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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48화 (148/1,000)
  • 148화 가장 깊은 곳의 왕 (3)

    -<심해의 정수> D

    심해의 기운이 담긴 구슬이다.

    씨어데블이 죽을 때 100%의 확률로 떨구는 재료 아이템.

    이는 해저와 해상을 잇는 엘리베이터나 다름없다.

    해저왕 플라튠이 이끄는 8함대가 처음으로 사냥한 몬스터가 바로 씨어데블이었다.

    드레이크가 입맛을 다셨다.

    “아쉽네, A+등급 아이템 하나 뭐 안 떨구나 했는데.”

    퀘스트의 관계자가 아니라 야생의 심해 씨어데블을 만나는 것은 모두가 처음이었다.

    놈이 죽는 순간, 드레이크는 시체가 가라앉은 곳의 좌표를 잘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크라켄에게서 도망칠 때 절묘하게 수거해 온 것이다.

    후욱!

    내가 숨결을 불어넣자, 심해의 정수는 환한 빛을 발한다.

    예전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의 침몰 당시 그랬듯 말이다.

    그때쯤 해서.

    우…우우…우우우우우……

    수만 구의 익사체가 토해 놓는 장송곡이 들려온다.

    크라켄!

    방금 문명 하나를 막 멸망시킨 참인 거대한 괴물 두족류.

    놈은 지금 온 힘을 다해 이곳으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한번 찍은 먹이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 집요함, 이 녀석은 덩치에 걸맞지 않는 음흉함과 교활함을 가지고 있다.

    “가즈아!”

    나는 재빨리 점액 구슬을 위로 띄웠다.

    심해 엘리베이터는 나와 드레이크, 유다희 셋을 태운 채 허공으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유다희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근데 너희 내려오는 데 3일 걸렸다며? 괜찮아?”

    “그건 우리 몸에 산소 코팅이 없을 때 얘기고.”

    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확실히, 점액 구슬이 떠오르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아틀란둠의 대장간에서 받은 산소 코팅의 힘이 우리의 몸무게를 극도로 가볍게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슈-오오오오옥!

    점액 구슬은 빠른 속도로 위를 향해 떠올랐다.

    우…우우우우……

    크라켄, 이 거대한 심해괴물은 어느덧 우리가 원래 서 있던 바닥까지 도달했다.

    그리고는 우리를 잡기 위해 거대한 촉수를 위로 뻗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아직 보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꿀렁- 꿀렁- 꿀렁- 꿀렁- 꿀렁- 꿀렁- 꿀렁- 꿀렁-

    점액 구슬이 8각면체 모양으로 짓눌린다!

    “온다! 촉수가 오고 있다!”

    드레이크가 점액 구슬의 투명한 벽 너머,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을 꿰뚫어본다.

    분명 저 어둠 너머로 8개의 거대한 다리가 다가오고 있을 것이다!

    촉수가 내뿜는 기세, 그리고 옥죄어오는 수압 때문에 점액 구슬이 기괴한 모양으로 짓눌리는 것이리라.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유다희는 비명을 질렀다.

    다가오는 촉수들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점액 구슬을 향해 밀려오는 8개의 산맥들.

    그것은 마치 심해의 바닥에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돌기둥 같았다.

    가히 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존재. 압도적인 초자연(超自然) 그 자체가 아닌가!

    ‘…….’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타이밍을 잰다.

    “보자. 여기서 딱, 느려질 타이밍.”

    내가 중지와 엄지를 튕기자.

    끼기기긱…….

    거짓말처럼 다가오던 촉수들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거함선(巨艦船)!

    나와 드레이크, 유다희가 지난 7번의 항해에 걸쳐 크라켄에게 내준 아틀란둠의 함선 7척.

    크라켄은 지금 7개의 다리 끝에 그 거함선들을 권투장갑처럼 끼고 있는 상태다.

    나는 그 무거운 장갑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크라켄은 좁은 곳이 있으면 거기로 몸을 우겨넣는 습성이 있지. 배 안에 몸을 다 집어넣을 수 없으니 다리만이라도 집어넣는 거야.”

    그래서일까?

    기우뚱- 쿵!

    거함선 내부에 있는 쇠돌기들이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쏠린다.

    그러자 크라켄의 촉수가 순간 무게중심을 잃고 아래쪽으로 헛손질을 했다.

    “이렇게 피하죠? 못 잡죠? 각도 절묘하죠?”

    나는 점액 구슬 바닥으로 보이는 크라켄의 음산한 외눈을 바라보며 히죽였다.

    바로 그때.

    “저기! 저기! 저기! 저기! 변태! 변태! 저기!”

    유다희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내 등짝을 마구 친다.

    “……!”

    고개를 드니 8번째 촉수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8번째 촉수에는 함선이 없다.

    해저왕 플라튠이 직접 몰고 나갔던 8함선, 그것은 크라켄에게 빼앗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볍게 휘둘러지는 구슬이 깨지기 직전!

    하지만.

    부우우우우웅-

    8번째 촉수는 결국 점액 구슬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잘렸죠? 짧죠? 그런 거 안 닿죠?”

