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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75화 (175/1,000)
  • 176화 어린 여왕님의 펫이 되었습니다 (3)

    눈앞에 있던 늙은 와두두가 고개를 들었다.

    <쥬딜로페의 유모 ‘크랩그랩’> -등급: A+ / 특성: 갹출, 1:1

    -서식지: 유모굴

    -크기: 1m.

    -여왕의 알을 지키고 돌보는 최후의 벽.

    크랩그랩.

    그는 몬스터와 NPC의 기로에 서 있는 트릭스터다.

    이 중립자를 몬스터로 대할 것이냐 NPC로 대할 것이냐는 온전히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린 것.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 역시도 플레이어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나는 눈앞의 이 늙은 와두두를 NPC로 대하기로 했고 그 결과는 내가 얼핏이나마 알고 있던 것과 일치했다.

    […연자여, 내 말이 들리는가?]

    크랩그랩은 나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낡고 오래되었지만 깨끗한 이불 냄새가 났다.

    그는 쭈글쭈글한 촉수로 내 눈을 더듬으며 말했다.

    [새로운 여왕님을 모시게 된 자로군. 좋은 눈을 하고 있어.]

    나는 속으로 크랩그랩의 설정을 떠올려 보았다.

    원래 여왕을 제외한 대부분의 와두두들은 오래 살지 못한다.

    24시간.

    그것이 와두두의 수명이다.

    거의 모든 와두두는 하루 24시간을 1세대로 정하여 그 안에서 살고 죽는다.

    하지만 간혹, 전생에 고귀한 전사였던 충왕종이 와두두가 된 뒤에도 그 영성을 잃지 않고 간직하여 수명을 연장하는 경우가 있다.

    원래 1세대만 사는 벌레가 변이를 일으켜 2세대를 살게 된 존재.

    그것이 바로 네임드 와두두 크랩그랩이다.

    그래봤자 2일 하고도 17시간에 불과한 수명이지만, 와두두들에게는 엄청나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대현자인 것이다.

    지이잉-

    크랩그랩은 촉수로 내 눈을 더듬었다.

    [하루만 사는 존재의 눈에는 세상이 더욱 특별하게 보인다네.]

    그리고 이내 나에게 특별한 ‘버프’를 걸어 주었다.

    ‘늙은 와두두의 축복’

    ↳시력이 비정상적으로 좋아집니다.

    ↳이 버프는 24시간이 넘도록 지속됩니다.

    자그마치 이틀 하고도 17시간이나 지속되는 버프가 눈에 깃들었다.

    예전에 설산지대에서 ‘눈의 기러기의 눈’ 아이템을 썼을 때만큼이나 잘 보인다.

    이윽고.

    [더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을 축하하네. 여왕님을 잘 부탁함세…….]

    크랩그랩은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 내렸다.

    수명이 다한 것이다.

    만약 싸웠다면 엄청나게 강력한 적으로 변했겠지만… 아군이 되자 이렇게까지 쇠약해지다니.

    “역시 이게 주인공의 법칙인가.”

    원래 다 그런 것 아닌가.

    악당일 때는 세던 녀석들이 주인공 편에 붙으면 갑자기 약해지거나 전투력 측정기 정도로 전락해 버리는 것.

    뭐, 흔한 일이다.

    “그래도 의기만큼은 의연하네. 아무리 인공지능이라도…….”

    나는 그의 허물을 향해 짧게 목례했다.

    한낱 NPC일지라도 게임의 스토리와 설정에 깊게 몰입한 이상 감동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는 조금은 숙연해진 마음으로 유모굴을 빠져나갔다.

    돌아다니는 와두두들은 더 이상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뭐 선공 특성만 사라진 것이라서 싸우려면은 얼마든지 싸울 수 있겠지만,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인벤토리를 들여다보자, 와두두 여왕 쥬딜로페가 알껍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색- 색-]

    통통한 볼이 숨결에 따라 오르락내리락 반복한다.

    진짜로 살아 있는 듯 생동감 넘치는 모핑(morphing)이었다.

    -<와두두 여왕의 알> ?

    벌레도 식물도 아닌 존재의 알.

    안에는 꿈 많은 소녀 ‘쥬딜로페’가 잠들어 있다.

