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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47화 (147/1,000)
  • 147화 가장 깊은 곳의 왕 (2)

    우…우우우…우우우……

    그것은 흡사 좁은 공간에 갇힌 죄수가 폐소감에 짓눌려 죽어가는 소리.

    심해의 아득한 저 너머, 깊고 깊은 구멍 밑에서 음울한 곡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모두의 귓가에 알림음이 메아리쳤다.

    -띠링!

    <블루홀 ‘입구’의 중간보스 ‘8번 촉수’가 물러납니다>

    <블루홀 ‘최심층부’의 ‘진(眞) 보스’가 자신의 해역을 침범한 이들에게 흥미를 보입니다>

    <‘가장 깊은 곳의 주인’이 ‘밑바닥’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알림음을 들은 유다희가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뭐가 흥미를 보인다고? 가장 깊은 곳은 어디야? 주인은 또 누구고? 바닥은 어딘데?”

    모든 것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투성이다.

    하지만.

    “…….”

    오로지 나만은 굳은 표정으로 한 지점을 바라볼 뿐이다.

    그곳은 바로 ‘?’등급 던전 블루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바다 구덩이다.

    플레이어는 들어갈 수 없다곤 하지만, 저것은 분명히 던전.

    당연히 내부의 각 구역이 난이도별로 나뉘어져 있다.

    15년(정확히는 14년) 뒤에도 블루홀 안에 들어가 봤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지만(공식 석상에는) 그 안의 내부 구조를 어림잡을 수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연이어 들려오는 알림음들 때문이다.

    -띠링!

    <‘가장 깊은 곳의 주인’이 ‘밑바닥’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가장 깊은 곳의 주인’이 ‘최심층부’를 통과했습니다>

    <‘가장 깊은 곳의 주인’이 ‘깊은 구역(2)’을 통과했습니다>

    <‘가장 깊은 곳의 주인’이 ‘깊은 구역(1)’을 통과했습니다>

    <‘가장 깊은 곳의 주인’이 ‘중간지대 (2)’를 통과했습니다>

    <‘가장 깊은 곳의 주인’이 ‘중간지대 (1)’를 통과했습니다>

    <‘가장 깊은 곳의 주인’이 ‘얕은 구역 (2)’을 통과했습니다>

    <‘가장 깊은 곳의 주인’이 ‘얕은 구역 (1)’을 통과했습니다>

    <‘가장 깊은 곳의 주인’이 블루홀 ‘입구’로 몸을 빼냅니다>

    .

    .

    이 알림음들의 연속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1. 눈앞에 있는 저 블루홀이 총 9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깊은 던전이라는 것.

    2. 그리고 지금 그 9층 던전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올라오고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다.

    이윽고.

    그것들은 현실이 되어 모두의 눈앞에 구현된다.

    쿠구구구구구……

    블루홀을 중심으로 뻗어나가 있던 8개의 산맥이 한꺼번에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콰콰쾅!

    8마리의 거대한 바다뱀이 땅에 묻은 몸을 빼낸다.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빨판을 가득 달고 있는 촉수들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 끝이 저 깊은 블루홀 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내.

    쿠구구구구구-

    블루홀 속에서 거대하고 둥근 ‘무언가’가 융기해 오른다.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무엇인지 한 눈에 식별할 수가 없었다.

    또한 너무 깊은 곳에 그 몸을 두고 있었기에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블루홀 안에서 기어나온 이 거대한 어둠은 모든 빛을 삼켜 버렸다.

    “저, 저게 뭐야?”

    유다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분명 ‘밑’에서 올라왔는데 어느새 ‘하늘’에 가 닿아 있다.

    대체 저 거대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쿵-

    그때.

    여덟 개의 촉수가 바닥을 찍었다.

    “……!”

    드레이크는 눈을 크게 떴다.

    여덟 촉수 중 하나는 플라튠에 의해 끝이 조금 잘려 나갔다.

    그리고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촉수의 끝에는 지금껏 침몰한 일곱 척의 함선들이 권투 글러브처럼 끼워져 있었다.

    그리고.

    우…우우…우우우우……

    듣는 이의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음울한 포효화 함께, 이 모든 격변의 원흉이 블루홀 밖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너무 커서 한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녀석의 전신 실루엣을 이미 알고 있었다.

    <크라켄> -등급: S / 특성: 고생물, 심해, 지진, 풍랑, 틈, 나포

    -서식지: 블루홀 ‘밑바닥’

    -크기: ?m.

    -빛도 어둠도 없던 시절에 살던 태고의 생물.

    그것은 실로 거대한 괴물 두족류.

    여덟 개의 거대한 다리 중 일곱 개에 거함선을 권투 장갑처럼 끼고 있는 문어였다!

    “아아… 아아아아…….”

    유다희는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전율했다.

    너무나 커서 그냥 자연 환경처럼 보일 정도의 몬스터.

    마주치는 순간 자연스럽게 목숨을 포기하게 되는, 그런 위압감.

    “저, 저게 뭐냐? 저런 걸 잡으라고?”

    드레이크조차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유다희는 아예 넋을 놓아 버렸다.

