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가장 깊은 곳의 왕 (6)
“5…4…3…2…1.”
카운트 다운.
내 혀끝이 윗니 뒷면에 닿는 순간.
쿠-구구구구궁!
엄청난 굉음이 맵 전체를 뒤흔들었다.
-띠링!
<12시간이 경과하였습니다>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최초 방문자: 고인물)’가 뒤집어집니다>
시계 따위는 볼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계산대로.
“뒤로 빠져!”
나는 잽싸게 앞으로 뛰어가 드레이크와 유다희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우르릉… 콰콰쾅!
수백 톤은 될 법한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이 그들이 방금 전까지 서 있었던 곳에 떨어져 내렸다.
철썩!
당연히 그곳은 바닷물에 침수되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뒤로 빠졌다.
촤아아아아아악!
바다 밑에 잠겨 있었던 유빙이 해수면 위로 상승하며 새로운 육지가 만들어진다!
크라켄이 파괴한 구역은 물에 잠기고 그간 물속에 온전하게 보존되어있던 유빙들이 육지가 되었다.
새로운 발판이 생긴 셈이다.
“…세상에! 격변 타이밍을 어떻게 알았나? 시계도 안 보는 것 같던데!”
“...!”
드레이크가 놀란 표정으로 묻는다.
유다희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다.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가 12시간 마다 섬의 위, 아래가 바뀐다는 것은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렇게도 절묘한 타이밍에 이루어질 줄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섬이 뒤집어지기 1분쯤 전에 바닥이 떨리는 순간이 오는데 그 타이밍을 발바닥으로 감지하면 돼.”
그러자 유다희가 어이없다는 듯 반박했다.
“아니, 저 대괴수들이 쾅쾅 난리를 치고 있는데 그 진동을 어떻게 구분해!?”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당연히 구분이 되지. 비유하자면 디젤 엔진하고 가솔린 엔진하고의 진동수 차이랄까? 섬 내부에 있는 크랭크가 1회전을 할 때 발생하는 진동은 대망자들이 만들어 내는 진동에 비해 훨씬 더 압축비가 작고 가벼운데다가 빠르기까지 하지. 이 차이를 kgm/s² 단위로 제대로 설명하려면…”
“…됐다.”
유다희는 내 말을 10%도 채 듣지 않은 채 이해를 포기했다.
한편.
촤아아아악-
유빙이 뒤집어지자, 유빙을 단단히 휘감고 있던 크라켄의 8번 촉수 역시도 확 잡아당겨진다.
우…우우우우!
크라켄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왔다.
쿠-웅!
철썩!
커다란 파도가 몰아치며, 크라켄은 유빙에게 업어치기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결국.
콰쾅!
크라켄은 바다 밖으로 딸려와 단단한 얼음섬 위로 내팽개쳐지는 신세가 되었다.
얼음섬이 뒤집어지며 크라켄을 등에 업다시피 하게 된 것이다.
[우-워어어어억!]
[카-아아아아악!]
크라켄의 촉수에 나포되어 있던 대망자들이 포효를 내지른다.
유빙이 뒤집어지며 새로운 발판이 생겨났다!
우우…우우우…….
크라켄은 난데없이 육지 위로 끌려오게 되어 당황한 듯싶다.
서둘러 촉수를 움직여 바다로 들어가려 했지만…….
꽈악!
콰긱!
근력 하나만큼은 S급 몬스터에게 뒤지지 않는 대망자들이 그걸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우드드드드득!
대망자들은 단단한 빙판에 발을 디딘 채 엄청난 힘으로 크라켄을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전세가 역전되었다!
휘이이이잉-
심지어 눈보라까지 몰아치고 있었다.
1초마다 최대 체력의 0.01%를 깎아먹는 가혹한 지형 데미지!
쩌저저적-
크라켄의 몸을 적시고 있던 바닷물과 섬의 새로운 면을 적시고 있던 바닷물이 동시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젖은 몸은 빙판에 닿아 더욱 더 단단하게 변했다.
거대한 몸은 느려지고 또 둔해진다.
충격을 받아도 반쯤 흘려보내곤 하던 연한 살점은 이내 얼어붙은 뒤 쩍쩍 깨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우…….
크라켄에게는 설상가상(雪上加霜).
