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79화 (179/1,000)

180화 폭주하는 망령 (4)

남서쪽 정글의 외곽 ‘수몰지대’

물이 범람하여 숲을 반쯤 집어삼킨 지역.

부러지거나 꺾인 거목들이 물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위로 수초들이 둥둥 떠다닌다.

으스스한 물안개가 낀 바닥은 온통 물과 수초, 둥둥 떠다니는 통나무들로 가득했다.

“조심해, 자칫하면 물에 푹 빠져버릴 수 있어.”

수몰지대의 물안개 속에서 사람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 명의 플레이어들이 파티를 이루어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형근, 오주현, 홍준표, 차유미. 3남 1녀로 총 4명.

딱히 대단한 플레이어들은 아니다.

그냥 오늘 이곳에 레이드를 온 그저 그런 수많은 플레이어들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이 맵이 아이템 드랍률이 높대.”

“안개가 짙어서 앞이 잘 안 보이는데?”

“걱정 마십쇼. 제가 길을 대충 압니다.”

“어머, 이거 바닥이 다 물이라서 아이템 건지려면 힘들겠다.”

리더인 우형근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레이드를 이끌었다.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통나무들 사이를 건너뛸 때마다 풍덩 소리가 나며 작은 파도가 쳤다.

필드의 수심은 전체적으로 들쭉날쭉했다.

어느 부분은 깊이가 얕아서 발로 디뎌도 상관없었지만, 그러다가 가끔씩 푹 빠지는 부분이 있어서 곤란하다.

때문에 물 위의 유목들 사이를 밟고 점프해서 가는 것이 제일 편했다.

펄쩍-

통나무를 밟고 다음 통나무로 건너뛴다.

첨벙!

그러면 통나무가 물속으로 한번 푹 가라앉았다가 다시 물 위로 출렁 올라오게 된다.

이렇게 물에 둥둥 떠 있는 유목들을 밟고 건너가다 보면 드문드문 뭍이 나온다.

물에 잠겨 섬처럼 변한 언덕배기들이다.

바로 그때.

“잠깐!”

우형근은 뒤따라오던 친구들을 향해 정지 수신호를 보냈다.

“…….”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눈앞에 있는 통나무를 쳐다보았다.

물 위에 반쯤 잠긴 채 둥둥 떠 있는 통나무.

언뜻 보기에는 주위에 널린 다른 통나무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저 통나무는 밟지 마. 몬스터다.”

우형근은 날카로운 눈으로 유목의 정체를 꿰뚫어보았다.

물 위에 가만히 떠 있으면서 통나무 흉내를 내는 괴물.

<유목 악어> -등급: C+ / 특성: 매복, 변온, 하극상, 뺑소니

-서식지: 침수림 수몰지대

-크기: 8m.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통나무는 좋은 발판이지만… 가끔 어떤 통나무는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 커다란 악어는 가죽의 모양이 나무껍질과 비슷해서 물 위에 등만 내놓고 둥둥 떠 있으면 유목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신의 등을 밟거나 뛰어넘지만 않으면 별다른 공격을 하지 않기에 주변에 있는 다른 통나무들을 밟고 돌아서 가면 그만.

…하지만.

“아아, 이거 난감하게 됐는걸?”

우형근은 유목 위에 선 채 팔짱을 꼈다.

공교롭게도, 유목 악어가 가로막고 있는 주변에는 아무런 통나무들도 보이지 않는다.

수류의 방향에 따라 통나무들로 된 징검다리의 모양이 계속 뒤바뀌는데 지형 전체의 유속이 느린 편이라서 다른 발판이 떠내려 오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유목 악어를 잡고 가자니…….”

우형근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유목 악어는 큰 덩치와 질긴 가죽을 가졌다.

다른 스탯은 몰라도 방어력과 체력 하나는 말도 안 되게 높은 몬스터.

평소의 공격 속도나 이동 속도는 느리지만, 그래도 매복 상태에서 벗어날 때의 한 순간만큼은 엄청나게

빠르다.

디딜 곳이 별로 마땅치 않은 이곳에서는 여러모로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몬스터였다.

“어떻게 하지 형? 잡을까?”

“그, 그냥 돌아갈까요 대, 대표님?”