    하지만.

    “…….”

    나는 침착한 기색으로 눈앞의 ‘적’을 탐색한다.

    크라켄(Kraken).

    여타 다른 게임에서도 자주 보이는 몬스터.

    일반적으로는 큰 덩치와 체력을 가진 바다 몬스터로 표현된다.

    흔한 클리셰가 아닌가?

    …….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크라켄은 머리로만 알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꾸구구국...

    일곱 척의 난파선들이 서로 맞물리며 부서지고 뒤틀렸다.

    크라켄이 그 위로 거대한 몸을 들어올린다.

    으스스한 야광을 뿌리는 눈은 마치 심해의 태양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저 모습은 그야말로 심해의 대자연 그 자체!

    하지만.

    그 압도적인 모습을 보고도 주눅 들지 않은 존재는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재수 없는 두족류 놈들!]

    해저왕 플라튠, 그는 삼지창을 들고 크라켄의 외눈을 향해 돌격했다.

    [뒈져라아아아아앗!]

    삼지창 끝에서 뇌전이 번뜩인다.

    퍼퍼퍼퍼퍽!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뇌전이 크라켄의 머리를 강타했다!

    오-오오오오!

    크라켄은 음울한 소리로 포효했다.

    그리고.

    콰쾅!

    그대로 8번째 촉수를 들어 플라튠과 그 뒤에 있던 8함선을 공격했다.

    8번째 촉수는 끝이 조금 잘려나가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쿠구구구구-

    크라켄의 촉수가 거대한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해서 채찍이라기보다는 기둥이 무너져 내리는 것에 더 가까웠다.

    우지지직!

    끔찍한 굉음과 함께, 아틀란둠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던 8함선의 용골이 두 동강났다.

    빠직! 빠직! 뿌지지직!

    산산조각이 난 함선은 그대로 격침되어 침몰했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크라켄이 빼앗은 7척의 함선, 그것들이 해저의 바닥을 기어오더니 남은 해저인들을 향해 포격을 갈기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쾅!

    아무래도 함선의 내부에 파고든 크라켄의 촉수가 뱃속의 세밀한 부분까지 전부 컨트롤하는 듯싶다.

    해저인들은 포격에 당해 너무나도 허망하게 죽어간다.

    [크아아아아악!]

    톱상어 귀스타프를 비롯한 용맹한 해저의 전사들은 그렇게 변변찮은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포격의 화염 속에 사라져갔다.

    [이, 이, 이 저주스러운 두족류 놈!]

    해저왕 플라튠.

    그는 삼지창을 든 채로 부들부들 떤다.

    빠지지지직-

    또다시 황금빛 뇌전이 크라켄을 찔렀다.

    하지만 크기 차이가 너무나도 심했다.

    마치 초파리가 버팔로를 향해 돌격하는 모양새.

    콰콰쾅!

    크라켄이 한 번 더 촉수를 휘두르자, 플라튠은 일격에 격침당했다.

    꾸르륵-

    그는 전신의 뼈가 모두 부러진 상태로 나가 떨어졌다.

    비늘도, 이빨도 모두 빠졌고 그 우람하던 근육들도 죄다 터져 나갔다.

    픽-

    그는 물간 생선 특유의 탁한 눈동자를 들어 크라켄에게 고정시켰다.

    […….]

    플라튠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하지 못했다.

    크라켄의 촉수가 그를 한 번 더 짓이겨 버렸기 때문이다.

    우르릉…

    플라튠이 기대어 있던 절벽이 무너져 내렸다.

    붕괴의 잔해들은 블루홀 저 아래를 향해 떨어졌고 서서히 어둠에 파묻힌다.

    오… 오오오오…….

    크라켄은 이내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와 드레이크, 유다희가 있는 방향이다.

    “어진! 정말 저것과 싸울 건가?”

    드레이크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쳤어? 튀어야지.”

    나는 잽싸게 뒤돌아섰다.

    그리고 크라켄의 촉수가 드리우는 그림자를 피해 열심히 해저의 바닥을 달렸다.

    씨어데블의 신발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잡혀 죽었을 것이다.

    크라켄을 던전 밖으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해저왕 플라튠과 8함대도 전멸시켰으니 일단 기초 작업은 완료된 셈이다.

    “야 변태! 어디로 튈 건데!”

    유다희가 내 뒤를 따라와 묻는다.

    드레이크 역시도 몹시 궁금한 표정이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어디긴 어디야, 아틀란둠이지.”

    *       *       *

    이곳은 해저도시 아틀란둠의 성벽.

    망루 위에서 보초를 서던 근위병은 순간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저, 저게 뭐냐?]

    산이 다가오고 있다.

    거대한 산과 그 주변의 산맥들이 지금 성벽을 향해 접근해 오고 있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속도로!

    동시에, 그 앞에서 도망쳐 오고 있는 패잔병 하나가 보인다.

    부러진 톱날과 숭숭 빠진 이빨.

    전신이 새까맣게 그을린 모양새.

    패잔병의 정체는 바로 군단장 ‘톱상어 귀스타프’이다!

    [으, 으아아아악! 크라켄이다! 크라켄이 침공해 왔다!]

