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70화 (170/1,000)
  • 170화 국내리그 정복 (4)

    풍전등화(風前燈火), 백척간두(百尺竿頭), 사면초가(四面楚歌), 누란지세(累卵之勢), 누란지위(累卵之危), 진퇴양난(進退兩難), 낭패불감(狼狽不堪), 초미지급(焦眉之急), 명재경각(命在頃刻), 진퇴유곡(進退維谷), 고립무원(孤立無援), 내우외환(內憂外患)...

    탁-

    나는 반쯤 마신 종이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예상대로, ‘국K-1’ 팀에 위기가 찾아왔다.

    아군 전원이 쓰러진 시점.

    이제부터는 내 차례다.

    ‘플레이오프에서는 첫 출전이네.’

    그동안 다른 녀석들이 분발해 주었기에 편히 버스를 타고 왔다.

    말은 하지 않지만, 다들 2박 3일간의 계속된 전투로 심적으로 많이 지쳐있을 것이다.

    그래서 김정은에게 더욱 더 쉽게 패한 것도 있겠지.

    ‘한 번 정도는 버스요금을 낼 때도 됐네.’

    아무리 상징적 토템이라고 해도, 연봉 값은 해야 할 것 아닌가?

    스윽-

    내가 소파에서 일어나자.

    호다닥-

    마태강과 이연호가 재빨리 내가 내려놓은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내가 치울게.”

    “아냐, 내가 치울 거야.”

    대기하고 있는 2군 선수들도 있건만, 둘은 또 쓸데없는 걸로 티격태격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런 둘에게 손사래를 쳤다.

    “거기 그냥 둬.”

    그러자 마태강과 이연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아, 식을까봐서.”

    “새로 뽑아 놓을게요, 형님.”

    그 둘의 충성경쟁을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롭다.

    전생에서는 내가 감히 말도 못 붙여봤을 정도로 고고한 존재들이었는데.

    그래서일까?

    나는 그들의 수발을 받기가 부담스러워 온건히 거절했다.

    “됐어. 식기 전에 올 거야.”

    하지만.

    내 거절의 메시지는 그들에게 조금 다르게 전달된 것 같다.

    ‘역시!’

    마태강과 이연호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내왔다.

    무한한 존경과 신뢰가 깃들어있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을 보내는 것은 그 둘 뿐만이 아니었다.

    엄재영 감독, 실질적 주장 임요셉, 1군 로스터 송병건, 최연석.

    그리고 수행을 쌓기 위해 참관을 온 다른 1군, 2군, 3군 멤버들이 모두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보통 코코아 반 컵이 식기에 걸리는 시간은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상대편 랭커 5명을 역올킬하고 돌아오겠다고 한다면 다들 미친 소리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그 미친 소리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가끔은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바로 지금처럼.

    ‘되게 부담스럽네 이거.’

    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지만 가면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내.

    정상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자욱한 드라이아이스 증기 너머로 뿌연 조명불빛이 보인다.

    관중들의 환호 소리, 응원봉들이 팡팡 부딪치는 소리. 곳곳에서 들려오는 나의 이름.

    대패가 덜 밀려 까끌까끌한 세트장 뒤의 각목 냄새, 포스터에 묻은 접착제 냄새, 바닥의 락스 냄새.

    언제 보고 듣고 맡아도 가슴이 설레는 풍경이다.

    나는 계단을 올라 무대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캡슐로 향했다.

    마치 왕좌처럼 디자인 되어있는 캡슐.

    저 반대편 무대의 캡슐에는 김정은이 앉아있다.

    무대의 상수와 하수 중앙에서 우리 둘의 시선이 한 데 얽혀들었다.

    생긋-

    김정은은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

    미녀의 미소는 보통 환영하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나는 인상을 가볍게 찌푸렸다.

    저 여자는 반드시 여기서 꺾어놔야 한다.

    단순히 팀의 운명이 걸려있는 경기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슨 이유인가 하면...’

    그때.

    “좋은 게임 해요~”

    김정은의 목소리가 나의 상념을 방해했다.

    “...”

    내가 고개를 들자, 그녀는 나를 향해 곰살맞게 웃어보였다.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는 있지만, 보는 눈들이 많으니 그건 좀 힘들겠고.

