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36화 (136/1,000)

136화 난파선의 럼주 (2)

<지옥주정꾼 대게> -등급: A / 특성: 물, 심해, 주폭(酒暴)

-서식지: 독주(毒酒)의 무덤

-크기: 4.5m.

-과거 대해적 레흐락의 배를 따라다니며 그가 흘린 술을 받아먹곤 하던 작은 게.

시간이 많이 지나 레흐락은 죽었지만, 이 게는 친구가 나눠주었던 술맛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오지 않는 레흐락을 기다리며 그가 남긴 럼주를 지키고 있다.

럼주가 가득 든 궤짝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커다란 게였다.

놈은 배를 조종하는 키, 혹은 가시가 삐죽삐죽 돋은 자동차 핸들, 혹은 어린아이가 도화지 위에 삐뚤빼뚤 그려 놓은 태양 같이 생겼다.

둥그런 게딱지 주위로는 굵고 단단한 가시들이 튀어나와 있었고 그 아래로 굵고 짧은 다리들이 어지럽게 움직인다.

앞에 툭 튀어나와 있는 거대한 집게발은 어찌나 육중하고 퉁퉁한지 마치 워해머처럼 보일 정도였다.

[꾸륵! 꾸르르륵!]

놈은 커다란 집게발을 망치처럼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

“제길!”

드레이크는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깽창!

궤짝 속 유리병 몇 개가 깨지며, 럼주들이 자욱하게 퍼진다.

알코올 도수 105%의 무시무시한 독주!

탁하게 물든 바닷물이 드레이크의 콧속으로 들어가자.

“헉!?”

순간 발이 탁 풀린다.

드레이크는 물러서려던 자세 그대로 휘청거렸다.

상태이상 ‘만취(滿醉)’

아주 골치 아픈 상태이상.

몸이 자신의 통제를 잃고 일정 %의 확률로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터억-

나는 드레이크의 허리를 잡고 재빨리 뒤로 피신했다.

“레흐락의 럼주를 마시면 3초 정도 만취 상태에 빠져. 조심해.”

“으, 으음. 이제는 괜찮다. 엄청나게 독한 술이로군?”

“맞아. 게이머의 간 수치를 따져서 %확률이 정해지니 유념하도록.”

현실에서 술을 잘 못 먹는 사람이라면 게임 속에서도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는 참 쓸데없이 고증이 잘되어 있다.

한편.

대게는 우리를 쫓아 오크통 밖까지 기어 나왔다.

놈은 넓은 지형으로 나오자마자 가시투성이의 몸을 회전시켰다.

콰콰콰콱-

동시에 맹렬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굴러오기 시작했다.

“이런 잡몹은 굳이 상대할 가치가 없지. 나는 술만 훔치면 그뿐이란 말씀.”

나는 대게를 살살 유인했다.

그리고는 난파선 기준으로 7시 방향, 급경사가 지는 돌구릉 아래로 잽싸게 숨어 버렸다.

우당탕!

게는 멋모르고 돌진해 오다가 그대로 경사에 미끄러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내, 놈은 저 깊은 해저의 바닥에 거꾸로 뒤집혀 바둥거리게끔 되었다.

“이제 가자. 술을 챙겨야지.”

나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뒤집힌 채 게거품을 부글부글 뿜어내는 대게를 보며,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잡지 않아도 괜찮나?”

“뭐하러? 저 녀석은 물리방어력이 변태같이 높아서 잡으려면 오래 걸려.”

“그래도 A등급 몬스터인데, 잡으면 뭔가 특전이……”

나는 드레이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저 녀석은 어차피 심해 먹이사슬의 최하위권이야. 더 좋은 특전을 주는 몬스터들이 드글드글한데 굳이?”

내 말에 드레이크는 입을 반쯤 벌렸다.

“저 정도 급의 몬스터를 잡몹 취급하다니, 대단하군… 내가 보기엔 고르곤보다도 강한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지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 판단은 틀린 것이었다.

콰쾅!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졌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돌구릉 아래로 굴러 떨어졌던 대게가 몸을 뒤집었다.

