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37화 (137/1,000)
  • 137화 대심해의 유령도시 (1)

    -<레흐락의 럼(Rum)> / D

    대해적 레흐락이 목숨 다음으로 아꼈던 명주.

    알코올 도수 105%의 위엄을 자랑하는 독주 중의 독주(毒酒)로 너무 많이 마셨다간 실명한다.

    현실 세계의 최상급 럼주가 가지고 있는 맛을 거의 그대로 재현해낸 아이템.

    …알콜 도수가 어떻게 105%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독한 술이다.

    나는 이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챙긴 뒤 해저도시 아틀란둠으로 돌아왔다.

    도시는 여전히 어둡고 음침한 폐허이다.

    물이끼들이 뿌리는 어슴푸레한 빛 아래 우둘투둘한 따개비와 산호초.

    반쯤 무너져 버린 성벽과 물고기들의 집이 되어 버린 건물들.

    드레이크는 이 구태의연한 유적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정말로 이곳에 NPC들이 살긴 사는 건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어조다.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레흐락의 럼주 한 병을 건넸다.

    “원샷.”

    “……?”

    드레이크가 럼주를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시시콜콜한 설명 대신 행동으로 말했다.

    꿀꺽- 꿀꺽- 꿀꺽-

    목젖이 요동치며, 지독한 럼주가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드레이크는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나의 행동을 따라했다.

    이내, 우리는 각자 1병씩의 럼주를 비웠다.

    “으윽!”

    드레이크는 눈에서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두 눈을 뜨겁게 달군 쇳조각으로 지지는 듯한 고통.

    과연 레흐락의 럼은 지독한 독주였다.

    애초에 아이템 설명에도 적혀있지 않은가? ‘너무 많이 마셨다간 실명한다’라고.

    “누, 눈이… 눈이 안 보이는데?”

    드레이크는 시야가 온통 캄캄하게 물드는 것을 느끼며 경악했다.

    하지만.

    “…….”

    나는 조용히 폐허의 돌무더기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뭘 기다리냐고?

    “…보인다.”

    시야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린다.

    이내, 검은색으로 물들었던 시야가 천천히 밝아져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

    드레이크는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음산하고 황폐한 폐허.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이! 질 좋은 고기가 들어왔어! 저녁 먹으러 오라고!]

    [오늘 밤 맥주 한 잔 어때? 포커나 치면서 밤새 놀아보자고!]

    [거기 서! 소매치기야! 저기 도망간다! 아이고, 어떻게 해!]

    [어휴, 시끄러! 저기 골목에서 노는 애들 좀 어떻게 해 봐요! 잠을 못 자겠네!]

    도시 곳곳에서 들려오는 활기찬 소리.

    이제야 해저의 주민들이 눈에 보인다.

    수백 명이 넘는 NPC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골목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건물들의 외형도 완전히 달라졌다.

    높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세련된 기교를 뽐낸다.

    거리에 깔려 있는 도로는 깔끔하고 또 번화했다.

    천장은 아득한 심해, 언제나 캄캄한 밤이다.

    보라색, 푸른색 빛을 내뿜는 산호나 진주들이 건물의 외벽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덕분에 도시는 온통 찬란한 빛무리로 가득하다.

    마치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번화가의 밤거리를 보는 듯한 풍경.

    을씨년스러운 유령도시가 순식간에 찬란한 해저문명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드레이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말도 안 돼! 왜 아까는 안 보였지!?”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이걸 마셔야 보인다고.”

    내가 손에 쥐고 흔드는 것은 레흐락의 럼주.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하는 기묘한 술이다.

    “때론 취해야 보이는 것이 있는 법이지.”

    나는 딸꾹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한편.

    드레이크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그는 나에게 재차 물었다.

    “…이게 현실인가? 아니면 환각?”

    나는 손사래를 쳤다.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자기가 믿고 싶은 쪽으로 믿으면 그만이야. 나는 그냥 레벨업이나 하고 아이템이나 좀 얻으면 그만일 뿐.”

    그렇다.

    이곳이 실제든 환상이든, 현실이든 게임이든.

    내가 재밌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 아니겠나?

    굳이 실체를 따지고 밝히려 해봐야 시간만 아까운 일.

    나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먼저 이 옷은 벗어 버리고.”

    내 몸을 덮고 있던 1회용 산소 코팅 셔츠.

    나는 그것을 훌훌 벗어 버렸다.

