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43화 (143/1,000)
  • 143화 침몰함대(沈沒艦隊) (4)

    뻥이다.

    사실 나 맞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서 마동왕의 아이템을 장비했고 그 힘으로 조타실에 지진을 일으켰었다.

    “…….”

    박살난 조타실을 한번 슬쩍 들여다보자.

    끼리리리릭-

    키가 저 혼자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기기기긱…

    이내, 배가 한쪽으로 크게 기운다.

    유다희는 갑판 한 쪽으로 데굴데굴 구르며 고래고래 고함쳤다.

    “아아아아악! 고인물 이 개X끼이이이! 또 너지이이이!?”

    모두가 넘어지는 가운데, 나는 혼자서만 균형을 유지한 채 선미루에서 빠져나간다.

    마치 발레리노처럼 외발 발끝으로 몸을 지탱한 채 뱅글뱅글 돌면서.

    일정 이상의 회전력이 생기면 그 회전력으로 생기는 원심력 보정이 너무 강하게 설정되어 오히려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되는 버그.

    팽이의 원리와도 비슷한 논리다.

    뭐 버그라고 해 봐야 오직 배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 6번의 항해가 더 남아 있는 시점에서 이런 소소한 팁들은 큰 도움이 된다.

    “…어디보자, 화약이 얼마나 남았나?”

    나는 갑판 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잽싸게 내려가 선창 내부를 확인했다.

    배의 무게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가득했던 화약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 그새 많이도 쏴재꼈네.”

    나는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너무 늦었다.

    화약을 좀 더 아끼게 했어야 했는데.

    기우뚱-

    배가 기우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하단 선창에 가득했던 화약들이 동나자 배의 무게가 많이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쿵-

    요란한 굉음과 함께, 배가 멈췄다.

    당장이라도 옆으로 회까닥 뒤집어질 것 같던 배가 제자리에 단단하게 고정된다.

    언뜻 느끼기에는 좋은 현상인 것 같지만, 사실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상황이 나빠졌다.

    [배가 나포(拿捕)됐습니다!]

    노잡이들이 사색이 된 채 외쳤다.

    하단 갑판으로 나가자, 거대한 바다뱀이 배를 단단히 휘감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귓가에 요란한 경고음들이 뜨기 시작했다.

    -띠링!

    <아군의 함선이 나포되었습니다>

    <배를 버리시겠습니까?>

    끝났다.

    배를 버린다는 선택지가 등장한 순간 승패는 명확하게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우드득- 우드득- 우득-

    바다뱀은 천천히 몸을 휘감아온다.

    뱃머리의 쇠돌기부터 중간 부분의 함벽까지 완벽하게 장악 당했다.

    스윽-

    자욱한 진흙구름과 마린 스노우 때문에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뱀의 머리 부분이 언뜻 보인 것도 같았다.

    몸에 붙어 있던 바위와 진흙들이 포격 때문에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자, 이내 흙먼지와 눈보라 사이로 바다뱀의 머리 부분이 얼핏 드러났다.

    “……!”

    드레이크는 바다뱀과 눈이 마주치고는 흠칫했다.

    바위와 진흙, 물거품과 함박눈 사이로 보인 것.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원이었다.

    커다란 동그라미가 드레이크의 시선과 마주하고 있었다.

    “…저게 눈알인가?”

    드레이크는 입을 반쯤 벌렸다.

    바다뱀의 눈은 탁하고 퀭했다.

    죽은 물고기 특유의 물 간 눈.

    오랫동안 청소하지 않은 창문처럼 탁하고 답답한 시선이 드레이크를 무심히 스쳐 지나간다.

    [배를 버려야 합니다!]

    [이미 빼앗겼어요!]

    해저인들이 속속들이 외친다.

    그들은 이미 선창에 있던 비상탈출용 가오리들을 끌고 나온 상태였다.

    “제기랄! X발!”

    유다희는 허공을 향해 마구 악을 쓰며 고함쳤다.

    원통한 일이지만 조타실이 망가진 이상 별 도리가 없다.

    쓸 수 있는 대포들도 이미 바다뱀에 의해 죄다 파괴되었다.

    결국.

    유다희는 맨 마지막으로 배에서 탈출했다.