말 그대로 눈 위에 서리가 덮이는 꼴이다.
젖은 몸으로 얼음섬에 달라붙어 눈보라를 맞으니 몸이 제대로 움직일 리가 없다.
심해의 환경과 이곳의 기후는 너무나도 다르니까.
크라켄은 이내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다.
뿌지지직!
그리고 섬의 빙판에 눌러 붙은 8번 촉수를 떼어냈다.
그 도중에 수많은 살점이 떨어져 나갔지만 별 수 없었다.
크라켄은 만신창이가 된 두 개의 촉수를 들어 두 마리의 대망자를 휘감아 조인다.
으드드드드득-
섬도 바스러트려버리는 조이기!
크라켄은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두 마리의 대망자를 한꺼번에 상대하고 있었다.
우우…우우우……
[크-오오오오오오!]
크라켄과 대망자들의 한판 승부!
크라켄은 S급 몬스터.
기본적으로 바다에서는 당할 자가 없는 대괴수(大怪獸).
이 세계관의 심해 몬스터 랭킹 을 따졌을 때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하지만 수많은 난관을 거치며, 놈은 약해지고 또 약해졌다.
게다가 지금은 육지 위까지 끌려와 얼어붙어 가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대망자들의 공격 세례까지 받고 있다.
하지만.
대망자들의 상태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우득- 우드득- 우득!
크라켄의 무시무시한 조르기에 의해, 굵고 단단한 뼈마디에는 점점 균열이 심해진다.
대망자 특유의 탈(脫) A+급 근력과 압도적인 HP로 버티고는 있었지만, 크라켄이 먼저 갈지 대망자들이 먼저 갈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 상태.
콰쾅! 퍼퍼퍼펑!
격렬하게 몰아치는 풍랑. 사방으로 나부끼는 지진과 해일.
얼음섬은 또다시 격변을 겪는다.
쩌억- 쩍-
빙판에는 깊은 크레바스가 생겼다. 산이란 산, 언덕이란 언덕은 죄다 무너져 내렸다.
얼음굴에서 기어 나오는 해골들은 전부 파도에 휩쓸려가거나 지진파에 맞아 바스러진다.
대괴수들의 싸움에 끼어들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었다.
“으, 으아아아…….”
유다희는 지면에 발도 못 붙이고 그저 납작 엎드려 있을 뿐이다.
눈을 꼭 감은 채로.
드레이크 역시도 격동하는 지면에서 튕겨져 나가지 않고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
오로지 나.
나 혼자만이 붕괴하는 얼음섬의 중앙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
‘…고작 이런 걸로 놀라면 곤란한데.’
나는 유다희와 드레이크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나중에 내가 일으킬 대격변, 그리고 그 이후에 펼쳐질 수많은 몬스터들의 약육강식 도살극을 보면 기절하겠구만.
‘머지않았는데 말이야.’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은 훗날 펼쳐질 몬스터들의 처절한 생존경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바로 그때.
[그-워어어억!]
요란한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대망자들이 내지른 것이었다.
쿵-
두 마리의 대망자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몸은 바닥에 쓰러지지 않았다.
오직 머리통만.
우득- 우득- 우드드득-
크라켄은 만신창이가 된 촉수로 두 마리의 대망자를 여전히 조이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조였는지 몸통은 이미 으스러져 가루 비슷하게 변했고 머리통만 몸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졌을 정도였다.
후두두둑. 쿠쿵-
대망자 두 구가 모두 리타이어(retire)되었다.
과연 S급의 장벽은 높았다.
“역시 크라켄. 대단하구나.”
나는 박수를 쳤다.
우우우…….
크라켄은 얼어붙은 눈알을 굴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 역시도 고개를 들어 그런 크라켄을 올려다본다.
이제 숨겨 놓은 패도 없다.
8개의 함대도, 해저왕 플라튠도, 해저도시의 근위대도, 심해 특성의 봉인도, 함선 화약고의 연쇄 폭발도, 마트료시카의 해골병도, 대망자도, 육지의 눈보라도.
써먹을 수 있는 패는 전부 써먹었다.
“…….”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크라켄의 HP를 어림짐작 해 보았다.
‘…각이다!’
정면돌파(正面突破)의 때가 왔다.
