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55화 (155/1,000)
  • 155화 폭풍전야 (3)

    “……세상에.”

    나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셀 수도 없이 많은 택배상자들이었다.

    작게는 내 머리통만한 상자부터 시작해 내 몸 전체가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로 큰 상자들이 문 앞에 그득그득 쌓여 있었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택배 기사님이 녹초가 된 표정으로 끌차를 밀고 가시는 게 보인다.

    혹시나 동영상을 노린 강도가 아닐까 의심했던 것이 죄송스럽다. 나는 입을 열어 외쳤다.

    “기사님!”

    그러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에게 내가 마시던 건강 쥬스를 내밀었다.

    “날도 더운데 주스 한 잔 드시고 가셔요.”

    “어휴, 이거 고맙습…….”

    그는 모자를 벗으며 다가오다가 내가 내민 컵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다.

    “아, 그런데 제가 액체 알레르기가 있어서. 마음만 받을게요. 고맙습니다.”

    정중한 거절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다소 시무룩한 표정을 지은 채 컵을 회수했다.

    “맛은 없어도 영양은 풍부한데.”

    나는 특제 건강주스 대신 물 대신 먹는 블루베리즙 한 병을 건네주었다.

    그제야 내 선의(善意)는 정상적으로 전달된다.

    이내.

    십 수 개의 택배 상자들이 오피스텔 거실에 가득 쌓였다.

    “뭐가 이렇게 많아?”

    나는 택배상자를 하나하나 뜯으며 투덜거렸다.

    놀랍게도, 택배 상자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은 내 인터넷 방송 채널에 걸려 있는 광고업체들이 보내온 것들이었다.

    연초를 맞아, 광고 계약을 연장한 기념으로, 새로운 PPL을 요구하기 위해서, 협찬, 사은품, 증정품, 신제품 테스트 제품 등등…….

    갖가지 명목으로 온 물건들이 한꺼번에 쌓인 것이었다.

    “어디 물류센터에 쌓였다가 한방에 온 건가?”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몇몇 제품들의 냉동 포장이 멀쩡하게 잘 유지되고 있었으니까.

    우선 컴퓨터와 모니터, 키보드, 스피커, 마우스 등등의 물건들이 방에 수북하게 쌓였다.

    “음, 이것들을 사용해서 방송을 하라 이거로군.”

    뭐,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

    알아서 최신형 전자제품을 보내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바스락-

    보장지를 뜯자, 게이밍 마우스들이 30개 정도 더 들어 있었다.

    ‘뭐지? 나를 지네로 아는 건가?’

    나는 동봉된 편지를 읽어 보았다.

    “아아, 방송하면서 경품으로 걸라고? 별걸 다 신경 써 주네.”

    안 그래도 시청자들에게 가끔 이벤트를 할 예정이다.

    그때 상품으로 뭘 걸지 고민중이었는데, 이런 거면 나쁘지 않겠다.

    광고 업체 입장에서도 적은 비용으로 큰 마케팅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니 윈윈이 아닌가?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을 한 업체들이 꽤 많은 듯했다.

    박스 안에는 냉동 닭가슴살부터 시작해 블루베리, 영양제, 흑마늘 진액, 사과와 배, 김, 햄 세트, 책상형 히터, 선풍기, 인공눈물, 술이 들어간 초콜릿, 달팽이 영양크림 등 온갖 잡다한 것들이 그득그득 차 있다.

    나는 식재료들은 전부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전자제품은 전부 안 쓰는 방에 쌓아 두고 의약제품은 캡슐 옆에 비치해 둔다.

    그러자 남는 것은 화장품 등의 뷰티 제품들.

    “……음, 이런 것들은 딱히 쓸 데가 없는데.”

    광고 수주가 들어와서 채널의 한 공간을 허가했을 뿐이다.

    내가 딱히 화장품에 관심이 있는 것도,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라서 이런 선물을 받아 봐야 어디 쓸 데도…….

    “유다희나 가져다 줄까? 팬클럽 활동도 열심히 하니…….”

    문득 생각을 해 보았지만, 기각이다.

    유다희에게 화장품 선물을 주려면 마동왕 계정으로 행동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마동왕의 방송 채널에는 화장품 광고가 걸려 있지 않다.

