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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78화 (178/1,000)
  • 179화 폭주하는 망령 (3)

    청담동 사옥, 국K-1의 연습실.

    나는 모니터를 켰다.

    “...고인물이 무차별 PK중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정말로 그런 루머가 떠돌아다닌다면 그건 고인물의 안티팬들이 퍼트린 것이겠지.

    ...가령 유다희라거나.

    “...음. 아니다. 유다희는 아니겠구나.”

    나는 그녀의 성격을 잘 안다.

    유다희는 도끼를 들고 직접 찾아오면 찾아왔지 뒤에서 이런 음흉한 개소문을 퍼트리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대체 뭔 일인지 한번 봐야겠네.”

    나는 약간은 가벼운 마음으로 모니터를 켰다.

    하지만.

    “...흠.”

    막상 화제가 되고 있는 동영상을 보자 나는 사안이 썩 가볍지 않음을 직감했다.

    화면 속에는 시커먼 몸을 가진 남자가 오픈필드를 폭주하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썩은물.

    검은 얼굴에 허연 눈알, 전신을 뒤덮고 있는 시커먼 핏줄들.

    현란한 움직임으로 플레이어들의 공격을 피하며 찰나의 틈에 송곳을 쑤셔박는 변태 플레이.

    나는 이런 식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 하나를 알고 있다.

    고인물. 바로 나다.

    모니터 속에서 폭주하고 있는 이 검은 괴물은 분명 나였다.

    ‘누가 나를 따라하는 거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를 사칭해 변태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명확하다.

    내가 장비하고 있는 A+~S급 아이템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뭐 아이템을 개조해서 외형만 따로 흉내 낸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성능들까지는 따라할 수 없겠지.

    하지만 화면 속 저 시커먼 썩은물은 깎단과 바실리스크의 심장, 그리고 혈액포식자의 링까지 자유자재로 다룬다.

    내가 아니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기행(奇行)이었다.

    “...뭐지. 내가 술 마시고 필름 끊긴 적 있나?”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저런 짓을 벌인 걸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계속 모니터를 주시했다.

    그러자.

    이내 놀라운 것이 눈에 들어왔다.

    “...!”

    모니터 속의 썩은물이 뉴비들을 학살하는 장면.

    나는 그 화면을 크게 클로즈업했다.

    [뿌드득- 우지직-]

    놈이 한 검사의 칼을 입으로 깨물어 부러트린 뒤 그의 목을 벨 때, 옆으로 뒤틀리는 다리 근육 사이.

    그 시커먼 근육 섬유 사이에서 반짝이는 부분이 있었다.

    핑크색!

    물이 거의 다 빠진 듯한 핑크색이 마치 페인트처럼 썩은물의 장딴지 부근에 묻어있다.

    그것은 어떤 아이템의 흔적이 분명했다.

    -<정령들의 랜덤 염색 키트> / D

    아주 오래 전. 정령들이 악마들에게 멸종당하기 전에 만들어진 아이템이다. BOX 속에는 정령들이 친 장난이 그대로 남아 깃들어 있다.

    …열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한때, 나는 마교의 열렬한 추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마교는 나를 척살하기 위해 이 아이템으로 내 몸을 핑크색으로 물들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핑크색으로 물든 몸으로 성벽을 넘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착안해낸 바 있다.

    도플갱어.

    그렇다.

    나는 나를 포함해 13인의 핑크 덜렁덜렁이를 만들었고 그것들을 이용해서 추격대의 시선을 분산시켰었다.

    “...그러고 보니, 나 말고도 도플갱어 한 마리가 살아남아서 도망쳤었지.”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일이다.

    설마 그때의 도플갱어가 지금까지 생존해 있었을 줄이야.

    “...상태를 보니, 꽤 죽인 모양인데.”

    도플갱어는 그동안 수많은 몬스터들을 죽이며 연쇄살인 스텍을 쌓아온 듯싶었다.

    플레이어가 연쇄살인 특성을 얻었을 때, 그것은 오로지 같은 플레이어를 상대로만 집계된다.

