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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71화 (171/1,000)
  • 171화 생태계 교란종 (1)

    나는 김정은을 깔끔하게 리타이어 시킨 뒤 협곡 너머를 향해 손짓했다.

    “다음.”

    내 말이 끝나마자.

    콰쾅!

    협곡 끝에서 다음 선수가 뛰쳐나왔다.

    “이 자식! 감히 우리 대장님을!”

    모습을 드러낸 이는 키가 2미터가 넘을 정도로 큰 남자였다.

    커다란 물소 뿔 두 개가 달린 투구를 썼고 손에는 묵직한 도끼를 들었다.

    각진 얼굴에 굵은 눈썹, 부리부리한 눈빛은 ‘나 충성스러움!’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흐음.”

    나는 한쪽 눈썹을 까닥 움직였다.

    ‘현 한국 랭킹 10위. ‘블랙 옥스’ 방철우...였던가?’

    초반에 랭킹에서 반짝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사라져버린 랭커.

    하지만 워낙에 특이한 공격패턴을 가진 랭커인지라 이름과 별명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블랙 옥스(black ox).

    흑우(黑牛).

    검은 소라는 뜻을 가진 별명으로 방철우에게 아주 딱 어울리는 닉네임이다.

    그는 정면을 향해 시커먼 뿔을 들이밀며 씩씩거렸다.

    “대장의 원수를 갚아주겠다!”

    나는 혀를 끌끌 찼다.

    “설마 나한테 물리공격으로 덤비는 흑우 없제?”

    “그럴 생각이다!”

    “흑우가 아니라 호구네.”

    내가 피식 웃자.

    콰쾅!

    방철우가 온 힘을 다해 돌격해 온다.

    “...음?”

    나는 예상 외로 방철우의 속도가 빠른 것에 놀랐다.

    우르르릉-

    방철우가 돌격해 오자 마치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으음, 이 힘에 이 속도라. 꽤 귀찮겠는데?”

    나는 방철우의 돌격 코스에서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났다.

    물리공격력이 상당한 것 같으니 정면으로 맞받지 않고 그대로 흘려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콰쾅!

    놀랍게도, 방철우는 돌진 궤도를 거의 직각으로 꺾으며 나를 따라왔다!

    직선으로 돌진하던 중에 보이기 힘든 턴이었다.

    콰쾅!

    나는 방철우의 몸통박치기와 도끼 베기에 연달아 정면으로 맞아버렸다.

    “...큭!?”

    표정이 절로 찌푸려진다.

    상당한 양의 데미지가 연속으로 들어왔다.

    HP가 거의 70% 가까이 뭉텅 증발해 버렸다.

    “하하하하하! 어떠냐! 꽤나 아플 거다!”

    방철우는 나를 날려 보낸 뒤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마지막이었다.

    꾸욱-

    나는 방철우의 머리에 난 뿔을 콱 움켜쥐었다.

    “...어?”

    방철우의 표정이 순간 급변했다.

    녀석은 나에게 닿은 몸을 빼내려 발버둥쳤지만, 나는 이미 두 건틀릿으로 방철우의 몸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힘 대 힘.

    상대가 황소라고 해도 소용없다.

    A+아이템으로 무장하고 있는 내가 밀릴 리가 없으니까.

    “등짝. 등짝을 보자.”

    나는 방철우의 뒷통수를 힘으로 꾹 눌러 강제로 무릎 꿇렸다.

    HP 바에 표시된 데미지의 양, 방철우의 돌격 폼, 궤도, 걸린 시간.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연산된다.

    마치 음식에 들어간 재료를 맞추는 미식가처럼.

    “...으음.”

    나는 눈을 감은 채 방철우가 장비하고 있는 아이템들의 스탯과 특성들을 분간해 냈다.

    “나에게 데미지를 준 건 도끼에 붙은 ‘땅토막’ 특성이로군. 갑옷에는 ‘돌격대’ 특성이 붙었고. 어디보자, 신발에는 ‘물소질주’ 특성. 장갑에는 ‘와류’인가.”

    내 말에 블랙 옥스 방철우의 입이 떡 벌어진다.

    “그, 그걸 어떻게?”

    나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긴. 다 옛날에 한번씩 써봤던 아이템이니까 알지.’

    ‘땅토막’: ‘지진’ 특성의 하위호환으로 1:1에서 많이 쓰이는 특성이다.

    정면으로 돌진해 땅을 토막토막 갈라버릴 정도의 충격을 주는 기술.

    ‘돌격대’: 상대방의 공격을 못 피하는 대신 자기의 공격을 무조건 명중시키는 특성.