    그는 공포에 질린 채 고래고래 외쳤다.

    아틀란둠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성벽에 있던 모든 근위병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어째서 저 괴물이 여기까지!? 국왕님은!?]

    [이런! 토벌대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나라를 지킨다!]

    [군단장님을 도와 싸우자!]

    수많은 근위병들이 창과 칼, 도끼를 든 채 성벽 위에 나열해 섰다.

    이내.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크라켄의 육체가 아틀란둠의 드높은 성벽을 덮쳐왔다.

    콰-콰콰콰콰쾅!

    어마어마한 굉음이 모든 이들의 고막을 찢어놓았다.

    폭발과 비명, 그리고 붕괴, 또 붕괴, 붕괴, 붕괴, 붕괴, 붕괴, 붕괴, 붕괴, 붕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또 부서진다.

    “…흐음.”

    나는 아틀란둠에서 멀찍이 떨어진 바위언덕 위에 서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향해, 유다희가 비난한다.

    “비열한 변태 놈! 너 때문에 죄없는 NPC들이 죽어가고 있어!”

    “…어차피 나중에 되살아나잖아. 그리고 아까는 NPC들에게 감정이입하기 싫다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유다희의 항의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크라켄에게 데미지를 입혀줄 충직한 딜러들을 따로 또 어디서 구해?”

    “…….”

    “네 마교 길드원들 여기에 불러올까? 평균 레벨 20짜리의 용맹스러운 공대원들을?”

    내가 빈정거리자 유다희는 큭 소리와 함께 입술을 깨물 뿐이다.

    한편.

    해저도시 아틀란둠은 곧 궤멸하고 말았다.

    우르르릉… 콰쾅!

    크라켄은 한쪽 성벽을 통째로 무너트리고 시가지 안으로 들어와 우리를 뒤쫓았다.

    그 과정에서 중앙에 있던 번화가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고 심지어 반대편 성벽마저 무너져 내린 것이다.

    드레이크는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우리가 레흐락의 술을 마시기 전 보았던 풍경이 저렇게 만들어진 것이었어.”

    그의 말대로다.

    처음 우리가 아틀란둠에 왔을 때, 이 해저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된 상태였다.

    지금 크라켄이 휩쓸고 간 풍경이 꼭 그와 같았다.

    “젠장! 아직도 우리를 쫓아오고 있잖아! 저 괴물 문어 자식!”

    유다희는 이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 같았다.

    그녀는 나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야 변태! 빨리 도망칠 방법을 말해!”

    그녀는 크라켄을 잡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착실하게 데미지 양을 계산중이다.

    크라켄을 죽일 수 있는 데미지의 총량을 말이다!

    “…어디보자, ‘심해’ 특성이 붙은 크라켄의 HP가 약 4억가량이었지? …여기서 8함대의 포격으로 인한 데미지가 빠지고 …플라튠의 삼지창 데미지가 또 빠지고 …아틀란둠 근위병들의 투창 데미지가 또 빠지고…….”

    나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암산해 보았다.

    “…그렇다면 계산상 현재 크라켄의 잔여 HP는 약 373,913,000 정도라는 얘긴데…….”

    계산을 마친 나는 잽싸게 크라켄을 향해 뒤돌았다.

    그리고 막간을 노려 크라켄의 상태창을 한번 슥 점검해 보았다.

    <크라켄> -등급: S

    -HP: 373,913,021/419,518,000

    ‘이런 아깝게 21의 오차가 있네.’

    나는 아쉬움에 무릎을 탁 쳤다.

    계산을 조금 잘못했나 보다.

    내가 ‘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하고 다짐하고 있을 때.

    유다희가 내 양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든다.

    “야 변태! 지금 변태 같은 계산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아틀란둠도 궤멸당했는데 이제 어디로 도망갈 거야!”

    나는 그녀의 의문에 명쾌하게 대답해 주었다.

    “당연히 수면 위로 도망가야지.”

    “뭐어!?”

    “수면 위로 도망가는 게 유일하게 살 길이야. 크라켄의 심해 특성은 주변 환경이 심해일 경우 스텟이 두 배로 상승하는 특성, 수면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놈의 힘은 절반으로 줄어들어.”

    즉 크라켄이 해수면 위로 올라올 경우 HP가 50%로 줄어들지만 그동안 입은 피해량은 유지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유다희는 누가 그걸 모르느냐는 듯 캐물었다.

    “다 좋은데! 위로 어떻게 가냐고! 그 거리를 헤엄쳐 올라갈 것도 아니잖아!”

    그녀의 항의는 일견 타당한 것이었다.

    내가 품속에서 꺼낸 이 아이템만 아니었어도 말이지.

    “…이건!?”

    유다희는 두 눈을 크게 떴다.

    내 손에 들려있는 작고 투명한 구슬 하나.

    -<심해의 정수> D

    심해의 기운이 담긴 구슬이다.

    그것은 일전에 씨어데블이 격침당한 곳에서 주운 것이었다.

    “가 볼까?”

    나는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거대한 심해괴물을 보며 말했다.

    이제 엘리베이터를 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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