    하지만 특성의 원래 소유자 도플갱어의 경우에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에게 그 특성을 적용시킬 수 있다.

    몬스터, 플레이어, NPC...

    뭐든지 죽이면 죽일수록 물리공격력이 올라간다.

    그것이 도플갱어의 특성이 아니던가.

    육체 안에 담아놓을 수 있는 물리공격력이 그 한도를 무시한 채 폭증하니 그릇이 멀쩡할 리 없다.

    그래서 저렇게 전신이 붕괴되었다 회복되었다를 반복하는 것이리라.

    뉴비들을 학살하고 있는 저 신들린 듯한 움직임도 그간의 나의 행동을 딥러닝으로 예측하고 카피하는 것이겠지.

    “능력을 보아하니 고인물을 거의 99%까지 카피하는 것 같은데. 그럼 그냥 일반 도플갱어가 아니라 카이저 급인가?”

    야생 도플갱어가 계속되는 살육 끝에 한 단계 상위의 몬스터로 진화했다.

    그것도 모자라 오픈필드를 폭주하며 수없이 많은 생명체를 죽이고 있다.

    거의 버그에 가까운 상황.

    “으음. 너무 키워놨군.”

    나는 도플갱어, 아니 ‘썩은물’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그동안 어디 처박혀 있었나 했더니만...아무래도 남쪽의 정글에서 약한 몬스터들을 무수히 죽이며 연쇄살인 스택을 쌓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로 정글을 나와 초보자들이 있는 구역으로 난입한 것이겠지.

    초보자 마을의 경비병들과는 이미 일전을 치른 경험도 있으니 무서울 것도 없었을 것이다.

    뎀의 AI는 스스로 학습하고 패치, 업데이트를 통해 자신을 보완, 개발해 나가는 시스템이다.

    아마 이 도플갱어 녀석도 그런 큰 룰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

    각종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원성들이 폭주하고 있었다.

    -아 썩은물 진짜ㅡㅡ사냥을 못하겠네

    -이 맵이 다 너 자리냐!

    -양학하지마라 썩은물아~~~

    -고이다 못해 썩어버린 것....

    ↳ 저정도면 썩은물도 아니다. 타르다 타르!

    -NPC들은 왜 죽이냐 퀘스트 보상도 못 받게!!!

    -고인물님 이만하면 됐으니 작작좀해주세요^^

    -저거 진짜 고인물이냐? 아니면 해명 좀 해라;;;

    -누가 좀 도와주세요ㅠㅠㅠ저 사람 무서워서 필드를 못 나가겠음..

    -고수님들...썩은물 좀 죽여주세요...

    -진짜 누가 가서 저 썩은물 좀 죽여줘라...

    ↳ 그게 되겠냐? 고인물을 상대할 수 있는 랭커가 한국에 어딨어ㅋㅋ

    ↳ ...한 사람 있긴 있지 않음?

    ↳ 누구???

    .

    .

    여론은 점점 나쁘게 흘러가고 있다.

    일이 크게 번지기 전에 잡아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얼른 고인물 계정으로 접속해서 내가 저지른 짓이 아님을 해명한 뒤 직접 저 썩은물 녀석을 죽이는 것이지만...

    ‘하필 지금 국K-1 연습실이란 말이지.’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서둘러서 차에 탄 뒤 집에 가서 접속한다고 해도 약 30분은 걸릴 터, 그동안 더 많은 초보자들이 죽어 나가겠지.

    “더 이상 남에게 피해를 주게 둘 수야 있나.”

    나는 결심했다.

    썩은물에게 죽은 초보자들에게는 전부 피해 아이템이나 골드를 보상해 줄 생각이다.

    기껏해야 초보자 아이템들이니 별로 큰 출혈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게임으로 들어가 저 썩은물을 제거한다.

    바로 마동왕 계정으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임요셉과 이연호가 물었다.

    “형님, 굳이 직접 처리하러 가십니까? 별로 상관도 없는 사람인데 그냥 내버려 두셔도…….”

    “또 위험하기도 합니다. 고인물 저 사람, 왜 프로리그로 안 올라오는 건지 모르겠을 정도로 센데…….”