    “넵 GG.”

    나는 대충 대꾸를 해 주고는 캡슐에 앉아 핼멧을 뒤집어썼다.

    이윽고.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나는 유문암 대지에 두 발을 딛게 되었다.

    ‘죽음부름 협곡’

    이번 맵은 단단한 암반지대다.

    물결이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무늬가 새겨진 지면은 온통 검고 단단하다.

    황무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꼭대기에는 온통 회색의 재들이 눈처럼 덮여있었다.

    마른 바람이 불 때마다 잿가루가 흩날린다.

    여기저기서 돌조각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보자.”

    내가 앞으로 펼쳐질 5번의 싸움을 떠올리며 머릿속에 시뮬라르크를 만들고 있을 때.

    “날씨가 좋죠?”

    김정은이 말을 걸어왔다.

    용암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모양새 그대로 굳어 형성된 대지 ‘죽음부름 협곡’

    높은 곳에서 흘러와 나를 부르는 김정은의 목소리는 이 맵의 이름과 퍽 잘 어울린다.

    “응.”

    나는 별 생각 없이 대충 대꾸했다.

    그러자, 김정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말을 이어갔다.

    “배틀로얄 때 활약 보고 팬 됐어요. 닉네임이 마돈왕 맞나요?”

    “마돈왕이 아니라 마동왕.”

    내가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순간.

    김정은의 표정이 급변했다.

    마치 먹이를 잡아채기 직전의 사마귀처럼, 그녀는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걸려들었군!’이라고 외치고 있는 표정으로.

    스팟-

    블링크를 써 순식간에 내 뒤로 나가온 김정은.

    “죽어라!”

    그녀는 이내 4서클의 철계마법 ‘아이언 피스트’를 써 내 뒤통수를 노린다.

    깡공격력이 가장 높은 철계 마법, 그 중에서도 묵직한 한방 데미지가 일품인 아이언 피스트.

    ‘좋은 선택이네.’

    근거리라면 마공, 물공의 구분 없이 무조건 공격력의 절대수치가 높은 공격이 유리하다.

    때문에 강철 타입의 필살기를 선택한 김정은의 전략은 베스트라고 할 수 있겠다.

    ‘상대가 나만 아니었다면 말이지.’

    우지지지지직-

    나는 땅에서 솟구친 강철 주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정확히는 강철 주먹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강철 주먹의 ‘그림자’를 바라본 것이지만.

    ‘아이언 피스트의 넓이는 약 9.9m², 그림자의 각도와 변화폭으로 보면 내 뒤통수 정중앙을 향해 약 44.64km의 속도로 접근해 오고 있군.’

    속도와 크기, 위치를 아는데 못 피할 이유가 없다.

    그 복잡한 메두사의 공격도 눈 감고 피해냈던 내가 아닌가?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아이언 피스트를 0.01mm의 차이로 피해버렸다.

    스팟-

    단단하고 무거운 물체가 내 머리카락 몇 가닥을 스치고 지나간다.

    목에 서늘하게 와 닿는 바람.

    동시에.

    나는 뒤로 180도 빙글 돌아 백스핀 블로우를 날렸다.

    뻐억!

    내 주먹 손등이 김정은의 높은 콧대를 사정없이 뭉개 놓았다.

    물리적으로.

    “...?”

    김정은은 코피를 빵 터트리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뒤로 8미터 정도를 날아가 커다란 바위 밑동에 거꾸로 처박혔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이빨 몇 개가 돌바닥에 떨어져 경사로로 떼구르르 굴러간다.

    “???”

    그녀는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한 것 같다.

    이내.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김정은은 코를 감싸 쥐고 비명을 질렀다.

    게임 몰입도를 높게 설정해 둔 탓일까? 고통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귀찮아 죽겠네 정말.”

    나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코코아가 식기 전에 다섯 판의 게임을 끝내려면 서둘러야 한다.

    뻐억!

    나는 또다시 주먹을 들어 김정은의 안면을 후려갈겼다.

    반사 데미지가 조금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지옥바퀴 대왕게’를 잡고 얻은 ‘백전노장’ 특성으로 커버 가능하다.