    “제대로 된 산소 코팅이 필요한 시점이지.”

    나는 드레이크를 데리고 골목 구석에 있는 한 건물을 찾아갔다.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는 간판, 대장간이다.

    나는 대장간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눈이 툭 튀어나온 생선 대장장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족보행에 성공한 우럭같이 생긴 모습.

    이곳 해저인들은 다 이렇게 생겼다.

    그는 나를 보며 호통쳤다.

    [아앗!? 네놈들은 아까 우리 집 궤짝에서 마음대로 산소 코팅 셔츠를 훔쳐간 녀석들이구나!]

    “미안해요. 지금 값을 치르러 왔어요.”

    나는 대장장이에게 아까 궤짝에서 마음대로 꺼내간 셔츠의 값을 치렀다.

    “아, 그리고. 제대로 된 산소 코팅을 받고 싶은데.”

    [그런 거라면 쉽지. 80만 골드다.]

    이윽고, 대장장이는 자신의 아가미에서 점액 같은 것을 짜내 풀무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땅! 땅!

    망치로 점액을 때리자, 그것은 이내 투명한 막처럼 얇게 퍼졌다.

    이내 투명한 속옷 비스무리한 것이 완성되었다.

    “이게 진짜 제대로 된 활동복이지.”

    나는 전신을 산소로 코팅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심해의 환경에서도 제대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       *       *

    드레이크는 바뀐 아틀란둠의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 했다.

    나도 아틀란둠에 내려온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기에 기꺼이 승낙했다.

    먼 훗날, 이곳 아틀란둠은 고인물들의 정모 장소 비슷하게 변해 버린다.

    전부 다 대머리에 알몸,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피부색도 옐로, 골드, 핑크 등 기괴하게 물들이고 다닌다.

    손에 든 것은 대부분 촛불이나 채찍 등…….

    [게임 플레이한 지 10만 시간 정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콘텐츠가 다 떨어졌어요.]

    [운빨좆망겜이 다 그렇죠 뭐, 어휴...]

    [진짜 GM은 뭐하나 몰라? 새로운 콘텐츠 안 추가하고. 즐길거리가 이렇게 부족한데!]

    [제가 비록 하루에 20시간씩 게임만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게임이라면 계속 재밌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슬슬 질릴락 말락 하네요.]

    환경이 가혹하고 나오는 몬스터들의 레벨이 높다 보니, 아틀란둠은 고인물들이 북적북적 모여들기에 최적의 장소가 되었다.

    심지어는 방어력과 HP를 극한까지 올려 심해에서 산소코팅 없이 버티는 M변태 탱커들도 존재할 지경이었으니 말 다한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고인물의 정모장소가 되기 전의 풋풋한 아틀란둠이다.

    “…….”

    나는 새삼 감회에 젖어 아틀란둠을 둘러보았다.

    이내, 우리는 아틀란둠 외곽에 있는 맥주집에 도착했다.

    “여기 굴 맥주가 또 기가 막히지.”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굴 맥주 500cc 두 잔을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품이 부글부글 끓는 노오란 맥주 두 잔이 우리 앞에 놓인다.

    맥주에서는 미묘한 비린내가 났다.

    꿀꺽-

    드레이크는 굴 맥주를 들이켰다.

    “우웩! 이게 뭔 맛이야!”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먹자마자 구역질을 했다.

    나는 낄낄 웃었다.

    “기가 막히다고 했잖아.”

    나는 맥주를 옆에 있는 하수도에 부어버렸다.

    그러자, 하수도를 지나다니는 작은 게와 새우들이 굴 맥주를 마시러 뽀시락 뽀시락 몰려든다.

    [어이쿠 골든벨 감사합니다!]

    [형씨 통이 크군! 잘 먹겠소!]

    작은 게와 새우들은 하나같이 정장을 입었다.

    그들은 쓰고 있던 모자를 들어 보이며 나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건넸고, 이내 돌바닥의 홈을 타고 흘러가는 맥주를 게걸스레 퍼 먹는다.

    한편.

    청소를 하고 있던 개복치 알바생은 내가 바닥을 어지럽히는 것을 보고 뒷목을 잡은 채 돌연사했다.

    나는 굴 맥주를 두고 일어난 일련의 소동들을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너무 맛없어서 명물이 될 아이템이지. 하지만 해저의 NPC들에게는 인기만점이라고.”

    한편.