    나는 말했다.

    “한때 싸워 봤던 놈이야. 이긴 적도 있고.”

    그렇다. 명분이라면 있다.

    마동왕과 고인물의 PK 전적은 현재 1:1.

    아직 최후의 한 판이 남아 있는 것이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내가 마동왕이고 도플갱어 카이저는 고인물이라는 것이다.

    ‘마동왕 계정으로 접속해서 썩은물을 잡아 죽인 다음에 이놈은 고인물이 아니라고 대신 해명해 주면 되겠지.’

    그리고 바로 고인물 계정으로 접속해 사망으로 인한 접속불가 패널티가 없음을 밝히고 입장 표명을 한다면 오해도 깨끗하게 풀릴 것이다.

    더불어 뉴비들을 양학하고 있는 괴물을 처리했다는 점에서 마동왕의 이미지도 한 층 더 좋아질 테고 말이다.

    현 시점에서는 그게 가장 깔끔하고 피해도 적은 해결책이다.

    내가 캡슐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자,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같이 가 드릴까요?”

    투신 마태강이었다.

    그는 나의 상황을 아는 극히 일부의 존재.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어찌 보면 내가 뿌린 씨앗이니까.”

    “그렇습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마태강은 내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한 발 물러섰다.

    이내.

    나는 캡슐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썩은물 VS 고인물’

    아니, ‘썩은물 VS 마동왕’ 구도인가?

    조금은 기묘한 구도의 대결이 될 것 같다.

    *       *       *

    한편.

    고인물의 타락 메타 ‘썩은물’

    그것의 등장은 어둠 속 깊이 파묻혀 있던 몇몇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미국 북부의 어느 한적한 도로-

    주륵-

    웨건 트렁크에서 핏물이 흘러나온다.

    그 안에서는 커다란 골프가방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제발…이러지…마…….”

    놀랍게도, 가방은 말을 했다. 꺼져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그러자.

    “푸스스스스!”

    트렁크 앞에 있던 사내가 김새는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조디악 번디베일’

    게임 내에서는 앙신이라고 불리게 될 남자.

    그는 현실 세계에서는 악명 높은 연쇄살인범이다.

    조디악은 자신의 웨건 트렁크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 무서웠던 ‘도깨비’가 이렇게 약한 모습이라니.”

    “제발… 제발… 나는 아직 신혼이야… 아내 뱃속에 애기도…….”

    “잘 가.”

    “아, 안 돼! 살려 줘… 나는 ‘그 프로젝트’랑 직접적으로 관련도 없…….”

    골프가방은 필사적으로 애원했지만, 조디악은 그저 무감정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볼 뿐이다.

    이내, 그는 툭 던지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을 것도 같은데…….”

    “……?”

    “게임에 대한 정보를 넘기는 거야. 히든 피스든, 이스터 에그든, 뭐든 좋아.”

    그러자, 골프가방이 움찔했다.

    “……나, 나는 그런 쪽은 잘 몰라. 오히려 CBT 출신인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조디악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다른 걸 묻지. 네가 알 만한 것.”

    그는 조용해진 트렁크에 대고 속삭였다.

    “‘클로즈 베타 테스트(CBT)’를 최초로 기획한 GM. 어디에 있어?”

    그러자.

    약간의 침묵 후, 골프가방은 입을 열었다.

    “한국… 랭커들 중에…….”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골프가방은 이내 축 늘어지더니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푸스스스스. 어라? 뒈졌네.”

    조디악은 골프가방의 지퍼를 열어 본 뒤 어깨를 으쓱했다.

    텅-

    이내, 트렁크가 닫혔다.

    “한국 랭커들이라?”

    조디악은 즐거운 표정으로 웃었다.

    너무 적은 단서이긴 했지만 뭐, 상관없다. 시간은 많으니까.

    이내, 그는 노트북을 꺼내 인터넷에 접속한다.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에 들어가 ‘한국 랭커’라는 키워드를 입력하자, 요즘 한창 핫한 이슈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조디악은 그 이슈들 틈에서 반가운 얼굴을 하나 찾아냈다.

    “…Rotten 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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