    -5% 확률로 시끄러움

    -부화조건: ???

    부화 조건을 알 수 없기는 하지만, 일단 ‘?’등급 아이템을 얻었다.

    어둠 대왕을 잡고 얻은 ‘솔로몬의 목걸이’에 이은 두 번째 무등급 아이템이다.

    “무등급 아이템이 좋은 건 알겠는데, 이건 발동 조건을 몰라서 영…….”

    나는 ‘부화조건: ???’ 라는 항목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클릭해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보자.

    ‘부화조건: ???’

    ↳알은 으레 따듯한 곳에서 부화합니다.

    퍽 미묘한 힌트만이 존재할 뿐이다.

    ‘뭐, 지금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나는 잠시 이 알에 대한 신경을 꺼두기로 했다.

    사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늙은 와두두의 축복 버프’다.

    이걸 얻은 시점에서 베스트리그는 이미 우승한 것이나 다름없다.

    매드독이 일으킬 이변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이틀만 버티면 되겠네.”

    나는 이틀 하고도 몇 시간 뒤에 실시될 프로리그의 도핑테스트를 떠올렸다.

    주최측 신관에 의해 펼쳐지는 신성마법 ‘리그레션(regression)’

    이는 24시간 내에 걸린 모든 버프, 상태이상을 소멸시키는 마법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약과 버프 등의 제한시간은 최대 24시간.

    때문에 주최측에서는 리그레션 마법으로 모든 도핑들을 걸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늙은 와두두의 축복’만은 유일하게 24시간을 넘어가는 버프이기에 주최측의 도핑테스트에 걸리지 않는다.

    ‘48시간 전이라면 몰라도 말이야.’

    그렇게 해서, 나는 대회에서 합법적(?)으로 도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       *

    시간이 흘러 대회 당일.

    3만 명의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K-1과 매드독의 마지막 라운드가 펼쳐지고 있었다.

    경기가 이루어지는 맵은 ‘죽음부름 협곡’

    나는 김정은을 포함한 매드독의 랭커 4명을 6분 11초 만에 잡아버렸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 카드인 오승훈을 상대하는 중이다.

    오승훈은 매드독 팀의 히든카드로 분신 메타를 쓰는 마법사.

    그는 최대 100명의 분신을 동시 컨트롤 가능할 정도의 실력자이다.

    일반적으로 본체와 분신은 거의 흡사하여 육안으로는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지만.

    ‘늙은 와두두의 축복’

    나는 이 특별한 버프를 받은 덕분에 적의 모든 움직임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다.

    수많은 분신들 틈에 숨은 본체가 눈을 몇 번 깜빡이는지.

    분신이 거듭될수록 체온이 얼마나 낮아지는지.

    또 색은 얼마나 연해지는지.

    모든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수백 미터 떨어진 참치의 움직임을 맨눈으로 파악해 내는 어부처럼, 나는 엄청난 시력으로 적을 압도했다.

    ‘어디 보자, 버프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늙은 와두두의 축복 버프는 이제 약 4분 정도 남았다.

    시간은 충분했다. 넘칠 정도로.

    딱! 따악! 딱!

    나는 오승훈의 분신들을 싸그리 무시한 채 녀석의 본체만 뚜까 패기 시작했다.

    “잡았다 요놈.”

    “또 잡았다 요놈.”

    “요 잡았다 또놈.”

    어디에 숨어도, 어떻게 숨어도, 언제 숨어도, 나는 오승훈을 찾아냈다.

    ‘I will find you, and kill you.’

    언젠가 봤던 영화의 명대사를 중얼거리면서.

    한편.

    몇 번인가 핵꿀밤을 날리자 오승훈의 HP는 금방 바닥을 보인다.

    애초에 마법사인 이상 HP통이 그렇게 크지 않다.

    “으아아아!”

    견디다 못한 오승훈은 괴성을 지르며 악을 써 댔다.

    이내, 놈의 눈에 시뻘건 핏발이 섰다.

    “나를 깔보지 마세요!”

    어린 천재의 고고한 자존심에 금이 갔다.

    아니, 금이 가다 못해 왕창 깨져 버렸다.

    이내, 녀석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우웅- 우웅- 우웅…….

    수없이 많은 분신이 대지를 가득 메운다.

