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폭풍전야 (2)
철썩-
높게 속구치는 파도와 함께.
쿵!
악마의 만찬 호는 북대륙 얼음해변에 정박했다.
[욧호호이! 그럼 잘들 가라구!]
치 카이는 우리를 향해 선장모를 흔들어 배웅했다.
그리고 언제 움직였냐는 듯, 다시 차가운 시체로 돌아가 버렸다.
“…….”
나는 북대륙의 얼음산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바람, 맑은 공기, 서리에 닿아 금빛으로 부서지는 햇살.
드디어 육지로 돌아왔다.
기나긴 심해 탐험이 끝나고 육지의 공기를 마시자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
늘 어두침침하던 공간에서 숨죽이고 살다가 밝은 태양을 보니 뭔가 죄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한다.
심해 히키코모리 생활도 이젠 청산이다.
그때.
타탁!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
고개를 돌리자, 뱃전에서 떨어져내린 유다희가 빙판에 착지하는 게 보인다.
그녀는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곧바로 설원을 향해 걸어갔다.
작별인사 따위는 없었다.
나는 유다희의 등에 대고 외쳤다.
“어이, 혼자 돌아갈 수 있겠어? 설산 꽤 험한데, 같이 넘지?”
그러자.
유다희는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중지를 세워 보인다.
‘흥. 꺼져. 그거 한번 같이 싸웠다고 동료가 된 줄 알아? 착각 따윈 그만두라고’
실제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뭐 이런 느낌의 의도가 전해져 오는데… 대충 맞겠지?
나는 유다희가 혼자서 꿋꿋하게 설산을 넘는 걸 보며 피식 웃었다.
옛날 같았으면 나를 이용해먹을 생각으로 접근해 아양을 떨며 산을 같이 넘자고 꼬셨겠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정말 진심으로 내가 싫은가 보다.
‘그래, 저게 유다희의 진짜 모습이겠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다가가길 원했을 때에는 알 수 없었던 그녀의 진짜 모습이 멀어지는 순간부터 조금씩,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그게 다 뭔 소용이랴?
나는 유다희에게서 신경을 꺼 버렸다.
그리고 드레이크에게 말했다.
“한동안은 접속하기 힘들 거야.”
“네가? 별일이군.”
드레이크는 딱히 이유를 듣지 않고도 순순히 납득했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내게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아서 좋다.
게임에서 같이 다닐 때도, 정말로 궁금한 경우가 아니면 잠자코 따라오는 편이다.
게임 밖, 현실의 정보를 캐묻는 일은 일절 없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드는 파트너이기도 하다.
“그럼 나는 한동안 솔로잉을 하겠다. 너를 따라가려면 더 부단히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어디에서 플레이하게?”
“서대륙의 정글이나 동대륙의 사막을 돌아볼까 한다. 남대륙의 유적지도 괜찮고, 북대륙의 설산을 다시 한 번 도는 것도 좋겠지.”
“결국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겠다는 말이네.”
뭐 나쁘지 않다.
솔직히 크라켄 레이드까지는 어찌어찌 함께했다고 하더라도, 앞으로의 단계는 그에겐 조금 버거울 수도 있다.
물론. PVP랭킹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될 드레이크의 힘이 미진하다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은 그런 드레이크조차 힘겨워할 정도로 험난한 여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드레이크에게 말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최소한 레벨 40은 만들어 놔. 안 그러면 레이드 못 데리고 가.”
“…으음.”
드레이크는 자신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우리는 굳은 악수를 한번 나눴다.
그리고 로그아웃을 알리는 환한 빛무리가 나를 감싼다.
* * *
-띠링!
[로그아웃 하셨습니다.]
[다음에 또 와 주세요.]
귓가에 들려오는 알림음과 함께, 나는 캡슐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끙.”
장시간 게임을 하면 꼭 이렇게 어깨가 결린다.
고오급 캡슐을 썼는데도 이렇다.
꼬르륵-
누워만 있었는데도 배가 고프다.
나는 부엌으로 가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들을 대강 믹서기 안에 때려 넣었다.
블루베리, 닭가슴살, 발효된 콩, 양배추, 우유, 김치, 알약으로 된 영양제 몇 알…….
키이이이잉-
믹서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나는 숨을 참은 뒤 걸쭉한 액체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김치 맛밖에 안 나네…….’
영양만점 맛빵점 식사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조금 더 강해진 것 같기도 하고)
장시간의 레이드를 끝냈으니 조금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지 않느냐, 할 수 있겠지만…….
사실 나는 레이드를 끝낸 직후에 제일 바쁘다.