    이 화장품 회사는 오직 고인물 계정에만 광고 수주를 맡긴 상태니까, 조금이라도 의심 살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

    그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래. 솔이 주면 되겠네.”

    부반장 윤솔.

    마침 녀석이 뷰티 방송을 하지 않나?

    화장품들을 주면 개인적으로 쓸 수도 있고, 또 방송으로 리뷰도 할 수 있고 좋겠지.

    나는 핸드폰을 꺼내 윤솔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뚜르르르…….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바쁜가?”

    나는 소파에 주저앉아 TV를 켰다. 그리고 계속 윤솔이 전화를 받기를 기다렸다.

    ……한데?

    “어!?”

    나는 채널을 돌리다 말고 리모콘을 내려놓았다.

    TV의 한 채널이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이다.

    화면 속에는 낯익은 얼굴이 떠 있었다.

    윤솔.

    그녀가 TV에 나오고 있다!

    <2021 뷰스타 특집! 인기 스트리머 ‘부반장’ 님을 만나다!>

    화면 좌측 상단에는 작은 글씨 네 개가 떠 있다.

    •LIVE

    아하, 그래서 전화를 못 받고 있었군?

    나는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TV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내, 윤솔은 수줍은 표정을 지은 채 화면에 대고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뷰티 크리에이터 부반장입니다.]

    그러자, 테이블 반대편에 있는 MC들이 윤솔을 마구 띄워 준다.

    [요즘 뷰티 크리에이터로 맹활약 중이신데, 부반장님 방송 보고 인생이 달라졌다는 분들이 꽤 많아요.]

    [아휴, 정말 영광이에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다들 열심히 노력하신 덕분이죠.]

    윤솔은 시종일관 겸손한 태도로 방송을 이어 나간다.

    방송은 대부분 미용 전반에 관한 것들이었다.

    여자 연예인들도 몰랐을 만한 화장 팁을 준다거나, 화장품 제품 별로 장단점을 비교한다거나, 시청자들이 제보한 고민 상담을 해 준다거나 하는 식이다.

    뾰루지, 네일, 머릿결에 관련한 것이 여자 출연자들의 주요 관심사.

    남자 출연자들의 관심사는 비교적 심플했다.

    탈모 예방법이 그것이다.

    윤솔은 그 모든 질문들에 성의껏 답변해 나갔다.

    그러자. 이내 짖궂은 MC한 명이 윤솔에게 묻는다.

    [아니 멘트가 이렇게 자연스러우시네. 일반인 수준이 아닌데요 거의?]

    [어휴,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방송에서 진짜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을 타입이세요. 아니, 우리 솔직해집시다, 부반장 씨.]

    그는 윤솔을 향해 장난스럽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방송 하셔서 얼마 버십니까?]

    약간 분위기가 싸해질 수도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 MC의 콘셉트가 워낙에 깐족대는 이미지이다 보니 분위기는 그냥저냥 유쾌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자, 윤솔은 난처한 듯 미소지었다.

    [그, 그냥 일반 회사원 분들 연봉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그러자, 주변 MC들이 일제히 야유했다.

    [에에에에이~ 무슨 뻥을 그렇게!]

    [겸손이 너무 지나치시당!]

    [나 알아! 지금 일반 회사원들 연봉을 월급으로 받는다는 거 맞죠?]

    MC들이 놀리자 윤솔의 얼굴은 화다닥 달아오른다.

    애초에 대본 자체가 조금 짓궂게 짜인 것 같지만, 사실 인터넷 방송 스트리머들이 돈을 잘 번다고 광고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예능이니만큼 당연한 쇼다.

    요즘 인기 인터넷 방송 스트리머들이 엄청난 수익을 가져간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거나 불편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갈수록 더해질 거야. 인방의 세계는 아직도 확장 중이니까.”

    나는 2035년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도 인터넷 방송 판은 점점 커지고 있지만, 15년 뒤에는 더더욱 커진다.

    지금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둔 초반 선두주자들은 그때가 되면 어마어마한 권위와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중간에 치명적인 구설수에 오르거나 사기를 당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뭐, 스캔들만 조심하면 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순간!

    MC하나가 윤솔에게 묘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부반장 님이 스트리머 생활을 하기 전에 많은 도움을 받은 분이 있었다고…….]

    보아하니 대본 상에 있는 질문이다.

    윤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했다.