    드레이크는 주점 바깥을 지나다니는 해저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새우, 복어, 불가사리, 상어, 멍게, 바지락, 곰치…….

    다양한 어류들이 이족보행을 하고 있었다.

    누구는 드레스, 누구는 갑옷, 누구는 턱시도.

    복장도 생김새도 참으로 다양하다.

    어떠한 차별도 배척도 없는.

    모든 해양생물들의 낙원, 해산물토피아!

    그것이 바로 아틀란둠이다.

    드레이크는 눈앞을 지나가는 거대한 콧수염 신사를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아마도 점잖게 늙은 흰수염고래인 듯싶다)

    “정말 모든 바다 생명체가 다 있군.”

    “…아니, 모든 바다 생명체가 다 있는 건 아니지.”

    나는 드레이크의 말에 짧은 반박을 남겼다.

    내 말을 들은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거리의 군중들을 살핀다.

    “……!”

    이내, 눈썰미 좋은 드레이크는 유달리 보이지 않는 생물 하나를 찾아냈다.

    “‘두족류(頭足類)’가 안 보이는군.”

    오징어나 문어 등은 바다 하면 으레 떠오르는 대표적인 생물 중 하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넓은 아틀란둠의 거리에는 그 흔한 두족류가 하나도 눈에 띄지 않고 있었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느덧 오후 8시 30분이다.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됐는데?

    바로 그때.

    내 예상이 맞다고 맞장구라도 치듯, 주점의 테라스 너머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챙- 챙- 챙- 뿜- 뿜- 뿜-

    요란한 악기소리들이 들리며, 저 멀리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줄을 지어 걸어오기 시작했다.

    시가지 행군. 병사들은 징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시민들 사이를 행진한다.

    그리고.

    행군 대열의 맨 앞에 있는, 톱상어의 모습을 한 지휘관이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아틀란둠의 위대한 국왕 ‘플라튠’ 님을 위해 싸울 멋진 군인을 모집하겠다!]

    그렇다.

    해저도시 아틀란둠은 지금 전쟁 중이었다.

    그들은 지금 전장으로 나갈 병사를 모집하러 나온 듯하다.

    나는 톱상어 해저인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요! 입대 지원합니다!”

    현실에서였다면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않을 말.

    하지만 이곳은 전혀 다른 세계이다.

    이내, 톱상어 해저인은 나를 보며 마음에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너는 이곳 주민이 아닌 것처럼 생겼군! 이곳에 녹아들기 위해선 먼저 병역 문제를 해결해야겠지!? 이번 전쟁에서 폐하를 위해 싸운다면 특별히 시민권을 줄 수도 있어!]

    그는 커다란 몸집을 앞세워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며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하지만 우리는 약한 군인 따위는 필요 없다! 우리 해병대에 입대하고 싶다면 그만한 각오를 보여야 할 거야! 대답해 봐라! 너는 왜 군에 입대하고 싶어 하는가!]

    그러자.

    내 귓가에 여러 알림음들이 든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심해의 악몽’ 006- 해저도시 아틀란둠의 군단장 ‘톱상어 귀스타프’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합시다!>

    [선택지 1: 입대하면 먹여주고 재워주잖아요.]

    [선택지 2: 집에서 젓가락 가져왔는데 군대 안에서 써도 되나요?]

    [선택지 3: 군단장님, 저 휴가 좀 보내주십시오.]

    [선택지 4: 잘못들었습니다?]

    [선택지 5: 네?]

    [선택지 6: 해물비빔소스 조와요~]

    .

    .

    [선택지 108: 국방의 의무 축하해. 해피포인트로 케이크 사갈게. 좋아 너무 행복해]

    108개가 넘는 엄청난 수의 선택지들이 눈앞에 뜬다.

    째깍째깍째깍째깍…….

    반면 시간은 엄청나게 촉박하다.

    주어진 시간은 겨우 5초.

    이 안에 108개의 선택지 중에서 톱상어 귀스타프의 마음에 쏙 들 만한 선택지를 찾아내 대답해야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당황해서 아무 선택지나 찍었겠지만…….

    나는 아니다.

    “제가 군에 입대하는 이유는 귀스타프 군단장님의 명령에 따르다가 장렬히 전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2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잽싸게 ‘91번 선택지’를 골라냈다.

    그러자.

    빵긋-

    톱상어 귀스타프의 양 입꼬리가 헤벌쭉 찢어진다.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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