그동안의 영상을 편집, 업로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막 입히고, 더빙 하고, 요건 편집, 요것도 편집, 이것도 짤라내고… 앗, 여기에는 신상정보가 드러나 있네? 빼고, 이것도 마동왕이랑 컨셉 겹치는 부분이니 자르고, 이것도 몇 개월 뒤면 논란 생기는 부분이니 삭제하고, 여기서 다시 더빙 한번 입히고, 여기에는 영어 자막 넣고, 이쯤에서 BGM 한번 깔아 주고…….”
꽤 오랜 시간동안 공들여 만지자, 이내 괜찮은 작품이 완성되었다.
어지간한 영화 트레일러 영상 같은 퀄리티.
클릭을 해 보면 정말로 웅장하고 장엄한, 그러면서도 위트 있고 훈훈한, 무엇보다도 박진감 넘치고 신비로운 게임 영상들이 재생된다.
그렇게 만든 동영상이 총 12개.
나는 각종 인터넷 방송 플랫폼, 그리고 SNS, 커뮤니티 등지에 내 동영상들을 쫙 뿌렸다.
아니나 다를까.
5분도 되지 않아 조회수는 미친 듯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와!!고인물 횽 공략 영상 올라왔다!!!
-고인물 차냥해!!!
-믿고 보는 고인물ㅋㅋㅋㅋ
-와 미쳤네;;;;북대륙 공략 클라스
-그저ㄷㄷㄷA+급 보스몹...
-씨어데블 궁 피하는 포즈 봐ㅋㅋㅋ쇼생크 탈출인줄
-진짜 이분 뭐하시는 분임? 너무 궁금함
-고인물 님 정체 아시는 분 없음?
-게임 관계자 아님? 말이 안되는 플레이인데?
⤷GM도 저렇게는 못해요ㅋㅋㅋ게임 AI가 독자적으로 개발, 점검, 운영되는 시스템이라~
⤷ㅇㅇ데엑마는 GM이 개입 못하게 되어있고 설정 짠 사람들도 다 세분화되어있어서 서로 다 알지도 못하고 애초에 공유도 못하게 되어있음.
.
.
댓글들이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 이쯤 되면 거의 채팅하는 수준.
후원금, 도네이션도 엄청나게 들어온다.
플랫폼 곳곳에서 후원금 레이스가 심심치 않게 펼쳐지고 있었다.
방송이 시작될 때 나오는 광고의 클릭 수당(SKIP 버튼 클릭 수당 포함) 역시도 어마어마했다.
“이쯤 되면 유튜뷰에서도 반응이 있겠지.”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예전 유튜뷰 연말 시상식에서 유튜뷰 코리아의 대표 박수한이 했던 말이 있다.
[어진 씨는 올해의 유튜뷰 초신성 50인에 선정되셨습니다. 2020년 기준 겜방 부문에서 ‘시청자 수 1위’와 ‘상승세 1위’를 동시에 기록하셨죠. 전 분야 시청자수에서도 매달 꾸준히 10위권 안에 랭크 중이시고요. 거의 전례가 없는 기록입니다. 그래서 저희 측에서는 이어진 님에게 보상과 더불어 ‘상당한 특전’을 드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유튜뷰 코리아의 새로운 도전이기도 합니다.]
길고 장황하지만, 요약하자면 결국 ‘특전’을 주겠다는 말.
이는 곧 내 제안을 수용하겠다는 뜻이다.
내 제안은 간단했다.
유튜뷰의 뎀 프로팀 창단, 그리고 나를 감독으로 기용해 달라는 것.
단지 그뿐이다.
당시 박수한 대표는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내 제안을 수락했었다.
하지만. 나는 박수한 대표가 했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당연히 공수표였겠지?”
으레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은 빈말을 잘 하기 마련이다.
당장 앉은 자리에서 싫은 소리를 할 수 없으니 적당히 웃어넘기며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을 질질 끌거나 서면으로 딴소리를 늘어놓는 등이 대부분이다.
“그럴까 봐 준비했어.”
나는 급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구독자 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자, 이것이 성과다.
이제는 빈말도 딴소리도 못하겠지.
일부러 어느 인터넷 방송 플랫폼과도 독점 계약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야 토토나 아이템 경매를 통해 얼마든지 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
“유튜뷰 말고도 에이프리카, 포도트리, 네버캐스트, 팥TV… 독점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곳은 많지.”
나는 유튜뷰 말고도 여러 플랫폼에 같은 ‘제안’을 넣어 놓은 상태였다.
이 중 제일 먼저 내 아이디어를 무는 쪽은 어디일까?
아마 그쪽이 가장 시장 트렌드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난 곳일 것이다.
그때.
우우우우웅-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유튜뷰 게임 콘텐츠팀 송승우 팀장>
물었다.
역시 유튜뷰가 빠르긴 빠르군.