    [네, 제가 어려울 때 방송장비까지 내주면서 저를 응원해 주었던 친구가 있어요. 제게는 정말 잊지 못할 은인이죠.]

    [남자인가요?]

    [……네. 헤헤.]

    [애인?]

    [아뇨! 아뇨! 아뇨! 아뇨!]

    […뭘 네 번씩이나 부정해요? -와 –가 붙으면 +니까, 두 번 긍정하신 건가, 지금?]

    세트장의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놀리는 분위기가 된다.

    [이거 완전 키다리 아저씨네!]

    [너무 로맨틱하다, 낭만적이야!]

    [중학생 때 소꿉친구가 훌쩍 자라서 나타나 도와준 거 아냐!]

    MC들은 노골적으로 윤솔과 키다리 아저씨 사이에 로맨스 각을 잡는다.

    그리고……

    그 키다리 아저씨는 당연하게도 나다.

    “어휴, 저 바보.”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말았다.

    스캔들만 조심하면 된다는 말을 하자마자 이렇게 되다니.

    하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윤솔이 MC들의 질문에 조곤조곤 대답했기 때문이다.

    [에이, 이렇게 되면 그 친구에게 실례죠. 그 친구는 저에게 아무런 감정 없어요. 자기 할 일에만 열심히 매진하는 친구인걸요. 한낱 저 때문에 괜한 구설수에 오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아앗! 그렇다면 부반장 님 쪽에서는 감정이 있으시다는!?]

    [……그건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윤솔의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태도에 MC들은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이내, 윤솔이 시청자들에게 배꼽인사를 하는 것으로 방송이 마무리되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언제나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는…적은 돈으로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최대로 뿜어낼 수 있게 도와드리…앞으로도 열심히 하겠…감사합니…….]

    BJ나 스트리머들이 늘상 하는 진부한 멘트, 하지만 윤솔이 하니까 뭔가 진정성이 느껴진다.

    “허, 게임이랑 전혀 상관없는 걸로 시간 다 잡아먹었네.”

    나는 황당한 마음으로 TV와 시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 했다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훅 갔다냐?

    TV에 윤솔이 나오는 것을 보니 바쁜 것도 깜빡 잊어버렸다.

    “이거, 시청자들에게 좀 미안한데…….”

    내 게임 관련 콘텐츠를 기다리고 있을 이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느껴진다.

    “프로답지 못했어.”

    나는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자책했다.

    그리고 이내 내 본업인 ‘게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그 순간.

    지이이잉-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번호를 보니 ‘국K-1’ 팀의 엄재영 감독이다.

    “오, 마침 전화하려 했는데 어찌 알고.”

    나는 핸드폰의 음성변조 어플을 켰다.

    이내, 통화가 연결된다.

    [마왕아!]

    엄재영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딘가 잔뜩 흥분해 있는 목소리.

    그 흔한 인사치레도 없었다.

    그는 나에게 바로 용건을 꺼내 놓았다.

    [베스트리그 날짜 잡혔다!]

    10도 리그의 2차 대회가 결정된 모양이다.

    오뚝이배 프로리그.

    제 1회 리그인 만큼 어마어마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PK 대회.

    나는 1차 대회인 챌린지리그에 나가 서울 대표 경합에서 팀 ‘엘리트즈’를 꺾고 베스트리그 진출 자격을 손에 넣은 바 있다.

    꾸욱-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고인물 메타로 심해를 누빌 때도 좋았지만, 사실 고인물 메타는 적에게 맞지 않고 쇽쇽 피해다니는 메타이니 만큼 가끔 답답할 때도 있다.

    반면.

    프로리그에서 활약하는 마동왕은 어떤가?

    퍽퍽 쥐어 터지면서도 퍽퍽 쥐어 패는, 그야말로 피와 살점, 뼛조각이 난무하는 데스매치.

    나는 이런 마초적인 싸움 역시도 좋아한다.

    ‘안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지.’

    심해에서 얻은 아이템들을 마음껏 쓸 기회가 왔다.

    ‘왕좌를 너무 오래 비워 뒀었지?’

    나는 엄재영의 전화를 끊은 채 소파에서 일어났다.

    초반에는 너무 무리하지 않게 살살.

    음, 적당히 ‘한국 랭킹 1위’ 타이틀 정도만 목에 걸어 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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