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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49화 (149/1,000)
  • 149화 가장 깊은 곳의 왕 (4)

    ‘해볼 만하겠는데?’

    단순히 HP뿐만 아니라 힘, 속도, 마력, 지능 등 모든 스텟이 50%로 줄어든 크라켄 정도라면 정말로 붙어 볼 만하다.

    게다가 놈은 이곳까지 오며 무수히 많은 NPC들에게 데미지를 입어오지 않았나!

    “심지어, 아직 비장의 무기도 남아있고 말이야.”

    나는 눈을 들어 크라켄의 촉수에 끼워져 있는 7척의 배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비장의 무기?”

    드레이크와 유다희는 나를 돌아본다.

    나는 대답 대신 손가락을 들어 크라켄의 일곱 다리를 가리켰다.

    거함선(巨艦船).

    아틀란둠의 무적함대가 크라켄의 촉수 끝에 장갑처럼 끼워져 있다.

    그 광경만 해도 충분히 압도적이지만, 더 큰 문제는 함선들이 예전의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끼리릭-

    배 안에서 어떤 복잡하고 정교한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함대 내부에 있는 수백 문의 대포는 분명히 이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콰콰콰쾅!

    이윽고, 함선들은 우리를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

    “대포도 조종할 줄 알아!? 난이도 미쳤구만!”

    유다희는 날아드는 포탄을 피해 잽싸게 슬라이딩을 했다.

    포탄의 위력은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그간 수없이 쏴 봤지 않나?

    하지만.

    “으아아! 화력이 이렇게 셌던가!?”

    아군이 쏘는 것을 지켜볼 때와 직접 표적이 되어 노려질 때는 그 체감 위력에 확 차이가 난다.

    하늘에서 수없이 내리꽂히는 불벼락!

    콰콰콰콰쾅!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진동!

    섬이 거세게 요동친다.

    얼음산과 빙벽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바로 우리의 역습 포인트다!

    “함선을 노려!”

    나는 날아드는 다리를 피해 크라켄의 몸통을 타올랐다.

    씨어데블의 신발은 계속해서 끈적이는 점액을 내뿜고 있다.

    때문에 나는 숨만 참으면 벽이든 천장이든 마음대로 타오를 수 있었다.

    타타타탁-

    나는 계속해서 크라켄의 촉수를 타고 내달렸다.

    분화구처럼 솟구친 빨판들의 사이는 마치 미궁처럼 복잡한 길을 만들고 있었다.

    거대한 빨판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한참 동안을 달리자, 이내 첫 번째 거함선이 보였다.

    쾅!

    나는 함선의 벽을 타올라 갑판 바닥의 뚜껑을 열었다.

    “으윽!”

    뚜껑을 열자마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광경을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다.

    꾸물- 꾸물- 꾸물- 꾸물-

    배 안의 모든 공간에 문어다리가 꽉 차 있다.

    톱날 이빨이 빼곡하게 달린 빨판들이 섬세하게 움직여 대포를 조종하고 있었다.

    해저인들이 없어도 함포 사격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젠장!”

    나는 전면에 꽉 차 있는 문어다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화약 냄새와 비린내가 뒤섞여 진동을 한다.

    물컹하고 축축하고 끈적한, 하여튼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불쾌함.

    다행스럽게도, 전에 치렀던 함대와의 해전 때문인지 촉수의 끝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많았다.

    하나같이들 다 포탄이 뚫어 놓은 살구멍이다.

    나는 그 살구멍들이 만든 너덜너덜한 틈을 비집고 함선의 하단 선창으로 내려갔다.

    이내 선창 바닥에 가득 쌓인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케이.”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창고에 가득 쌓여 있는 것은  바로 쇠돌기와 화약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많이 적재되어 있던 두 개의 아이템.

    치이익-

    나는 선창 내부의 화약고에 긴 도화선을 연결한 뒤 불을 붙였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잽싸게 바다로 뛰어내렸다.

    콰쾅!

    다른 촉수가 나를 공격했지만, 이미 어디를 노릴지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그저 또 다른 촉수로 건너갈 기회가 생긴 것에 불과했다.

    타타타탁-

    나는 1촉수, 2촉수, 3촉수, 4촉수를 넘나들며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크라켄의 촉수 끝에 끼워져 있는 함선 내부로 들어가 화약고에 불을 당기는 것이다.

    “우리도 끝났어!”

    저 멀리서 드레이크와 유다희가 손을 흔든다.

    드레이크는 총 2개의 촉수에, 유다희는 한 개의 촉수에 도화선을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일곱 개의 화약고에 모두 불이 당겨졌다.

    나는 가만히 지켜보면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빵!”

    이윽고.

    콰콰콰콰콰콰쾅!

    무시무시한 폭음과 함께, 크라켄의 일곱 촉수가 모조리 폭발해 버렸다.

    피피피피피피피핑-

    뿌직! 뿌직! 뿌지지직!

    함선 내부에 적재되어 있던 무수히 많은 쇠돌기들이 크라켄의 몸을 세열한다.

    마치 수류탄의 파편처럼, 그것들은 크라켄의 전신에 골고루 박혀들었다.

    그 모습을 본 유다희가 흥분에 겨워 외쳤다.

    “꺄아악! 대박이다! 이걸 위한 큰그림이었구나!”

    그동안 7번의 레이드에서 고의로 패배했던 성과가 지금 나오기 시작한다!

    우…오오오…오오……

    크라켄은 꽤나 큰 데미지를 입은 듯 비틀거렸다.

    순식간에 여덟 촉수 중 일곱 촉수가 갈가리 찢겨졌다.

    그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은 쇠돌기들이 놈의 거대한 전신에 박혀 버렸다.