“어!? 저 자식은 원래 한번 뒤집어지면 못 일어나는데?”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람?

나와 드레이크는 황급히 뒤돌아 돌구릉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놀랄 만한 광경이 일어나고 있었다.

오잉? 대게의 상태가……?

뿌직- 뿌지직- 뿌득!

지옥주정꾼 대게는 허물을 벗고 있었던 것이다!

이내, 놈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낡은 껍데기 속에서 전혀 새로운, 더욱 더 크고 강력해진 육체를 끄집어냈다.

<지옥바퀴 대왕게> -등급: A+ / 특성: 물, 심해, 백전노장, 지진

-서식지: 독주(毒酒)의 무덤, 블루홀 ‘깊은 구역’, 침수림 수몰지대

-크기: 8m.

-지옥주정꾼 대게가 오래 묵으면 지옥바퀴 대왕게로 진화한다. 수백 번의 허물을 벗는 과정에서 껍데기는 더욱 단단해지고 두터워졌다. 심해 깊은 곳에 있는 동굴 등에 주로 서식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오는 길 잃은, 혹은 무모한 생명체를 잡아먹는다.

진화(進化)!

수많은 전투로 인해 경험치가 많이 쌓인 몬스터가 더욱 상위 개체로 변신하는 매우 드문 현상.

“세상에… 내가 야생 몬스터가 진화하는 걸 직접 보게 되다니.”

나는 황당한 마음으로 입을 벌렸다.

지난 15년간 게임을 하면서 야생 몬스터가 진화하는 것은 몇 번 보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는 쌍뿔칠흑 정도가 거의 유일하겠지.

그 희귀한 광경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왕게라…….”

나는 눈앞에 있는 거대한 심해 몬스터를 향해 눈을 빛냈다.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저 녀석이라면 충분히 잡을 가치가 있다.

물론 좋은 아이템을 떨구기 때문이다.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잡고 간다.”

나는 돌구릉 아래로 펄쩍 뛰어내려 대왕게의 앞으로 착지했다.

“우와…….”

가까이에서 본 지옥바퀴 대왕게는 정말이지 거대했다.

몸 전체가 바퀴처럼 둥글었는데 마상창처럼 길고 두터운 가시들이 게딱지를 중심으로 빼곡하게 돋아나 있다.

가뜩이나 육중하던 집게발은 더욱 커졌다.

집게발 하나가 어지간한 SUV 승용차만큼이나 커다랗다.

부웅-

대왕게는 거대한 집게를 해머처럼 휘둘렀다.

술을 지키겠다는 강력한 의지!

쿵- 콰콰쾅!

놈이 집게로 지면을 두드리자 묵직한 해진이 일어나 돌구릉 전체를 무너트린다.

“그래, 바로 그 힘이 탐나는구나.”

나는 대왕게의 집게발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놈이 일으키고 있는 해진‘(海震)’

저 힘을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마동왕 계정으로 활동할 때 큰 힘이 될 것이다.

‘곧 프로리그 10도 대회도 열리니까.’

나는 대왕게가 집게발을 휘두르고 난 뒤 텅 빈 옆구리 공간으로 뛰어들었다.

“술만 뺏어가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 네 목숨도 빼앗아 주지!”

나는 마을을 습격한 악당1 처럼 낄낄 웃으며 깎단을 뽑아들었다.

한편.

드레이크는 쇠뇌를 들어 대왕게의 게딱지를 겨눈다.

“내가 엄호하지.”

하지만, 나는 손을 뻗어 드레이크의 공격을 만류했다.

내 머릿속에는 15년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과거. 나는 내가 이끌던 길드의 공격대를 데리고 지옥바퀴 대왕게와 싸운 적이 있다.

그때는 멋모르고 놈의 게딱지를 마구 두드려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지옥바퀴 대왕게의 게딱지는 맞으면 맞을수록 더 단단해진다. 노리려면 관절 부분만 노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대왕게의 3번째 다리 하관절을 깎단으로 찔렀다.

뿍- 뿍- 뿌득!

계속되는 관절 노리기.

나의 집요한 공격에 대왕게는 꽤나 당황한 듯싶다.

