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57화 (157/1,000)
  • 157화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 (1)

    D데이가 밝았다.

    용산 E스포츠 스타디움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경기 당 관람객 수가 가장 많았던 것은 챌린지리그였지만, 총 관람객 수로 따지면 베스트리그가 훨씬 많았다.

    각 지방에서 지역 팀을 응원하기 위해 원정 응원을 오기 때문이었다.

    온라인으로 좌석 예매가 모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 앞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경기장 밖에서라도 자기 연고지 팀을 응원하고 싶은 열정 탓이다.

    이내.

    부우웅-

    인파가 갈라지며, 몇 대의 벤이 들어온다.

    우-와아아아아!

    팬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벤에서 선수들이 나왔다.

    오늘 단체전을 치를 50명의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입성한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중 하나였다.

    ‘사람 엄청 많네.’

    나는 몰려든 팬들을 보고 조금 놀랐다.

    먼 옛날, 나는 저 팬들 무리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위치가 꽤나 많이 달라졌다.

    경호업체 직원들이 만든 라인 사이로 걸어가고 있을 때.

    “하나! 둘! 셋!”

    “마동왕 파이팅!”

    “사! 랑! 해! 요! 마! 동! 왕!”

    “우! 윳! 빛! 깔! 마! 동! 왕!”

    “꺄아아아아아아아악!”

    팬들 사이에서 거대한 함성 소리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으음, 누군지 안 봐도 알겠다.

    고개를 돌리자, 맨 앞 열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유다희와 그 뒤로 쭉 늘어선 마교인들이 보인다.

    내가 그쪽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자.

    “꺄악! 마왕님이 나를 보셨어!”

    “너를 보신 게 아니라 나를 보신 거야!”

    “기억할게!”

    “오빠아아아아! 여기도 한번만 봐주세요!”

    마교인들 사이에서 일제히 소란이 일었다.

    의외로 마교인들은 남녀 성비가 반반씩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여기 모여든 팬들 중 나의 팬클럽만큼 인원수가 많고 열정적인 집단이 또 없다.

    많은 선수들이 그런 나를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바탕 소란이 있은 뒤 경기장 안에 들어오자.

    “마왕님!”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자 마교 교주 유다희가 숨이 찬 듯 헐떡거리며 서 있었다. 나를 따라 가드 라인을 넘어온 듯했다.

    그녀 역시 고위 랭커였기에 VIP 초대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 애초에 저기 팬들하고 같이 섞여있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런 나의 의문에 대답하려는 듯, 유다희는 밝게 웃어 보였다.

    “다른 팬 분들이랑 함께 있느라 밖에 서 있었어요.”

    유다희는 유리문 밖, 다른 마교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참, 이럴 때 보면 의외로 배려심이 있는 사람 같기도 하고.

    예전에 나를 비롯한 호구들을 이용해 먹고 버릴 때와는 너무나도 극명한 온도 차이다.

    이내, 유다희는 내게 말했다.

    “제가 교주님을 찾아온 이유는… 비밀 정보를 하나 알려 드리기 위해서에요.”

    비밀 정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다희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상대방의 아이템 트리만 보고 특성이나 스킬을 판단하시면 안 돼요. 이 게임에는 ‘호칭’으로 인한 특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제가 이걸 어떻게 알게 되었냐면… 저…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어쩌다 보니 S급 몬스터를… 즈, 증거도 보여 드릴 수 있…”

    뭔가 했더니 그거였나.

    유다희는 크라켄을 잡고 얻은 호칭과 그로 인한 ‘고생물’ 특성을 내게 알리러 온 것이다.

    턱-

    나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한번 쓰다듬었다.

    “그거라면 이미 알고 있으니 됐어.”

    “…네?”

    이내, 유다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계, 계정 정보를 넘겨 드리지도 않았는데 제 말을 믿어주시는 거예요?”

    “응. 믿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다희의 눈가가 갑자기 촉촉해졌다.

    “어른들 중에 제 말을 바로 믿어준 사람은 처음이에요.”

