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왕좌의 게임 (1)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오늘은 최후의 경기 ‘얼티메이트 리그(ultimate league)’가 열리는 날.
온갖 게임 커뮤니티들은 새벽부터 시끄럽게 들썩이고 있었다.
-<국K-1 VS 천지패황> 전력 비교분석.text
↳국K-1>>>>>신>>넘사벽>>천지패황>매드독 아님?
-뎀 빼고 다 잘하는 뎀붕이들아 너네는 누가 이길 것 같냐?
↳장난하냐?
↳멀 그딴걸 물어봄ㅋㅋ
↳애초에 토토 배율이 1:107 임 X발ㅋㅋㅋㅋㅋ
↳내가 하는 사설 사이트에는 아예 ‘천지패황 승’ 항목이 없는데?ㅋㅋㅋ‘몇 분 버틴다’라는 항목들만 있지.
↳양방 막아놓은게 아쉽네...ㅋㅋㅋ
-천지패황...잘하긴 하는데...이번 시즌 국K-1이 너무 넘사벽임
↳엄밀히 말하면 국K-1이 넘사벽이 아니라 마동왕이 넘사벽이지...
↳국K-1은 멤버들 개개인 기량은 뛰어난데 조합이 너무 나빴음.
↳근데 마동왕 하나가 하드캐리해서 겐춘
↳그건ㅇㅈ
-그래도 잘했다 천지패황! 이번 시즌에서 2위 한 거면 사실상 1위 한 거야!
↳맞아ㅋㅋㅋ1등이 너무 넘사벽이니까
.
.
이번에 국K-1, 아니 마동왕과 맞붙게 된 팀은 ‘천지패황’
전북 익산 출신 강팀인 천지패황은 플레이리그 당시 매드독과 접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한 바 있었다.
첫 주자로 나온 매드독의 에이스 김정은이 천지패황을 올킬 직전까지 몰고 갔고, 마지막 주자로 나온 천지패황의 에이스 류요원이 매드독을 역올킬 직전까지 몰고 갔다.
결국 매드독의 마지막 주자 오승훈과 천지패황의 마지막 주자 류요원의 HP가 동시에 0이 되면서 기록적인 무승부가 나온 것이다.
(이는 오승훈의 반사 데미지 특성 탓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리고 새롭게 맞붙게 된 얼티메이트 리그에서, 천지패황은 결국 매드독을 간발의 차이로 따돌리고 2위에 말뚝을 박게 되었다.
나름대로 명경기였기에 팬들은 환호했고 그렇게 천지패황은 2인자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1위인 국K-1과는 승점에서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었으니까.
아무도 천지패황이 1위 타이틀을 거머쥘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심지어 원정 응원을 온 홈팀마저 마찬가지였다.
이번 시즌 2위면 사실상의 1위나 다름없다는 자조적인 분위기가 응원단 내부에서도 맴돌고 있었다.
보통 토토 배율은 마치 살아있는 동물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배당이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역배에 까는 이들도 이번만큼은 별로 없다.
오로지 국K-1에 걸린 배당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회 시작 전까지 거의 변동폭이 없었다.
그만큼 대중들의 신뢰도가 높다는 증거였다.
* * *
그리고 경기 당일.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에는 8만 명의 관중이 몰렸다.
플레이오프 때보다 3배 가까이 많은 수였다.
“마동왕! 마동왕! 마동왕!”
“마왕아! 너만 믿는다!”
“또 신기록 수립 가즈아아아!”
관중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엄청난 기대감이 어린 표정, 목소리들.
하나같이 마동왕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다.
경기는 오후 3시부터 시작이지만 새벽 3시부터 상당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스타디움 안팎은 그야말로 북새통, 시장통, 전쟁통을 연상케 하고 있다.
하지만.
경기장 전역의 뜨거운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인 곳이 딱 하나 있었다.
선수 대기실.
경기장 내부 깊숙이 있는 이 별도의 작은 공간만큼은 차고 무거운 공기가 감돌고 있다.
“…….”
“…….”
“…….”
꽤 널찍한 락커룸.
하지만 이 공간이 좁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선수들의 신경전 때문이리라.
오늘은 국K-1과 천지패황이 맞붙는 날.
왕좌의 주인이 정해지는 날이다.
동시에, 베스트리그에서 최종 탈락한 8개의 팀들이 짐을 싸서 나가는 날이기도 했다.
그동안 승자들의 경기를 지켜보며 분을 삭였던 40명의 패장(敗將)들이 짐을 챙기기 위해 한 곳에 모였다.
“젠장. 그동안 서울에 갇혀 있느라 좀 쑤셔 죽는 줄 알았네.”
“공기 탁하고 사람만 득실거리고. 빨랑 집에 가고 싶다.”
“우린 시상식 들러리야? 뭐하러 그동안 서울에 잡아 놓은 거야?”
“뭐, 나는 좋았어. 서울 호텔에서 빈둥거릴 수도 있었고 밥도 맛있었고 관광도 하고. 휴가 같았는데?”
“슈밤, 우리 팀은 계속 캡슐방에서 연습시켰어. 휴가는 개뿔…….”
이제 마지막 한 경기만 끝나면 그들은 모두 버스에 타고 각 지역으로 흩어질 것이다.
다음 시즌에나 서로 얼굴을 보게 되겠지.
…그중 몇이나 다시 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한때 적이었던만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같은 처지에 있는 만큼 은근한 동료의식도 생겼다.