    딱히 선장이라서 맨 나중에 나온 것은 아니지만, 아쉬움과 미련이 가장 큰 사람이 그녀였기에 그렇게 되었다.

    탈출용 가오리를 타고 허공으로 헤엄치는 그녀에게.

    “아, 저기 나오는군.”

    “왜 이렇게 늦었어.”

    드레이크와 내가 말을 건다.

    우리들은 일찌감치 배를 버리고 튄 상태였다.

    뿌드득- 뿌득-

    유다희는 핏발 선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와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묵묵히 해저왕국 아틀란둠으로 되돌아가는 것 말고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유다희의 야심찬 레이드는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       *       *

    [패전했다고?]

    해저왕 플라튠.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유다희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서 있다.

    “젠장! 고인물 그 빌어먹을 놈 때문에!”

    하지만 아무리 변명을 해도 NPC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뭐, 승패병가지상사(勝敗兵家之常事)라 하였지. 한 번의 패전쯤이야 상관없다. 함선은 아직 일곱 척이나 남았으니까.]

    플라튠은 함선까지 빼앗기고 온 유다희를 의외로 쉽게 용서해 주었다.

    하지만 유다희는 나를 절대로 용서할 생각이 없는 듯 보인다.

    보고를 마치고 돌아서며, 그녀는 곧장 왕성 밖의 선착장으로 달려왔다.

    나는 막 2함대를 출항시킬 채비를 하고 있던 참이다.

    “이 자식!”

    유다희는 나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렇게 내 실패를 바랬냐!? 이 스틸범 놈!”

    나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거 말은 바로 합시다. 북대륙을 지나 마트료시카를 넘어서 여기까지 온 건 전부 다 내 계획이었다고. 거기에 멋대로 끼어든 것은 너잖아?”

    “내가 마교인들을 끌고 오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 아냐!?”

    “혼자서도 올 수 있는 방법은 있어. 오히려 너희들 때문에 조금 돌아온 거야.”

    “거짓말하지 마! 이 뻥쟁아!”

    유다희는 그동안의 설움이 폭발한 듯싶었다.

    그녀는 이제 눈에 눈물마저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넌 나한테서 뭘 더 얼마나 빼앗아가야 직성이 풀리겠냐, 이 악마 같은 놈아! 내가 너한테 대체 무슨 심한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름 없는 여왕 레이드부터 시작해서 꼭두각시 회동의 메두사, 잊혀진 유적지의 샌드웜, 악의 고성의 어둠 대왕, 북대륙 설산의 이히히히, 저주받은 유빙의 대망자, 멕심 배 퀴즈대회, 그리고 아틀란둠의 함대까지.

    그녀가 나와 얽혀서 죽은 횟수와 날린 돈, 아이템들을 따져보면 과연 복장이 터질 만도 하다.

    그런 시련을 딛고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

    15년 전의 유다희는 나에게 저지른 악행이 있으니 보복을 당해도 할 말 없겠지만, 지금의 유다희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이니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 억울하다고 생각할 만한 여지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은 조금 억울하지.

    나는 무슨 소리냐는 듯 항변했다.

    “나는 언제나 너에게 그만둘 것을 권했어. 악의 고성에서도 그랬고, 퀴즈쇼에서도 그랬고, 아까 함대에서도 그랬잖아. 나랑 얽혀 봐야 좋을 것 없다고.”

    “…….”

    유다희는 말이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벌이는 일은 네 깜냥으로 어떻게 해볼 만한 것들이 아냐. 다시 한 번 경고하지만, 이쯤에서 손절하고 빠지는 게 나을걸?”

    그렇다.

    나는 대격변을, 더 나아가서는 이 세계의 신으로 군림하는 17마리의 ‘고정 S+급’ 몬스터들을 먹잇감으로 노리고 있다.

    이제 게임 경력 1년 차인 뉴비(?)로서는 따라오기는커녕 상상할 수조차 없는 영역이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장담하지. 나는 여기서 더 앞으로 나아갈 거야.”

    “…….”

    “너는 내 발끝도 못 따라와.”

    이것이 내가 낼 수 있는 목소리 중에 가장 차가운 목소리다.

    그러자.

    유다희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녀라고 해서 왜 모를까?