    어른이라니, 나는 지금의 유다희와 1살 밖에는 차이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득,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내가 원래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임요셉 역시도 나의 말투나 행동을 보고 자연스럽게 형님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하긴 속은 36살이니…’

    나는 유다희에게 적당한 격려를 남기고 돌아섰다.

    “제 말을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마왕님 파이팅!”

    그녀의 활기찬 응원소리가 경기장 내부 홀 안에 메아리친다.

    *       *       *

    경기장 안에 들어오자 각양각색의 선수들이 보인다.

    대부분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선수들의 얼굴을 쭉 둘러보며 생각했다.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언젠가 모 전 대통령이 비리로 인해 구속되기 전, 검사들을 둘러보며 했던 말.

    나는 지금 주변 랭커들을 둘러보며 똑같은 대사를 친다.

    누구는 날쌘 몸놀림이 특기인 선수.

    누구는 단단한 방어력이 특기인 선수.

    누구는 변칙적인 스타일이 특기인 선수.

    누구는 강력한 한방 공격력이 특기인 선수.

    누구는 기상천외한 마법 조합이 특기인 선수.

    .

    .

    모든 선수들의 아이템, 스킬 트리가 전부 내 머릿속에 있다.

    심지어 공략법까지도!

    ‘예상대로네.’

    나는 선수들의 엔트리를 쭉 훝어보며 생각했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 지식대로, 배틀로얄 그라운드제로에 출전한 선수들 중에서는 서포트 타입의 유저가 거의 없었다.

    맵에 무작위로 떨어지는데다가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이다 보니 1군에 있던 서포터들이 전부 엔트리에서 제외된 모양이다.

    ‘하긴 초반 생존만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가니, 힐러나 버퍼를 내보내기는 부담스럽겠지.’

    베스트리그는 거의 공식이 정해져 있다.

    1라운드에는 자생이 불가능한 서포트 유저들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딜러 위주의 엔트리가 중요.

    2라운드에서는 상대 팀의 조합을 알고 상대하는 게 중요하다. 서포트의 적절 배치가 키 포인트.

    3라운드에서는 자기 팀의 등수에 따라 조합이 변경된다. 1등이면 2, 3등의 싸움을 보고 조합을 결정해도 되는 일이고 2등이면 1, 3등을 3등이면 1, 2등을 신경 쓰면 된다.

    이윽고.

    [곧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수들은 모두 캡슐에 착석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용진 사회자의 멘트가 울려 퍼진다.

    이내.

    [자! 그럼 제1회 ‘뎀’ 프로리그! 경기! 시작하겠습니드아아!]

    우렁찬 오프닝 멘트와 함께 시작되었다.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       *       *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접속음과 동시에, 나는 주최측에서 내 우편함으로 발송한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었다.

    위잉-

    이윽고, 나는 오늘의 생존장소로 이동되었다.

    내가 이동된 곳은 낯익은 장소.

    바로 ‘악의 고성’이었다.

    예전에 어둠 대왕 솔로몬을 처치했던 곳이다.

    ‘맞아. 1회 베스트리그가 악의 고성에서 개최되었었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커먼 계곡 위에 우뚝 솟아있는 낡은 고성(古城).

    성벽은 거대한 시체처럼 늘어져 있다.

    닳고 무너진 성가퀴들이 노인의 이처럼 드문드문 올라서 있었다.

    낙엽이 부패해 축축해진 흙 위에는 음산한 폐가들이 즐비하다.

    한때는 번성했던 이 마을은 온통 썩어 문드러지고 오로지 거미줄과 물안개만이 빽빽하게 꼈다.

    하지만.

    원래 이 마을을 배회해야 하는 언데드 몬스터들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대회 시작 전, 주최측에 의해 이미 깔끔하게 정리된 탓이다.

    ‘문드러진 자’ ‘오물 자루’ 같이 늘 보이던 몬스터들이 사라지자 마을은 더욱 더 괴기스러워 보인다.