    아마도 아까 돌진 궤도를 급격하게 바꿀 수 있게 해준 특성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물소질주’: 한번 타깃을 정하고 돌격할 시 속도와 물리공격력을 두 배로 올려주는 특성. 단 이 경우 회피율이 50% 감소하게 된다.

    ‘와류’: 다들 알다시피 주변 지형에 소용돌이를 만들어 상대방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마동왕 모드일 때 애용하는 특성이기도 하다.

    한번 맞아보기를 잘했다.

    ‘나도 한때 이런 아이템들을 착용하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지.’

    간만에 추억과 향수에 젖을 수 있어서 좋았다.

    “뎀린이 시절이 그립구만.”

    나는 끌끌 웃으며 방철우의 머리에 난 소뿔을 움켜잡았다.

    뚝!

    결국, 내 힘을 견디지 못한 두 개의 물소 뿔이 부러지고 말았다.

    “크윽!?”

    방철우는 파손된 아이템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또다시 나를 향해 절대 피할 수 없는 공격을 감행한다.

    “죽어라아아아아!”

    물소질주!

    나의 HP를 한 방에 70% 가까이 날려버렸던 공격!

    또다시 방철우의 도끼가 허공을 토막내며 날아든다.

    하지만.

    “아직도 덤빌 생각인 호구, 아니 흑우 없제?”

    나는 방철우의 도끼를 향해 주먹을 마주 내밀었다.

    콰콰쾅!

    요란한 충격과 함께, 방철우의 도끼가 산산조각났다.

    따따딱!

    백전노장 특성으로 인해 단단해진 내 피부에 도끼 파편들이 닿아 튕겨나갔다.

    “헉!?”

    방어구도 무기도 모두 박살나버린 방철우.

    강력한 물리공격력과 물리방어력만으로 한국 랭킹 10위권의 벽을 뚫은 그가 언제 이런 꼴을 당해 봤겠는가?

    그런 그에게, 나는 씩 웃어주었다.

    “이제 흑우가 아니라 말랑카우로군.”

    동시에, 나는 방철우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방철우는 현재 ‘돌격대’ 특성과 ‘물소질주’ 특성의 부작용으로 인해 회피율이 0에 가까운 상태.

    고로 내 주먹은 100%의 데미지로 방철우의 안면을 두들길 수 있다.

    쾅! 콰쾅!

    주먹은 몇 번인가 날았지만, 방철우는 두 대를 채 버티지 못했다.

    한 대 맞았을 때 안면이 으스러졌고 두 대 맞았을 때 머리통이 수박처럼 박살났다.

    이윽고 나는 헛주먹질을 멈추었다.

    “마블링 좋네.”

    그리고 머리가 사라져버린 방철우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츠츠츠츠츠...

    내 얼굴을 덮은 흰 마스크에 붉은 피가 스며든다.

    -띠링!

    <‘피카레스크 마스크’가 붉게 물듭니다.>

    <연쇄살인 리스트에 1명이 추가 기록되었습니다>

    <기본 공격력이 영구히 +1 상승합니다>

    귓가에 들리는 알림음을 들으며, 나는 짧게 말했다.

    “다음.”

    .

    .

    .

    블랙 옥스 방철우의 다음으로 나온 이는 최번개라는 이름을 가진 궁수였다.

    “히히. 히히히히.”

    그는 단단한 암반 대지에 나온 뒤부터 나를 보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

    나는 표정을 찡그렸다.

    최번개, 저 녀석은 랭킹에 등록되지 않아 언랭으로 분류되는 이다.

    그는 ‘매드독’에 가입한 첫 프로게이머이며 가장 이 팀의 콘셉트에 어울리는 선수였다.

    현재의 관중들은 그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을 터이지만, 나는 그의 미래를 알기에 지금의 스타일 역시도 알고 있었다.

    ‘럴커(lurker)’

    이것이 나중에 그에게 붙게 될 별명이다.

    ‘그런 별명이 붙게 된 이유는...’

    내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파사사사사삭-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최번개는 두 손에 낀 장갑을 이용해 놀라운 속도로 땅을 파내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무른 유문암 대지에 구멍이 뻥 뚫렸다.

    꾸드드드득-

    발밑에서 들려오는 소리.

    최번개는 그새 상당히 깊은 곳까지 파고 내려간 듯싶었다.

    그리고.

    푸슉!

    나의 발밑에서 뾰족한 가시가 튀어오른다.

    그것은 바로 화살이었다!

    “참, 실제로 보니 무지하게 기괴하네.”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던전 두더지의 장갑’이라는 C+급 아이템에 붙은 ‘구멍파기’ 특성을 이용하면 지면을 손쉽게 파내려갈 수 있다.