    ‘백전노장’

    ↳맞으면 맞을수록 단단하고 질겨집니다. 마치 수많은 사선을 넘어온 늙은 군인의 심장처럼.

    맞으면 맞을수록 방어력이 올라가는 변태 특성 덕분에, 나는 부담 없이 주먹을 내지를 수 있다.

    “꺄아악! 너 뭐야! 왜 연령마법이 안 통해!?”

    김정은은 혼란스러운 기색이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생물’

    ↳태고 시절부터 살아온 존재들은 늘 묵직하게,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킵니다.

    나는 크라켄을 잡고 얻은 ‘고생물’ 특성 탓에 정신계 마법에 어마어마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뻑! 뻑! 뻐억! 퍽! 우직!

    나는 묵묵히, 성실하게, 꾸준히, 차근차근 적을 쥐어팬다.

    김정은은 혼미해져가는 정신 속에서도 계속 ‘왜?’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황당하네 정말. 이런 실력으로 리그에 나왔단 말야? 아무리 초창기라고 해도 수준이 영...’

    나는 김정은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신계 마법?

    말이 좋아 정신계 마법이지 사실 눈속임 몇 개를 귀찮은 패시브 특성과 섞어 타이밍 좋게 쓰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대격변 이후에 등장하는 어둠 계열 몬스터들이 쓰는 정신계 마법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지만, 기껏해야 지금 얘가 쓰는 정신계 마법은 그야말로 풋내기 수준.

    변칙으로 약간의 성과를 거둘 수는 있겠지만 단지 그뿐이다.

    실제로도 15년 전, 국K-1이 정신계 메타에 진 것은 이번 한 번 뿐.

    그 뒤부터는 정신계 마법사 메타에 대한 공략이 너무도 많이 발견되어 리그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도 없게끔 된다.

    ‘정신계 메타 마법사는 레벨이 30만 넘어도 뒷받침할 장비가 없어지는 망캐지.’

    나는 김정은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후반에 가면 좋은 메타지만, 그 후반까지 가는 길이 너무도 멀고 험해서 대부분 중간에 게임을 접거나 캐릭터를 다시 키우곤 한다.

    또한 초반부 아이템과 후반부 아이템 트리를 잇는 중간 수준의 아이템이 없다는 것도 치명적이었다.

    애초에 대격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5클래스 이상의 마법서는 떨어지지 않는다.

    김정은은 아마 초반에는 변칙 메타로 선전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차츰차츰 정공법으로 캐릭터를 육성하는 이들에게 밀려날 것이다.

    참으로 휘발적인 메타.

    어떻게 보면 안쓰러운 존재지만...

    ‘그래도 너는 동정이 안 간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김정은.

    이 여자는 나와는 구면이다.

    예전에 도플갱어의 숲에서 그녀의 도플갱어를 한번 본 적이 있었다.

    ‘핵쟁이.’

    매크로, 핵, 버그를 유용하는 나쁜 플레이어.

    한때 게임 개발자이자 능력있는 GM이었던 그녀가 왜 회사에서 잘리게 되었는지 나는 안다.

    자동사냥, 돈 복사, 에임핵 등등...

    그녀는 게임에 치명적인 악성 프로그램을 돌려 개인의 이득을 취했다.

    10년쯤 뒤에는 그 악명이 너무 널리 퍼져서 지명수배까지 당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이 여자 하나 때문에 환율이 출렁거릴 정도였지 아마?’

    그 때문에 나도 꽤나 피해를 봤다.

    하필이면 내가 가진 돈을 다 털어 현질을 한 다음 날 사건이 대서특필되는 바람에 엄청난 손해를 봤었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내가 사랑하는 게임을 망겜으로 만들려는 여자를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여기서 싹을 뽑아놔야겠다.’

    나는 미래의 전도유망한 핵쟁이인 김정은을 가혹할 정도로 두들겨 팼다.

    “한반도 비핵화!”

    내가 빽 소리치는 동시에.

    삑-

    김정은의 HP가 0이 되었다.

    보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관객들이 지르는 어마무시한 함성, 그리고 국K-1멤버들이 보내는 신뢰의 눈빛.

    나는 김정은을 깔끔하게 리타이어 시킨 뒤 협곡 너머를 향해 손짓했다.

    “다음”

    작가의 말: 화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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