    나는 한 번 더 비웃어 주었다.

    8번째 촉수는 함선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지만 끝부분이 해저왕 플라튠에게 잘려나가 다른 촉수보다는 조금 짧다.

    이것도 당연히 계산 범위 안!

    슈우우욱-

    점액 구슬은 빠르게 상승한다.

    크라켄 역시 헤엄을 쳐서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 속도는 꽤나 느린 편이었다.

    ‘이대로 수면까지만 가면…….’

    나는 크라켄의 힘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

    하지만.

    세상 일이 언제나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쿠오오오오오!

    또다시 해류가 갈라지는 소리.

    “…뭐지?”

    나는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내 나의 시야를 꽉 채워오는 무언가가 보인다.

    “빌어먹을! 1번 촉수!?”

    나는 경악했다.

    그것은 처음으로 상대했던 1번 촉수였다.

    당시 1번 함대의 함장이었던 유다희는 1번 촉수를 상대로 화약을 뻥뻥 남발했었는데 그 탓에 배의 무게가 지나치게 가벼워진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1번 촉수만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우리를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이고.

    “으아아아! 미안해! 이건 내 실책이야!”

    유다희는 그제야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는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설마 우는 건가, 저거?’

    하지만 지금 유다희의 눈물에 신기해할 때가 아니다.

    “빌어먹을!”

    긴급상황!

    어쩔 수 없다.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내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것은 하나의 시커먼 나무조각이었다.

    된서리 엔트의 뿌리!

    북대륙의 가혹한 설산을 넘으며 얻은 횃불용 아이템.

    치익-

    나는 거침없이 이 장작에 불을 당겼다.

    드레이크가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다.

    “심해에서는 불 켜지 말라며?”

    예전에 심해로 막 내려올 때, 나는 된서리 엔트의 뿌리에 불을 붙이려는 드레이크에게 면박을 준 적이 있었다.

    심해의 주민들은 빛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이니까 켜는 거야!”

    나는 손에 든 횃불을 들어올렸다. 어두운 심해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

    그러자.

    [……!]

    [……!]

    [……!]

    곳곳에서 어그로 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둠 너머를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대형 심해괴물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기도했다.

    ‘제발! 부디 이곳에 크라켄의 피어에도 겁먹지 않을 정도로 정신 나간 몬스터가 한 마리쯤은 있기를…!’

    기도가 통했을까?

    [빠오오오오!]

    어둠 저 너머에서 우렁찬 포효 소리가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진다.

    <바다코끼리> -등급: A / 특성: 물, 심해, 고생물, 관통, 도장 깨기

    -서식지: 바다 전 구역

    -크기: 8m.

    -두텁고 질긴 살가죽과 크고 날카로운 엄니, 거대한 돛지느러미로 무장한 해전형 야수.

    입술 밖으로 삐져나온 어금니에 관통당하면 거함선이라고 해도 침몰한다.

    커다란 코끼리.

    바다에 왜 코끼리가 있나 싶지만 이름이 바다코끼리이니 또 그럴싸하다.

    놈은 커다란 귀를 지느러미처럼 부채질한다.

    동시에 직선으로 뻗은, 나선 무늬의 상아 두 개를 앞세우고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왔다.

    바다코끼리를 본 순간,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좋아! 방어력도 높고 날쌘 놈이 왔군!”

    빛에 이끌려 온 해저괴물.

    만약 내려가는 중에 놈을 만났다면 나는 이번 생을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올라가는 중. 심지어 크라켄의 1번 촉수에 쫓기는 중이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빠오?]

    바다코끼리는 점액 구슬에 접근하는 순간 위험을 감지한 듯했다.

    하지만, 이 몬스터는 위험을 감지하더라도 결코 물러나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크라켄의 촉수를 보고서도 계속 울며 겨자 먹기로 달려든다.

    결국.

    뿌지지직!

    크라켄의 1번 촉수와 점액 구슬 사이로 달려들던 이 몬스터는 그 자리에서 촉수의 빨판에 붙잡히고 말았다.

    바다코끼리의 질긴 가죽이 삶은 달걀의 피막처럼 찢어져 버렸다.

    붉은 선혈이 번지며, 크라켄의 촉수가 아주 잠시 멈칫했다.

    “지금이다!”

    바다코끼리가 찰나의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나는 온 힘을 다해 점액 구슬을 밀어 올렸다.

    영원같은 찰나, 찰나같은 영원이었다.

    슈우우우욱!

    결국, 점액 구슬은 아슬아슬하게 촉수의 사정거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찌이이익-

    그 와중에 점액 구슬의 밑바닥이 조금 찢어져서 물이 새어 들어오기는 했지만, 수면까지 도착할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유다희는 오싹하다는 표정으로 점액 구슬 밑바닥에 생긴 긴 상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으, 내가 만약에 첫 번째 함선 레이드에서 배를 안 빼앗기기라도 했다면…….”

    그렇다.

    내가 조타실을 부순 덕분에(?) 유다희는 배를 빼앗길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유다희가 배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우린 크라켄의 1번 촉수에 의해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나는 유다희를 향해 말했다.

