌 공간이다.
누가 엿들을 걱정도 없어서 모략(?)을 꾸미기엔 딱이다.
“무슨 음흉한 일이세요?”
“마, 자식아. 음흉한 일이라니.”
“음흉한 일이 아니면 왜 이런 데로 불러내요 사람을.”
“그냥 조용한 데 찾다보니 어쩌다 여기로 온 거야.”
“음.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꼭 이런 곳에서 악당들이 흉계를 꾸미던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재영 감독은 음흉한(?) 말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것도 숨결의 온도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상태로.
“그 뭐냐. 위에서 오더가 하나 내려왔어.”
“…위?”
“음. 주최측이랑 진흥원, 그리고 스폰들이지 뭐.”
“뭐라는데요?”
내가 묻자, 엄재영 감독은 끙 소리를 냈다.
“‘쇼맨십(showmanship)’을 좀 보여 줄 수 있냐더라.”
뭔맨십?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엄재영 감독은 말을 이었다.
“격투기 경기랑 같은 거야. 그 왜, 잘나가는 선수들을 보러 오는 관중들이 많잖냐. 그들을 위해 경기 내용을 조금 자극적으로 해 줄 수 있느냐는 거지.”
“자극적이라면 어떻게… 똥꼬쇼라도 하라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거 말고. 저번에 매드독과의 경기 때 있잖아. 랭커들 다섯 명 연달아 파파팍 잡는 거. 이번에도 그런 걸 기대하는 것 같던데.”
참 나. 역올킬 10분 컷이 무슨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나.
이래서 꼰대들이 문제다.
남이 이룩한 성과를 만만히 보고 툭툭 내뱉는 것.
이런 몰이해와 막무가내 땡깡 때문에 잘나가는 선수들이 한국 리그에 환멸을 느끼는 것 아닌가.
내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자, 엄재영 감독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라. 이건 좋게 말하면 너를 키워 준다는 뜻이야. 저번 일을 계기로 스폰서들의 눈에 들었다는 거니까.”
“굳이 나쁘게 듣자면, 약장수가 키우는 원숭이군요.”
“에이, 임마. 그렇게 따지면 나도 그렇지 뭐. 연예인이고 스포츠 선수고 다 똑같은 거야. 그럼 그 사람들이 다 돈 있는 놈들이 키우는 원숭이게?”
엄재영 감독의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 역시 굳이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직까지는 자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뭐, 그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지만.’
내 개인 자산과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은 점점 더 무궁무진해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 이름으로 개인 리그를 개최해 버릴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되면 스폰서 따위 알 게 뭐냐. 내 마음대로 할 거다.’
나는 머지않은 미래를 그려보았다.
머릿속에 펼쳐진 청사진을 떠올리자 지금의 작은 굴욕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알겠어요. 까짓 거 약장수 원숭이 노릇 한번 하죠 뭐.”
“오오!? 진짜냐?”
“네. 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똥꼬쇼는 말고!”
엄재영 감독은 반색을 하며 내 양 어깨를 팡팡 쳤다.
그는 약간 흥분한 표정으로 외쳤다.
“아주 관객들 머릿속에 때려 박아 버려! 임펙트! 네 뜨거운 주먹을 말이야! 이참에 모두에게 알려 주자고! 누가 진짜 ‘정점’인지!”
“…감독님 좀 오글거리시네요.”
“퍄! 내가 또 그런 감성을 잘 알잖냐.”
내가 순순히 지시에 따르자 엄재영 감독은 한시름 덜었다는 듯 급격히 혈색이 좋아졌다.
문득, 나는 물었다.
“근데 이 말 하시려고 그렇게 진지하셨던 거예요?”
그러자 내 말을 들은 엄재영 감독은 손뼉을 탁 쳤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너 빨리 반대편 복도 비상구 좀 가 봐라.”
“…왜요?”
“왜긴 인마! 네 여자친구 면회 왔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잠시 멍해졌다.
……누가 면회를 왔다고?
하지만 내가 반문할 시간도 없었다.
엄재영 감독은 주최 측의 전화를 받더니 이내 급한 기색으로 내 어깨를 팡팡 쳤다.
“그럼 나는 이만 간다? 자식아, 스캔들 안 나게 잘해! 밖에 기자들 많어~”
그는 이내 복도 끝으로 호다닥달려갔다.
“……?”
혼자 남은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반대편 복도의 비상구에서 내 여자친구가 기다린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자친구가 생겨 버린 것인가?
‘개이득!’
…이 아니라.
이게 무슨 상황인지 먼저 알아야겠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초-
나는 긴 복도를 걸어가 반대쪽 끝에 있는 비상구를 향했다.
먼지가 풀썩이는 어두운 공간.
비상구를 알리는 녹색 불빛만이 음침하게 번지는 어둠 속.
락스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풍긴다.
‘아니 무슨 여자친구가 이런 곳에 있어.’
아무리 여자친구가 전설적인 보물이라지만…너무 꽁꽁 감춰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찜찜함을 느끼며 녹슨 철문을 비틀어 열었다.
끼긱-
그러자,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중간 부분에 사람의 실루엣 하나가 보인다.
그것은 녹색 불빛과 어둠 사이에 몸을 반쯤 묻은 채 유령처럼 서 있었다.
“……?”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것은 이내 어둠에서 한 발 슬쩍 걸어 나와 나를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이네?”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여자.
어딘가 나른하게 느껴지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냐?”
내 여자친구는 구면이긴 하되 상당히 의외인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