    물론 단단한 암반지대에서는 땅을 파는 것이 불가능하니 ‘바싹 마른 반지’ 라는 B급 아이템에 붙은 ‘가뭄’ 특성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샌드웜의 ‘가뭄’ 특성과 같은 능력이지만 그 힘은 천지차이다)

    그리고 땅굴을 파고 들어간 뒤, ‘관통’ 특성과 ‘개무시’ 특성이 붙은 쇠뇌를 이용해 지상으로 화살을 날려 보내는 것이다.

    여러 특성 효과가 중첩된 화살은 두터운 지층을 뚫고 올라와 상대방의 발바닥을 찌르게 된다.

    상대방이 움직이는 것은 ‘진동감지 수염’이라는 C급 아이템의 효과로 알 수 있을 테지.

    땅 밑에 숨어 관통 화살을 날리는 궁수라니, 상당히 기괴한 특성들의 콜라보레이션이다.

    일반적인 랭커들 같았으면 어찌 상대해야 할지 몰라 쩔쩔맸겠지만.

    ...나는 아니다.

    콰쾅!

    나는 발을 굴러 주변에 불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손을 바닥에 내고 지진과 와류를 동시에 시전 했다.

    우지지지지지직-

    주변의 지형이 통째로 급변한다.

    용암이 흘러내리다 굳어 만들어진 유문암 대지는 다시끔 용암으로 되돌아간다.

    거기에 소용돌이와 지진파가 사납게 날뛰자, 대지는 순식간에 불지옥으로 변해 끓어오른다.

    그러나.

    펑! 퍼펑!

    용암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화살 세례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마 최번개는 나의 지진이 닿지 않는 저 땅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간 모양이다.

    [히-히히히히히! 소용없다! 여기까지는 네 공격도 안 닿아!]

    땅 밑에서 최번개가 소리 지르는 게 들린다.

    녀석은 지하를 이리저리 파고 다니며 내 발밑을 향해 관통 화살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쾅! 콰쾅!

    나는 계속해서 주먹으로 지면을 치고 있었다.

    “‘죽음부름 협곡’의 유문암 대지라면 좌표가 약 36.2217N, 126.7126E...그렇다면 여기가 1번 포인트. 좌측 3시 방향으로 16미터 이동 후 2번 포인트. 3번 포인트는 거기서 30미터 앞...4번 포인트...5번...6번...7번...16번 포인트는...”

    입이 혼자서 중얼중얼거리는 동안, 내 주먹은 계속해서 땅을 때린다.

    이윽고.

    딱!

    내가 16번째로 지면을 향해 주먹을 내리찍는 순간.

    우르르르릉...!

    엄청난 지진이 일어 온 대지를 뒤흔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일으킨 지진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지진이었다.

    그 갑작스러운 자연재해에 전용진 캐스터마저 깜짝 놀라 외칠 정도였다.

    [아! 이게 무슨 일인가요!? 갑자기 맵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뭐죠 이거? 마동왕 선수가 뭔가 한 것 같은데요!?]

    [대체 뭘까요!? 제가 다 무섭네요!]

    캐스터들이 놀라 해설도 제대로 못 하고 있을 때.

    콰-콰콰콰콰콰쾅!

    일이 터졌다.

    유문암 대지 곳곳이 쩍 소리와 함께 갈라지며, 그 안에서 펄펄 끓는 생 용암이 터져 나온 것이다.

    펑! 퍼펑! 펑! 펑! 퍼퍼펑! 펑! 펑! 펑! 퍼펑! 펑! 펑! 퍼펑! 펑! 펑! 퍼펑! 퍼퍼펑!

    땅에 균열이 생기며, 지하에 잠들어 있던 16개의 휴화산이 일제히 마그마를 분출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내가 땅을 툭툭 치며 돌아다닌 것은 땅 밑 깊숙이 잠들어 있는 16개 휴화산의 폭발점(爆發點)을 건드리기 위함이었다.

    자극에 눈을 뜬 휴화산들은 일제히 화산활동을 시작했고 지하는 그야말로 마그마가 날뛰는 지옥 불구덩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히-이이이이이익!]

    당연하게도, 땅 밑 깊숙한 곳을 기어 다니던 최번개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5분 52초라.”

    나는 한바탕 난리가 난 협곡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피라미 셋을 잡는 데 걸린 시간이 얼추 6분. 예상 범위 안이다.

    ‘슬슬 관객들이 질려하겠군,’

    나는 스크린 밖의 시선을 느꼈다.

    빨리 끝낼 수 있는 거 괜히 분량 늘리며 질질 끈다는 욕이 나오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좀 더 서둘러야겠다.’

    이러다가 반쯤 남기고 온 코코아가 식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한 일이 아니겠나?

    나는 협곡 끝에서 대기하고 있는 ‘매드독’ 멤버들을 향해 손짓했다.

    “다음. 빨리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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