    덩치가 하도 커서 광역 데미지를 1:1 데미지처럼 입는 크라켄의 위엄이다.

    이윽고 녀석의 몸이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마치 바다 전체가 기울어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철-썩!

    크라켄은 폭발의 반동으로 수면에 잠시 드러누웠다.

    하지만.

    기우뚱-

    놈은 결코 완전히 넘어지지 않았다.

    8번째 촉수가 아직 건재했기 때문이다.

    놈은 그것으로 얼음섬을 칭칭 휘감아 버틴다.

    쿠-구구구구…….

    크라켄의 몸무게를 버티지 못한 얼음섬이 반쯤은 물에 잠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다희가 처음에 이끌었던 1함선, 그것은 화약고 안에 화약이 충분하지 않았다.

    아귀메기와의 싸움에서 지나치게 화약을 많이 소모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1번 촉수 역시 그을리긴 했지만 아직 건재하게 살아 있었다.

    유효한 타격을 먹이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아직 두 개의 촉수를 더 상대해야 하는 상태.

    8번 촉수가 얼음섬을 붙잡고 버티는 동안, 1번 촉수는 우리를 향해 채찍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미안해! 내가 화약을 낭비해서…!”

    유다희는 울먹거리며 사과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라켄의 촉수가 사정을 봐주진 않는다.

    콰쾅! 콰콰콰쾅!

    크라켄은 다소 그을리고 짧아졌지만 여전히 크고 강한 1번 촉수를 이용해 얼음섬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빠직!

    심지어 8번 촉수가 얼음섬의 둘레를 얼마나 단단하게 휘감아 조이고 있는지 얼음산들이 족족 붕괴해 내린다.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와 크라켄의 크기는 일치하거나 거의 엇비슷하다.

    작정하고 채찍질을 하면 못 부술 것도 없어 보였다.

    우르릉……!

    남은 두 개의 긴 촉수들이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하자 섬 전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얼음섬이 또 붕괴한다.

    그렇게 되면 겨우 얻은 발판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드레이크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끝났군. 비장의 무기까지 썼는데도 잡는 데 실패하다니…….”

    함선의 화약고까지 폭발시켰는데도 크라켄에게 치명타를 먹일 수 없었다.

    만약 1번 촉수를 성공적으로 제거했다면 8번 촉수 하나만 남은 셈이니 어찌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었겠지만, 두 가닥의 촉수를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

    유다희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그녀는 적아의 구분 없이, 게임 속의 대업(大業) 하나가 자신 때문에 좌초되었다는 것에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이 점은 미안해… 내가 1함선을 이끌 때 화약을 너무 낭비하는 바람에…….”

    유다희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그녀 또한 게이머, 진정코 게임을 즐기는 자.

    자신 때문에 S급 몬스터의 레이드가 좌절되었다는 것 자체에 순수하게 슬퍼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크라켄을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어? 비장의 무기는 아직 꺼내지도 않았구만.”

    그러자,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와 유다희가 고개를 번쩍 든다.

    둘 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로.

    “그게 무슨 소리인가?”

    “비장의 무기란 게 일곱 함선의 화약고 아니었어?”

    고작 함선들을 터뜨리는 걸로 S급 몬스터가 잡힐 거라 생각했다니. 순진하군.

    나는 그들의 질문에 시큰둥한 태도로 답변했다.

    “영리한 여우는 굴을 여러 개 파 놓는 법이지.”

    내 말을 들은 유다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녀는 우리가 적이라는 사실도 잊었는지 내게로 바짝 다가온다.

    그리고 내 양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뭔데! 뭔데! 이 대단한 변태 자식! 빨리 비장의 무기를 꺼내 봐!”

    유다희는 언제 으르렁거렸냐는 듯 간절한 얼굴로 독촉하고 있다.

    누가 보면 정말로 동료인 줄 알겠다.

    하지만.

    비장의 무기는 내가 꺼내고 싶다고 해서 꺼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독촉은 저 녀석한테 해.”

    나는 손가락을 뻗어 크라켄을 가리켰다.

    “……?”

    드레이크와 유다희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다.

    그런 우리에게,

    부우우웅!

    또다시 크라켄의 촉수가 날아들었다.

    콰콰쾅!

    우지직…

    섬을 때려 부수는 1번 촉수와 섬을 휘감아 부수는 8번 촉수.

    크라켄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얼음섬 전체를 공격했다.

    그럴 때마다 얼음섬은 천천히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바닷물 속으로 침몰할 모양새.

    “야이 변태 자식아! 너 뻥친 거 아니야!? 비장의 무기는 어딨냐고오오!”

    유다희가 얼음바닥에 나동그라져 바락바락 외치고 있을 무렵.

    “……!”

    나는 눈을 빛냈다.

    됐다!

    비장의 무기가 터질 시간이 됐단 말이다!

    펄쩍-

    나는 잽싸게 달려가 드레이크와 유다희의 목덜미를 붙잡고 뒤로 빠졌다.

    “……?”

    그 둘은 뒤로 끌려가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섬이 무너지고 있는 판에 도망쳐서 뭘 어쩌겠다는 것?

    하지만.

    드레이크와 유다희가 미처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에.

    -띠링!

    답이 나왔다.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가 무너집니다!>

    <‘칼바람 싸움터 양 군영’이 함락 직전입니다.>

    <전사들의 맹렬한 투지가 ‘칼바람 싸움터의 지배자’를 자극합니다.>

    <‘망자의 잔류사념’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전에 들어봤던 익숙한 알림음들.

    그리고.

    이내 마지막 알림음이 섬 전체에 으스스하게 울려 퍼진다.

    <‘대망자(大亡者)’가 눈을 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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