친해진 이도 있었고 원수가 된 이도 있었고 라이벌 관계가 된 이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 작은 락커룸은 선수들의 힘겨루기 공간이 되는 것이다.
“…….”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락커 속의 짐을 가방에 챙길 뿐.
바로 그때.
끼긱-
힘의 균형이 깨졌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락커룸의 문이 열리며 국K-1의 선수들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전 에이스 임요셉을 비롯해 마태강, 이연호, 송병건이 차례로 들어왔다.
그러자.
“……!”
“……!”
“……!”
그동안 서로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던 선수들이 이젠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인다.
특히나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에서 국K-1에게 제대로 역관광을 당해 초반 탈락한 ‘블루스컬’, ‘다이노소어’ 등의 적대감이 심했다.
임요셉과 막상막하의 승부를 펼쳤던 스타파이브의 ‘쌍칼’ 이준호 역시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쌍칼 이준호는 승부욕이 엄청나기로 이름 높은 랭커.
한국랭킹 3위면서도 항상 자만하지 않고 정진하는 승부사다.
아래를 보지 않고 늘 위만 보며 달려가는 남자.
그 때문일까?
그는 저번 임요셉과의 승부 결과를 아직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 니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준호는 퉁명스러운 말로 임요셉을 도발했다.
하지만 임요셉은 한때 ‘돌부처’라는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로 평정심이 뛰어난 선수이다.
“이겼는데 어떻게 이겼다고 생각을 안 하지?”
“…머라꼬?”
“그럼 이겼는데 졌다고 생각해야 하나?”
임요셉이 묻자 이준호는 딱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기가 죽은 모양새는 아니다.
주먹을 꽉 주고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이 지금 당장이라도 2차전을 준비하는 기색.
바로 현피 말이다.
그때. 옆에서 지원사격이 들어온다.
“저거, 저거, 맞는 말만 따박따박 하는 것 봐. 재수 없네 진짜.”
홍지노.
엘리트즈가 와해되며 블루스컬로 이적한 선수.
그 역시도 임요셉에게 나름의 한(恨)을 가지고 있다.
“…….”
임요셉은 표정을 찌푸린 채 홍지노와 이준호를 바라본다.
그러자.
마태강과 이연호, 송병건이 그들의 시선에 맞선다.
“‘패자는 말이 없다’라고 들었는데… 그렇지도 않네. 오히려 승자보다 말이 많잖아?”
“개도 진 뒤에는 안 짖던데 말이지.”
“형, 이어플러그 낄래요?”
국K-1 멤버들은 기싸움에서 한 치도 밀리지 않는다.
그러자, 그들의 손에 패배한 모든 팀원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승부에서 졌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그렇게 깨끗하게 맺고 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모든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선들을 단칼에 맺고 끊어 버리는 존재가 나타났다.
삐걱-
문이 열리며, 흰 가면을 쓴 남자 하나가 락커룸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마동왕.
그의 등장에 락커룸 안이 급속도로 조용해졌다.
“…….”
그런 침묵 속에서, 마동왕은 방 안으로 뚜벅 뚜벅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방 중앙에서 대치중인 선수들을 향해 짧게 말했다.
“비켜.”
그 말 한마디에.
쫘악-
홍해의 기적이 일어났다.
모세는 바다를 갈랐지만, 마동왕은 자존심을 갈랐다.
모든 선수들이 마동왕의 앞에서 비켜섰다.
그리고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그것은 불과 0.001초 만에 이루어진 일.
뇌가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내린 지령이었다.
본능이 그를 먹이사슬의 상위 포식자로서 인식한 것이다.
“…….”
“…….”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시선도 똑바로 마주치지 못했다.
한 성깔 하기로 이름난 선수들도 전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압도적인 격차(隔差).
마동왕은 이번 시즌 리그에서 그것을 보여 주었다.
아니, 보여 주다 못해 뼈에 각인시켜 버렸다.
이 중에서 마동왕의 손을 거치지 않고 탈락한 이가 몇이나 있으랴?
풀썩-
마동왕은 그대로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
그리고는 가만히 앉아 검지손가락으로 소파의 손잡이 부근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저 위대한 플레이어는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선수들은 모두 그것을 궁금해했다.
그것은 같은 팀인 국K-1 멤버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검지의 무빙을 보아하니… 분명 엄청난 전략을 생각하고 있는 걸 거야.’
‘정점(頂點)에 올라 있는 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어쩌면 적수가 없다는 것에 고독해하고 있는지도 몰라.’
바로 그때.
저벅- 저벅- 저벅-
성깔 더럽기로 소문난 랭커 이준호가 갑자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눈앞에 있는 마동왕을 향해 일직선으로 똑바로 걸어갔다.
“야, 야, 저거 말려야 하는 것 아니냐?”
“쟤 승질 더럽잖아.”
“아까 보니까 임요셉이랑 현피 뜰 각이던데…….”
모두가 우려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이준호를 바라본다.
이내.
“…….”
이준호는 마동왕의 앞에 섰다.
“…뭐야?”
마동왕은 뭔가를 생각하다가 문득 이준호를 보고는 시선을 돌린다.
그러자, 이준호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움직였다.
사삭-
그는 마동왕을 향해 손을 뻗는다.
손에는 매직과 종이, 그리고 액자가 들려 있었다.
“…사인 한 장만 해 주시믄 안 되겠심미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