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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39화 (139/1,000)
  • 139화 대심해의 유령도시 (3)

    게임을 7만 시간 정도 플레이하다 보면 대개 변수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모든 것이 상정 범위 내이기 때문이다.

    과거로 회귀해 게임을 시작한 지 약 1년.

    지금까지 모든 상황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톱니바퀴처럼 흘러왔다.

    …….

    하지만.

    지금 이 상황만큼은 분명히 내 예측을 벗어나고 있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흥! 왜? 나는 여기 오면 안 되냐?”

    유다희는 콧방귀를 뀌며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도끼에 주목했다.

    ‘아!’

    방심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었던 것을!

    ‘왜 저걸 생각 못했지?’

    유다희가 지금 들고 있는 아이템을 보자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 깊은 심해까지 어떻게 올 수 있었는지.

    -<근성의 얼음도끼> 양손무기 / B

    근성가이들에게는 수없이 많은 인내의 과정이 닥친다. 이 단단한 얼음도끼는 그 과정을 조금 더 잘 버틸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공격력 +500

    -얼음 공격력 +200

    -수리불가(내구도 980/7,800)

    -특성 ‘근성’ 사용 가능(특수)

    이것은 북대륙의 오픈필드 ‘가혹한 설산’, 대격변 이후에 등장하는 던전 ‘얼어붙은 부패’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근성가이 펭귄’을 잡았을 시 희박한 확률로 떨어지는 아이템이다.

    공격력 등의 옵션이 꽤 좋은 편이긴 하지만, 아이템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통 근력으로는 들 수도 없는데다가 ‘수리불가’라는 디메리트가 너무 커서 아예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잡템.

    심지어 붙어 있는 특수옵션도 그다지 가치 있지 않다.

    ‘흠… ‘근성’ 특성은 한 종류의 지형 데미지를 랜덤으로 무시할 수 있는 능력… 그렇다면…….’

    나는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유다희가 바다에 빠져 가라앉는 순간, ‘근성’ 특성이 발현되어 물로 인한 지형 데미지를 0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하필 ‘물’ 데미지를 말이다.

    우연(偶然).

    그것으로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아니, 물로 인한 지형 데미지가 0이라고 해도… 심해까지 아무한테도 공격을 안 받고 내려왔다고?”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유다희는 침을 한번 퉤 뱉었다.

    “그것 때문에 숨죽이고 달달 떠느라 24시간 동안 아주 그냥 개고생했다! 도끼의 내구도도 형편없어졌다고!”

    “…그거야 조용히만 하면 되니까 그렇다고 쳐도, 호흡은?”

    “그건 ‘얼어붙은 마을’에서 네놈들이 미처 못 찾고 간 ‘잠수병 치료제’로 해결했지. 그게 있으면 육지의 공기를 마실 수 있으니.”

    그녀의 말을 듣자 나는 더욱 멍해졌다.

    깊이가 얼마나 될지 대중도 없는 바다 밑으로 그저 가만히 가라앉기만 했단 말인가?

    그것도 까마득한 고랭크 괴물들이 우글우글거리는 어둠 속을 24시간 동안이나!?

    드레이크도 눈을 크게 뜨고 유다희를 바라본다.

    그 역시도 심해로 내려가는 동안 3일 동안을 계속 접속해 있었기에 심해의 그 압도적인 공포를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드레이크의 경우에는 중간중간 로그아웃이 가능했고 또 3일이라는 정확한 마감 기한도 있지 않았던가?

    그에 비해.

    유다희는 24시간을 통째로 심해에서 보냈다.

    그것도 심해 곳곳을 헤엄쳐 다니는 거대한 괴물들을 피해, 한 점의 빛도 없는 공간에서, 아무런 기약도 마감 기한도 알지 못한 채로!

    도끼의 무게가 하도 무거우니 공기방울을 타고 내려가는 것보다 침강 속도가 훨씬 빨랐던 모양이다.

    우리보다 이틀이나 일찍 도착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보통 깡과 악으로는 불가능한 루트다.

    확실히, 유다희의 근성은 그야말로 일반인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것이었다.

    “후후후, 맵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해서 참아 봤지. 버그인가 싶기도 했고. 근성 특성을 하도 발현하는 바람에 도끼 내구도도 이 모양이야. 내구도가 거의 다 되어서 포기할까 했는데, 마침 딱 이 도시가 보이더라고?”

    그녀는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아무래도 나보다 이틀이나 먼저 이 도시에 도착한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갈색의 병 속에 저장되어 있는 럼주였다.

    -<레흐락의 럼(Rum)> / D

    대해적 레흐락이 목숨 다음으로 아꼈던 명주.

    알코올 도수 105%의 위엄을 자랑하는 독주 중의 독주(毒酒)로 너무 많이 마셨다간 실명한다.