“아니면 다른 유목이 떠내려 올 때까지 기다려 보는 것도…….”

오주현과 홍준표, 차유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형근은 난색을 표했다.

정면으로 돌파하자니 실력이 모자랐고 돌아가자니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무작정 기다리자니 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바로 그때!

“어?”

우형근은 전방을 향해 눈을 크게 떴다.

반대편에서 누군가 유목들을 밟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첨벙! 첨벙! 첨벙!

그는 앞에 있는 통나무들을 거침없이 내딛으며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깜짝 놀란 홍준표가 외쳤다.

“조, 조, 조심해요, 아, 앞에, 악, 악어가 있…!”

그러자, 우형근이 그런 홍준표의 옆구리를 퍽 친다.

“자식아 조용히 해!”

“…왜, 왜요?”

“저 멍청이가 악어를 밟으면 악어가 저놈을 물고 물속으로 들어갈 거 아니냐. 그럼 우린 그때 그냥 건너가면 그만인 거라고.”

우형근의 말에 오주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준표와 차유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내, 정면에서 달려오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파악-

물안개를 걷어내며 뛰쳐나온 플레이어.

그는 흰자위만 가득한 눈에 얼굴을 포함한 전신이 시커먼 핏줄로 뒤덮여 있었다.

너덜거리는 망토에 손에는 잿빛의 송곳을 들었다.

“알몸으로 다니는 거 보니 제정신은 아니구만. 쯧쯧.”

우형근은 눈앞의 정신 나간 플레이어를 향해 애도를 표했다.

‘…근데 어디서 많이 본 놈인데?’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잠깐 들기도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곧 유목 악어의 등판을 정면으로 딱 밟을 것이고 놈에게 물려 깊은 물 밑으로 끌려들어갈 것이다.

…한데?

풍덩! 퍼펑!

놈이 유목 악어의 등을 밟는 순간.

[캬아아아악!]

유목 악어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쿠르륵! 지글지글지글…….

놈이 밟은 부분에서 불꽃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단백질 타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풍덩!

유목 악어는 등에 화상을 입은 채 그대로 물 밑으로 도망쳐 버렸다.

HP가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지면 도주하는 ‘뺑소니’ 특성이 발현된 것이다.

한편.

우형근과 오주현, 홍준표, 차유미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레벨이 얼마나 높으면 밟는 것만으로 유목 악어를 쫓아 보낸단 말인가?

“우, 우와. 님 쩌시네요.”

우형근은 짐짓 방긋 웃어 보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상대방이 엄청난 고렙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매너 있게 행동해서 호감을 살 생각이었다.

혹시 누가 아는가? 버스라도 한번 태워 줄지.

…하지만.

우형근 일행이 타게 된 버스는 쩔 버스가 아니라 황천행 버스였다.

퍼퍽!

눈앞에 나타난 검은 남자는 송곳을 들어 우형근의 목을 가차 없이 찔러 버렸다.

“…꺽?”

우형근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목젖이 있어야 할 부근에 커다란 구멍이 나 버렸으니 말이다.

“뭐, 뭐야!?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감히 우리 형님을… 컥!?”

“대, 대표님! 괘, 괘, 괜찮… 억!?”

오주현과 홍준표는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퍼억- 뿍!

그들의 목에도 바람구멍이 연이어 뻥 뚫렸기 때문이다.

풍덩! 풍덩! 풍덩!

세 남자는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꿀렁… 꿀렁… 꿀렁……

잔잔한 수면 위로 핏물이 느리게 번진다.

“꺄아아아악!”

홀로 살아남은 차유미는 비명을 지르며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큭큭큭, 크르륵!]

검은 사내는 목을 좌우로 한번 꺾었다.

시커먼 핏줄들이 펄떡이며 그의 전신을 한층 더 촘촘하고 쫀쫀하게 뒤덮는다.

“뭐, 뭐야!? 대체 저게 뭐야!? 몬스터야!?”

차유미는 도망치며 인터넷 검색창을 켰다.

그리고 재빨리 ‘침수림 수몰지대’를 검색했다.

그러자.

수많은 검색 결과들이 떴다.

-현재 ‘썩은물’이 침수림 수몰지대에 출몰했다는 정보임~~다들 주의하셈!!