차앙-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대망자두 구를 등진 채로, 나는 깎단을 손에 들었다.
발동할 수 있는 특성은 모두 발동했다.
‘능지처참’ ‘맹독’ ‘가뭄’ ‘마찰계수’ ‘패륜아’ ‘혈액포식자’ ‘앙버팀’ ‘백전노장’ ‘마나 번’
모든 특성을 몸에 두른 채, 나는 크라켄을 향해 달려들었다.
<크라켄> -등급: S / 특성: 고생물, 심해, 지진, 풍랑, 틈, 나포
-서식지: 블루홀 ‘밑바닥’
-크기: ?m.
-빛도 어둠도 없던 시절에 살던 태고의 생물.
심해의 망자.
가장 깊은 곳의 왕.
용과 악마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는 존재.
지배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살아남은 유일종.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눈알, 나는 그것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다이브했다.
우드드득-
잘려 나갔던 짧은 촉수들이 마지막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움직였다.
얼어붙은 촉수들이 기괴한 모양새로 나를 향해 뻗어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그것을 피해 달려가 크라켄의 외눈에 깎단을 깊이 찔렀다.
푸욱!
짧은 소음.
크라켄의 눈동자 정중앙에 송곳이 박혔다.
…….
크라켄은 잠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
나는 눈을 부릅뜬 채 크라켄의 눈알을 노려보고 있었다.
날 리 없는 식은땀 한 줄기가 등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주륵-
내가 깎단으로 찌른 곳에서, 시커먼 먹물 한 줄기가 새어나왔다.
눈동자의 검은 물이 빠지는 것이리라.
이내.
쫄쫄쫄쫄쫄쫄쫄쫄-
파란 물과 검은 물이 뒤섞여 흐르기 시작했다.
푸쉬시시식…….
크라켄의 눈알은 놀라운 속도로 푸석해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말라 가는 눈알, 눈에 습기가 사라지자 안구 표면에 비닐처럼 주름이 진다.
이내, 크라켄의 눈은 물이 가 버렸다.
탁하게 퍼진 그 눈에서는 더 이상 요사스러운 광채가 나지 않게끔 되었다.
꾸국-
나는 크라켄이 힘을 잃은 뒤에도 한참 동안 깎단에 준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
원래 두족류는 죽은 것처럼 보여도 한참 동안 살아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조금의 방심도 하지 않은 채 적의 고동(鼓動)을 살핀다.
이윽고.
콰쾅!
축 늘어지는가 싶었던 여덟 촉수가 갑자기 꿈틀하더니 나를 옥죄여 온다.
나는 숨을 참고 씨어데블의 점액을 몸에 둘렀다.
그리고 좁혀 오는 촉수들의 틈 사이를 높이뛰기 장대 넘듯 등으로 뛰어넘었다.
꼼장어의 점액처럼 미끌거리고 또 끈적한 나의 몸뚱이를 수많은 빨판들이 스쳐 지나갔다.
첨벙!
얼음바닥에 착지하자 얕은 물소리가 들린다.
죄다 박살난 얼음섬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심지어 크라켄의 육중한 몸뚱이가 위에 올라와 있으니 가라앉는 것이 당연하다.
천천히 물이 차오르는 얼음바닥.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앞에 있는 거대한 시체를 바라보았다.
여덟 개의 촉수는 방금 마지막 힘을 짜내 움직였고 이내 그 힘마저 잃은 채 바닥에 쓰러졌다.
쿵-
바닥을 옅게 울리는 지진.
동시에.
알림음이 떴다.
-띠링!
<세계 최초로 ‘크라켄’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레이드 랭킹 집계 중…>
<1위. ‘고인 물’ ‘드레이크 캣’ ‘YouDie’ / 0데스 0기브업 / 91시간 3분 21초>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크라켄이 죽었습니다. 그가 부활할 때까지 북대륙엔 밀물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크라켄이 죽었습니다. 그가 부활할 때까지 북대륙엔 풍랑이 일지 않습니다>
<크라켄이 죽었습니다. 그가 부활할 때까지 북대륙엔 심해생물들이 출현하지 않습니다>
<심해를 지배하는 두 대왕이 ‘고인 물’ 님 에게 관심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