    “이 도시는 ‘레흐락의 술’이 없으면 볼 수 없어. 너는 어째서 이 해저인들이 보이는 거냐?”

    내가 묻자, 유다희는 중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지랄, 내가 그걸 너한테 왜 알려 주냐?”

    그녀는 정보 면에서 나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몰라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얼추 답은 나왔다.

    “술 먹고 접속했구만?”

    “…….”

    내 말에, 유다희의 얼굴은 잠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렇다.

    레흐락의 술을 구하기 위해서는 A급 몬스터인 ‘지옥주정꾼 대게’를 죽여야 한다.

    (재수 없으면 나처럼 A+급 몬스터를 상대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자신이 없는 이들은 종종 ‘꼼수’를 부리고는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음주(?) 플레이다!

    놀랍게도.

    현실에서 술을 마신 채 접속하면 게임 속에서도 술 아이템을 소모한 것과 비슷한 효과가 나타난다.

    혈중 알코올 농도를 0.02% 정도로 맞춘 채 게임에 접속하면 아슬아슬하게 기준치를 만족한 채 접속이 가능한 것이다.

    유다희는 술을 마시고 접속한 덕분에 해저도시의 번화한 모습을 보게 된 듯싶었다.

    “쳇, 그때 퀴즈대회에서 문제로 나왔던 BGM을 끝까지 들어보려고 일부러 접속불가 커트라인에 살짝 못 미치게 마셨던 건데. 이런 게 보이지 뭐야?”

    일단 폐허가 된 해저도시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 뒤부터는 로그인, 로그아웃이 자유로우니 틈틈이 로그아웃해서 술을 마셔 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게임 캡슐 사용 설명서 안 읽어봤냐? 술 먹고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문도 쓰여 있는데…….”

    “그거 다 지키면서 가전제품 쓰는 사람이 어딨냐?”

    “…….”

    하여튼 이 여자… 안전불감증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

    나는 유다희의 몸 전신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어디보자, 해저도시의 첫 입성자에 아틀란둠의 첫 용병이니 특전으로 ‘심해’ 특성은 받았겠고… 산소 코팅도 이미 했군. 왕성에서 제공한 서비스인가?’

    헛웃음이 나온다.

    운과 센스, 근성이 결합해 낳은 콜라보레이션.

    사람 일이 풀리려면 이런 식으로 풀릴 수도 있구나 싶었다.

    뭐 아무튼.

    “…….”

    “…….”

    나와 유다희의 사이에는 기묘한 침묵이 흐른다.

    이내, 유다희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뭐, 일단은 휴전인 셈 치지. 마교도 전멸당했고, 나도 어쩌다 보니까 히든 퀘스트에 휘말려서 말야. 지금 출항을 해야 하거든.”

    “…….”

    “네놈은 갔다 와서 처치해 주마. 각오하라고.”

    유다희는 함선 좌측에 있는 포열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힘차게 되돌아 명령을 내렸다.

    “1함대 출격!”

    그러자, 이내 함선이 굉장한 기세로 지느러미돛을 펼친다.

    출렁- 철썩-

    수로 밑에 고여 있던 바닷물이 요동치며, 함선은 천천히 심해의 해초벽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쩌어억-

    해초벽이 세로로 길게 갈라진다.

    철썩-

    안에서 밀어 들어오는 바닷물, 하지만 함선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 파도를 역으로 타 넘어간다.

    레이드 출항이 시작됐다!

    “적을 섬멸하러 가자!”

    유다희는 해저인 부하들을 이끌고 배를 움직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뒤에 있는 나를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음은 너다.’

    유다희의 의지는 시선을 통해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일이 이상하게 꼬였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드레이크는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예상외긴 하지만, 너무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저 여자 적이긴 해도 500명 이상 되는 추종자들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했으니… 나름 통솔력은 있는 것 같은데?”

    500명 이상 되는 파티원들을 일사분란하게 조종해 최대의 효과를 끌어낼 수 있는 공대장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유다희는 그런 능력을 갖춘데다가 본인의 전투력까지 뛰어난 몇 안 되는 무장(武將).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걱정되는 거라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유다희가 그냥 그저 그런 플레이어였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도 않는다.

    나는 뛰기 시작했다.

    “가자! 우리도 저 배에 타야 해!”

    이대로 유다희를 놓칠 수는 없다.

    나를 죽이기 위해 이 깊은 심해까지 추적해 온 여자가 아닌가?

    근성, 승부욕, 통솔력, 전투력, 인내력, 게이밍 센스, 거기에 말도 안 될 정도로 좋은 운빨까지.

    유다희라면 충분히 해전을 승리로 이끌 만하다.

    …….

    그리고.

    바로 그것이 지금 내가 그녀를 방해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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