-아 X됐다. 나 오늘 거기 가서 퀘템 구해야 하는데...

↳ 퀘템이 중요함 목숨이 중요함?

-오늘 수몰지대 간 흑우 없제??

↳ ㅋㅋㅋㅋ쫄깃쫄깃한 말랑카우가 아니고서야 거기 안 가지

↳ 어떤 ㅂㅅ이 거길 감...썩은물 만날라고ㄷㄷㄷ

-유저님들 주의하십쇼! 오늘 수몰지대에 썩은물 떴습니다!

↳ 거의 자리 맡아놓고 사냥하는 수준ㅉㅉㅉ

↳ 몬스터 잡으려고 자리 맡는 거 아닌 거 같은데? PK가 목적 아님?ㅋㅋㅋ

↳ 그 레벨에 양학하면 재밌나;;;; 썩은물이 아니라 타르네 타르

↳ 난 재밌을거 같긴 한데?

↳ 진짜 재밌긴 재밌을듯ㅋㅋㅋㅋ

.

.

차유미는 댓글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프, 플레이어라고? 저게?”

그녀는 도망치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후욱-

그녀의 긴 머리카락 끝에 닿을 듯 따라붙은 썩은물이 그녀를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저게 몬스터지 어떻게 플레이어야!”

차유미는 비명을 질렀다.

썩은물의 외형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것이었다.

검은 근섬유들과 검은 핏줄들이 서로 뒤엉키고 풀리고를 반복하며 몸이 점점 팽창한다.

몸은 고속붕괴와 고속재생을 반복하며 계속해서 기괴하게 뒤틀리고 있었다.

거기에 눈동자도 없이 허여멀건 눈과 미소 짓는 입 안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들까지.

누가 봐도 호러틱 몬스터다!

퍼펑!

썩은물은 통나무를 밟고 펄떡 뛰었다.

서전트 점프가 거의 10미터에 달하는 도약력이다.

콰콰쾅!

놈은 도망치는 차유미의 앞을 순식간에 가로막았다.

철썩!

썩은물이 내려앉은 통나무가 요동치며 거센 물보라가 일어났다.

그 때문에 차유미는 균형을 잃고 물속으로 곤두박질할 뻔했다.

이내.

촤악-

썩은물의 시커먼 손이 물의 벽을 뚫고 차유미의 얼굴로 향했다.

“꺄아아아악!”

검은 손바닥이 시야를 가득 메우는 순간, 차유미는 죽음을 직감했다.

…바로 그 순간!

퍼펑!

어디선가 날아온 참격이 썩은물의 손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

썩은물은 기가 막힌 반사신경으로 손을 뒤로 물렀다.

철썩-

참격은 차유미와 썩은물이 밟고 있던 통나무를 두 조각으로 잘라서 둘을 멀찍이 떨어트려 놓았다.

동시에.

턱-

긴 나뭇가지 위로 모습을 드러낸 붉은 옷의 여자.

바로 유다희였다!

“…아깝네. 손모가지를 잘라 놓을 수 있었는데.”

그녀는 썩은물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차차차차차착-

이내.

붉은 장포를 걸친 플레이어들이 속속들이 침수림 수몰지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때 고인물을 북대륙 끝까지 몰아넣었던 마교의 500 정예병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크르륵…]

썩은물은 흰 눈을 가늘게 뜬 채 마교인들을 흩어보았다.

유다희는 그런 썩은물의 시선을 한 치의 밀려남도 없이 맞받는다.

이내, 그녀는 차가운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역시 너는 고인물이 아니야. 그놈은 졸렬하고, 비열하고, 재수 없고, 교활하고, 음흉하고, 싸가지 없는데다가 인성까지 터졌지만… 그래도 너처럼 미치지는 않았어.”

편을 들어주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구분이 어려운 멘트다.

그때.

턱-

커다란 통나무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한 남자.

“오랜만이군.”

얼굴을 가린 마스크,

상체를 통째로 가리고 있는 두터운 중장갑 건틀릿,

시뻘겋게 불타고 있는 두 다리.

수많은 뉴비들의 민원을 받고 출동한 빌런 처리반.

마동왕.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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