    “사일런트 힐 생각나네.”

    오래 전에 본 공포영화를 떠올리며, 나는 텅 빈 골목길로 들어갔다.

    달그락- 삐걱-

    폐가 하나의 문을 열자,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나무문이 열린다.

    “오? 럭키.”

    나는 폐가의 문을 열자마자 선반 구석에 보이는 포션 한 병을 발견했다.

    주최 측은 폐가 곳곳에 이렇게 도움이 될 만한 소모성 아이템들을 숨겨 놓는다.

    대회에서 자기가 차고 있는 장구류 외에 따로 준비한 소모성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이렇게 주최 측에서 랜덤으로 뿌리는 보급품은 예외다.

    “파밍 성공.”

    나는 포션 한 병을 허리춤에 찼다.

    인벤토리는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 어디보자. 나를 다구리 치러 오겠지? 오면 언제쯤 오려나?”

    나는 폐가의 지붕으로 올라가 반쯤 썩은 굴뚝에 올라앉았다.

    “…….”

    한동안 폐가에 낀 음산한 물안개를 주시하고 있자니…….

    “흐암.”

    하품이 나온다.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바로 그때.

    콰쾅!

    어디선가 폭음이 들려왔다.

    [1:1로 붙자 이것들아!]

    [좋아, 몇이든 간에 덤벼 봐!]

    저 멀리서 임요셉과 마태강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오? 이걸 보니 분명 국K-1 다구리가 시작된 모양인데?

    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굴뚝에 앉아 곧 습격해 올 다른 팀 선수들을 기다렸다.

    …….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한테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개똥벌레. 어쩔 수 없네~”

    노래를 부르며 내 위치를 알리기도 해 보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다.

    “???”

    나는 무료함을 참을 수 없을 지경까지 가 버렸다.

    ‘뭐지?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하나?’

    슬슬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지이잉-

    이내 내 시야가 빨갛게 물들었다.

    ‘적색지대(red zone)’

    선수들이 싸움을 안 하고 건물 안에만 숨어 있을 경우를 대비한 경고 같은 것이다.

    적색지대로 설정되면 주변 건물이나 거리 등 모든 것들이 죄다 빨갛게 물든다.

    이 안에서 1분 안에 탈출하지 못하면 주최 측 마법사들이 먼 곳에서 발동시키는 대규모 텔레포트 마법에 휘말리게 되고 그대로 악의 고성 밖으로 소환되어 장외패를 겪게 된다.

    “귀찮게 됐네.”

    나는 적색지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골목과 골목 사이를 달리자, 이내 저 앞에 멀쩡한 색을 가진 폐가들이 보인다.

    적색지대를 탈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로 그때.

    “…오?”

    나는 달리던 걸음을 멈춰 섰다.

    그냥 지나칠 뻔한 골목에서 다른 사람들을 본 것이다.

    칼을 든 남자 하나와 철퇴를 든 여자.

    총 세 명의 플레이어를 발견했다.

    나는 재빨리 그들 셋의 신상을 스캔했다.

    ‘충남 팀 ‘블루스컬’의 멤버들이군. 운 좋게 같은 곳에 3명이 떨어졌나?’

    첫 번째 남자는 블루스컬의 메인 딜러 유한방, 강력한 한 방 데미지가 특기인 칼잡이다.

    두 번째 남자는 블루스컬의 탱커 오달진, 말 그대로 방어력이 오달진 녀석이다.

    세 번째 여자는 블루스컬의 원딜 장보람, 공격 속도는 느리지만 강력한 한 방기를 쓰는 궁수다.

    세 명 조합이 상당히 좋다.

    근딜과 원딜, 탱커까지 구비된 파티.

    “좋아. 재밌겠군.”

    시작부터 꽤나 거친 승부가 되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나는 팔뚝을 걷어붙이며 앞으로 나섰다.

    …….

    …한데?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남자 둘, 여자 하나.

    이 파티는 나를 보더니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으며 냅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

    나는 어이가 없어 멍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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