    “그것 봐. 다 이유가 있다고 했지?”

    “…….”

    유다희는 이번만큼은 욕을 하지 않았다.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올리려다가 살며시 접는 것도 내가 봤다.

    뭐 아무튼.

    퍼엉!

    우리는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점액 구슬 안의 물이 목젖까지 고일 무렵이었다.

    점액 구슬 위로 부서지는 물무리, 무지개, 그리고 햇살!

    이 얼마 만에 보는 태양인가!

    이제 어둡고 음침한 심해 생활도 끝이다!

    “좌표도 딱 맞게 올라왔네.”

    나는 고개를 들어 바다 위를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가 재생되어 있었다.

    햇빛에 빛나는 얼음산 꼭대기에 무지개가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첨벙- 첨벙- 첨벙-

    우리는 헤엄을 쳐 이 얼음섬 위로 올라왔다.

    “드디어 발판이 생겼군. 감개무량해.”

    드레이크는 쇠뇌를 들며 말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마름쇠를 뿌릴 땅이 있었더라면’ 뭐 이런 것이다.

    이윽고.

    고-오오오오오오오!

    마트료시카 앞으로 거대한 물무리가 융기해 오른다.

    얼음섬에 필적할 정도의 덩치.

    크라켄이 드디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크라켄> -등급: S / 특성: 고생물, 심해, 지진, 풍랑, 틈, 나포

    -서식지: 블루홀 ‘밑바닥’

    -크기: ?m.

    -빛도 어둠도 없던 시절에 살던 먼 태고의 생물.

    드디어 S급 몬스터가 그 무시무시한 위용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드레이크도 유다희도, 막상 놈을 마주하니 또다시 위축되는 듯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놈이 많이 약해진 것이 보였다.

    “자, 어디 계산을 시작해 볼까?”

    나는 학교 다닐 때 수학에 특히 약했다.

    오죽했으면 근의 공식도 못 외울 정도.

    하지만.

    뎀딜을 계산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심해’ 크라켄의 총 HP는 419,518,000.

    그 중 해저왕 플라튠과 8함대, 아틀란둠의 근위병들에게 입은 데미지가 총 45,604,979.

    그리고 추격을 시작할 때의 HP가 373,913,021.

    추격을 하는 동안 회복한 HP가 약 759,000.

    ‘심해’ 특성이 사라진 크라켄의 총 HP 209,759,000.

    따라서 지금 크라켄의 HP는 419,518,000/2-45,604,979+759,000=…….

    “정답은 일억육천사백구십일만삼천이십일!”

    나는 크라켄의 상태창을 들여다보았다.

    <크라켄> -등급: S

    -HP: 164,913,021/209,759,000

    놈의 잔여 HP는 틀림없이 164,913,021이다.

    회복량까지 염두에 둔 데미지 딜 계산이 딱 맞아 떨어졌다.

    …이 정도의 머리로 왜 전생에 그런 삶을 살았냐고?

    원래 겜창들은 일상생활에서는 구구단도 햇갈릴지 모르지만 뎀딜이나 가챠 확률 계산할 때에는 미적분도 거침없이 해치워 버린다구!

    한편.

    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크라켄은 여덟 개나 되는 촉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쏴아아아아아-

    바다 위에 갑자기 거대한 폭포 여덟 개가 생겨났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쏟아지는 바닷물, 그리고 그것들이 걷히자 거대한 함선과 그 밑에서 꿈틀거리는 빨판들이 훤히 드러났다.

    “으, 으아아. 저런 걸 어떻게 잡아!?”

    유다희는 새삼 두려운 눈치다.

    드레이크 역시도 막막하다는 표정.

    하지만, 오직 나만은 냉정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

    ‘몬스터는 잡으라고 만들어 둔 거야. 깎단도 있고 발판도 있으니 잡을 수 있어.’

    도트 데미지를 이용한다면 어떠한 대괴수도 쓰러트릴 수 있다.

    문제는 도트 데미지가 총 HP를 갉아먹을 동안, 그러니까 2시간 46분 40초를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발판.

    S급 몬스터의 자연 회복력을 감안한다면 약 4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발판 문제는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 덕분에 해결되었다.

    시간 문제도 ‘심해’ 특성의 봉인과 NPC들을 이용한 데미지 덕분에 어느 정도 해결된 셈이다.

    해볼 만하다.

    단순히 HP뿐만 아니라 힘, 속도, 마력, 지능 등 모든 스텟이 50%로 줄어든 크라켄 정도라면 정말로 해볼 만했다.

    ‘거기에, 아직 비장의 무기도 남아 있고 말이지.’

    나는 눈을 들어 크라켄의 촉수에 끼워져 있는 7척의 거함선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가즈아!”

    나는 오더를 내리는 동시에 깎단을 콱 움켜쥐었다.

    맹독 혈액이 발라진 깎단, 그것이 음습한 광택을 뿌린다.

    이제 정말 레이드 시작이다.

    튜토리얼의 탑에서 만난 ‘용옥(龍獄)의 고문기술자’ 이후로 처음 사냥하는 S급 몬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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