    분신은 보통 1초당 1%의 HP가 사라지기에 무작정 많이 만들면 운용을 하는 도중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가장 이상적으로 운용 가능한 분신의 숫자는 20명 내외.

    그것을 넘어가면 MP와 HP를 조금씩 손해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오승훈은 분신의 숫자를 한계까지 채워 늘렸다.

    그것은 마법사가 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 위함인 것이다.

    모든 마나를 방출해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것!

    말하자면 자폭(自爆)이다.

    쿠구구구구구구!

    마나의 파동으로 인해 대기가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자그마치 99마리에 달하는 분신들이 제각기 자폭을 준비한다.

    용암 분출로 인해 혼란스러워진 이 협곡 전체를 통째로 무너트릴 기세였다.

    전용진 캐스터를 비롯한 해설들이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아아! 오승훈 선수!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나요!]

    [국K-1과 매드독의 마지막 주자들이 싸우고 있는 라운드입니다! 여기서 오승훈 선수가 자폭할 경우 무승부로 기록되겠군요!]

    [물론 마동왕 선수가 순순히 자폭에 당해 줄 경우의 이야기입니다만!]

    [마동왕 선수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빨리 여기서 도망쳐야 해요! 당장! 조금이라도 먼 곳으로!]

    그렇다.

    여기서 오승훈이 99마리의 분신과 함께 자폭할 경우 꽤나 넓은 범위의 필드가 소멸할 것이다.

    “…….”

    하지만 캐스터들의 예상과는 달리, 나는 선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아도 괜찮다.

    왜냐하면 녀석은 자폭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

    번쩍-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메두사에게서 빼앗은 ‘마나 번’ 특성이 개화되었다.

    가면 속 눈동자가 붉게 물드는 것이 느껴진다.

    쩌저적-

    내 시선과 마주한 모든 생명체는 돌로 변한다.

    오승훈의 분신 99마리, 그리고 시선을 내게 고정시킨 채 눈도 깜빡이지 않던 본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돌로 변한다고 해도 아주 잠시, 게다가 신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메두사에 비하면 형편없을 정도로 약한 특성이라고 해도, 적어도 오승훈의 분신들이 전신에서 방출하는 마나들을 일시적으로 스탑시키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

    “어엇!?”

    몸이 뻣뻣하게 굳은 오승훈이 당황해서 눈을 크게 떴다.

    흔들리는 동공, 놈은 이제 시선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누가 봐도 저 녀석이 본체다.

    그것은 ‘늙은 와두두의 축복’ 버프가 없어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손바닥의 옆면을 칼처럼 휘둘렀다.

    퍼억-

    깔끔한 손날치기에 오승훈의 목이 그대로 잘려나간다.

    퍼퍽!

    반사 데미지가 돌아왔지만 그것은 나의 목에 옅은 상처만을 낼 뿐이다.

    틱- 틱- 데구르르…….

    나는 저 멀리 굴러가는 오승훈의 머리통을 보며 습관적으로 입을 열었다.

    “다음.”

    그리고, 바로 실수를 깨닫고는 정정했다.

    “…아, 이제 없지.”

    *       *       *

    […아, 이제 없지.]

    거대한 전광판에 내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되었다.

    빵빵한 스피커가 나의 마지막 대사를 홀에 전달하자.

    우-와아아아아아!!

    수만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한다.

    스타디움의 천장이 붕 날아가 버릴 정도로 큰 함성이었다.

    드디어 베스트리그의 ‘첫 올킬(First Allkill)’이 떴다!

    ‘총 전투 시간 9분 59초’

    심지어 그냥 올킬이 아니라 역(逆)올킬!

    게다가 그냥 역올킬이 아니라 10분 컷!

    리그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이 지금 나의 손에 의해 처음으로 달성된 것이다.

    관중들의 뜨거운 함성.

    잔뜩 흥분한 캐스터들의 중계.

    찬란하게 내리쪼이는 무대의 하이라이트.

    나는 매드독 역올킬로 승점 3점을 따내 ‘국K-1’의 멱살을 한 번 더 잡아 끌어올렸다.

    하드캐리.

    최후의 전장인 ‘얼티메이트 리그(Ultimate League)’로의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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