부우웅- 부우웅- 부우웅- 부웅-
송승우 팀장의 전화 위로, 부재중 통화를 알리는 문자 메시지들이 줄지어 뜬다.
부재중 통화 1건- <에이프리카 게임방송팀 김철현 부장>
부재중 통화 2건- <포도트리 게임 콘텐츠팀 지대진 팀장>
부재중 통화 3건- <팥TV 게임 크리에이티브 팀 조영인 이사>
부재중 통화 4건- <네버캐스트 디지털 콘텐츠팀 김태경 차장>
부재중 통화 5건- <트위티TV 게임...>
부재중 통화 6건- <......>
부재중 통화 7건- <...>
.
.
하지만.
나는 일부러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몸값 좀 올려야지.”
밀당의 기본이 뭔가? 연락을 씹는 것 아니겠는가? 원래 아쉬운 놈이 목 타기 마련이다.
다만.
전화는 받지 않았어도 ‘누가 먼저 부재중 통화 기록을 찍어 놓았는지’만은 염두에 두었다.
제안한 조건이 모든 곳에서 통과되었을 때, 이 순서가 계약을 가르는 키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때.
“…음!”
나는 영상을 편집하던 것을 잠시 멈췄다.
내가 켜 놓은 녹화영상 속에는 거대한 괴수가 포효하고 있었다.
[우… 우우우우… 우우우…….]
크라켄.
대심해를 지배하는 S급 몬스터.
“흠.”
나는 잠시 고민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S급 몬스터 사냥 영상은 두 개.
하나는 ‘용옥의 고문기술자’, 다른 하나는 지금 이 ‘크라켄’이다.
“S급 몹 레이드 영상은 아직 풀 때가 아니야.”
나는 이 두 몬스터의 영상은 외장하드 깊은 곳에 묻어 두었다.
“이것들이 나중에 빅 딜(big deal)을 위한 열쇠가 되겠지.”
이게 무슨 소리냐고?
…….
이 말을 이해하려면 15년 뒤의 인방 시장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자극적인 동영상들이 범람하는 2035년의 세상.
대중들은 더욱 더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동영상들을 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은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몇몇 엄청나게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동영상은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는 게 아니라 아주 일부의 셀럽(celeb)들에게만 비밀리에 공개된다고.
때문에. 몇몇 동영상들은 수많은 개인들에게 공개되어 후원금이나 시청료를 받는 게 아니라 어마어마한 부나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소유’된다는 것이다.
셀럽들은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그 동영상을 보고 즐기거나, 혹은 소장하거나, 혹은 거래하거나, 혹은 자신에게 생긴 다른 이슈를 덮는 데 사용한다.
유명 연예인들의 스캔들, 혹은 잔혹한 스너프 필름 등이 좋은 예이다.
권력자와 언론사, 연예인, 기업인, 예술가들에 의해 공유되는 이 ‘셀럽 동영상’들은 찌라시만 무성할 뿐 절대로 대중들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그리고 뒷세계에서 은밀하게 떠돌며 종종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곤 하는 것이다.
“나는 S급 몬스터 레이드 동영상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데 말이지.”
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먼 미래, S급 몬스터를 잡는 영상 하나가 한 중국 기업인에 의해 공개된다.
그는 게임 출시 후 4년 정도가 되었을 때 이 영상을 입수했고 그로부터 2년 뒤, 자기 아들의 성추행 스캔들을 덮기 위해 이 동영상을 터트렸었다.
이 사실은 한 정의감 넘치는 게임지 기자에 의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때 대중들에게 공개된 동영상의 가격을 떠올리면…….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들이 무색해질 정도네.”
나는 모니터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 동영상들의 가치는 책정불가능.
고로 아직은 공개하지 않고 보류한다.
내가 막 외장하드에 동영상을 백업하는 순간.
-띵동!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뭐지?”
나는 오피스텔 현관으로 나서서 인터폰을 들었다.
“누구세요?”
내가 사는 오피스텔은 보안이 너무나도 확실한 곳. 수상한 사람이 왔을 리 없다.
아니나 다를까.
[택배입니다.]
늘 듣던 멘트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이상하다.
‘나는 뭘 주문한 적이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최근에 뭔가를 산 적이 없다.
‘혹시 영상을 본 팬들이 뭔가를 보냈나?’
하지만 영상은 방금 올렸다.
애초에 팬들이 내 집 주소를 알 리도 없고.
“문 앞에 놔주시겠어요? 지금 나가기가 힘들어서.”
내가 말하자, 택배는 그냥 현관에 놓였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나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세상에.”
나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현관문 앞을 꽉 막아버릴 정도로 많은 택배상자들이었다.
…이거 문은 어떻게 열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