    남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보스 몬스터들을 줄줄이 거꾸러트려 온데다가 누구도 넘지 못했던 북방의 설산을 넘어 월드맵 밖의 새로운 맵을 두 개나 연달아 주파하고 있는.

    이 시대 최고의 파이오니아가 바로 나다.

    아무런 인연도 없이, 그저 먼발치에서 봤으면 팬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동경의 대상 내지 우상(偶像)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원한이 먼저일까 복수가 먼저일까?

    닭이 먼저일까 계란이 먼저일까?

    처음부터 꼬이고 꼬인 그녀와 나의 인연은 도저히 정상적인 관계가 될 수 없게끔 뒤엉켰다.

    “...! ...! ...!”

    유다희는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했다.

    그저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릴 뿐이다.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부들부들 떨던 유다희는 이내 목 메인 목소리로 빽 소리 질렀다.

    “나한테서 단물만 빨아먹고 버리는 거냐!!”

    감정이 격앙되어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일까?

    그녀는 많은 말들을 생략했다.

    그리고는 이내 어린아이처럼 빼애애앵 울기 시작했다.

    순간.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배에 승선하던 해저인 NPC들이 나를 경멸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띠링!

    <불가사리 해저인 토니스타 씨가 고인물 님의 평판도를 -1 내렸습니다>

    <거북이 해저인 터틀보틀 씨가 고인물 님의 평판도를 -1 내렸습니다>

    <꽃게 해저인 크랩슬리 씨가 고인물 님의 평판도를 -1 내렸습니다>

    <그루퍼 해저인 빅 씨가 고인물 님의 평판도를 -1 내렸습니다>

    .

    .

    NPC들이 나의 평판도를 깎아내리고 있다.

    “으악! 오해야!”

    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NPC들의 눈초리는 가늘어져 있었다.

    [여자를 울리면 안 되지. 자네 쓰레기구만? 남자라면 무릇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오죽하면 뒤에 서 있던 해저왕 플라튠마저 헛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유다희는 숫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다.

    “왜 히끅 자꾸 흐윽 나를 흑 방해하는 흐끅 거야! 나는 끕 너한테 끄읍 아무것도 히끅 잘못한 게 흐끅 없었었는데!”

    먼저 덤벼온 잘못은 인정하지만 이렇게 큰 보복을 당할 정도로는 잘못하지 않았다.

    뭐 그것이 그녀 나름대로의 주장인 듯싶다.

    “…….”

    나는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뭐 여기서 울든 드러눕든 그냥 놔두고 가면 될 일이지만, NPC들에게 자꾸 평판도를 깎이는 것은 곤란하다.

    “잠깐 따라와.”

    결국, 나는 유다희의 손목을 잡고 왕성의 기둥 뒤로 끌고 갔다.

    “끄윽… 끕. 히끅!”

    유다희는 울먹거리면서도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이내, 나는 그녀와 단 둘이 기둥 뒤에 서 있게 되었다.

    나는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쳐.”

    “히끅.”

    “그치라고.”

    “…!”

    비로소 유다희는 눈물을 뚝 그쳤다.

    마음이 약해져 있는 상태라서 그런가?

    그녀의 눈동자에 공포라는 감정이 조금은 깃든 것 같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레이드는 메인 퀘스트가 아니야.”

    “……?”

    “아주 작고 작은 전초 단계에 불과하다.”

    내 말을 들은 유다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A+등급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이 작은 단계라니?

    나는 유다희의 말문을 막아 버린 채 말을 이어갔다.

    “너를 여기서 만난 것은 다소 의외이긴 했지만 별로 위협적인 변수는 아니야. 아직까지 모든 것은 다 내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다. 좀 전 레이드의 실패 역시도 다 노림수지.”

    “…….”

    “아까의 레이드에서 조타실을 부순 건 내가 맞아. 하지만 나는 너를 방해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비로소 그녀가 딸꾹질을 멈췄다.

    아직 눈가가 붉고 촉촉하긴 했지만.

    “…그럼?”

    유다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내 얼굴을 올려다본다.

    “…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렇게 된 거 상황을 아예 확실하게 틀어쥐어야겠다.

    나는 짧고 간략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틀란둠의 국왕 플라튠을 방해하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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