그도 그럴 수밖에.

‘백전노장’ 특성 때문에 맞으면 맞을수록 단단해진다고는 하지만, 관절 자체는 너무 단단하면 또 안 되는 부위가 아닌가.

이내, 대왕게는 지나치게 단단해진 관절부위 때문에 움직임이 많이 둔해졌다.

콰쾅!

놈은 나를 향해 거대한 집게 해머를 내리찍었다.

속도도 속도지만 크기도 크기인지라, 쉽게 피할 수는 없어 보인다.

“흡!”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씨어데블의 점액이 나의 몸을 질척하게 덮는다.

미끄덩-

대왕게의 집게는 내 몸을 타고 그냥 미끄러져 버렸다.

기우뚱-

집게 해머 때문에 무게중심을 잃은 대왕게는 내 몸에서 흘러나온 점액을 밟고 미끄러졌다.

그 사이, 나는 깎단을 들어 놈의 3번째 다리 하관절을 기어코 끊어 놓고야 말았다.

잘려나간 게의 다리에서 시퍼런 핏물이 배어나온다.

나는 거기에 대고 바로 어둠 대왕의 권능 ‘혈액포식자의 링’을 사용했다.

꿀꺽- 꿀꺽- 꿀꺽- 꿀꺽-

대왕게의 다리에서 파란 핏물이 빠져나와 나의 열 손가락으로 빨려든다.

“으윽! 비려!”

나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게 내장을 바닷물에 씻어 바로 건져먹는 맛이 난다.

하지만 맛이 없다고 해서 흡혈을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

동시에, 나는 깎단에 샌드웜의 특성인 ‘가뭄’과 바실리스크의 특성인 ‘맹독’을 걸었다.

푸욱-

깎단은 대왕게의 잘려 나간 다리 부분을 뚫고 연한 살점을 헤집어 놓았다.

번쩍-

이내, 깎단의 ‘능지처참’ 특성마저 발휘되었다.

[뿌그르르륵!]

대왕게는 집게발을 맹렬하게 휘두르며 저항했다.

하지만.

퍼퍽!

이내 날아든 드레이크의 화살 두 발이 대왕게의 양 눈을 파괴한다.

“……!”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대왕게는 크기는 거대하지만 눈알만큼은 일반적인 게와 비슷할 정도로 작다.

한데 이 격전 중에서 대왕게의 두 눈알을 정확히 파괴하다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드레이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눈은 물렁물렁한 모양이군.”

“…….”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정확한 에임(Aim)이다.

[꾸르륵! 꾸륵!]

눈이 사라지자, 대왕게는 말 그대로 눈먼 공격을 날린다.

대왕게는 본디 시력이 굉장히 좋은 편인지라 공격 시 시각에 기대는 측면이 큰 몬스터이다.

그런 놈이 눈을 잃었으니 명중률이 나올 리 만무했다.

결국, 계속되는 도트 데미지 끝에.

쿠-웅!

지옥바퀴 대왕게는 육중한 몸을 해저의 바닥에 뉘이고 말았다.

-<이어진>

LV: 41

호칭: 바실리스크 사냥꾼(특전: 맹독) / 메두사 킬러(특전: 마나 번) / 샌드웜 땅꾼(특전: 가뭄) / 어둠 대왕 시해자(특전: 선택) / 씨어데블 격침자(특전: 심해) / 대망자 묘지기(특전: 언데드) / 지옥바퀴 대왕게 잡이(특전: 백전노장)

레벨이 1올랐다.

새로 생긴 호칭은 ‘지옥바퀴 대왕게 잡이’

특전은 ‘백전노장’ 호칭이다.

백전노장 호칭은 다양하게 발현되는데 맞으면 맞을수록 물리방어력이 올라간다거나, 최대 HP가 올라간다거나 하는 식이다.

애초에 ‘데미지를 입지 않는’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는 특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땅그랑!

대왕게가 토해놓은 아이템은 꽤나 좋은 것이었다.

-<대왕게 집게해머 건틀릿> 한손무기 / A+

단단한 키틴질 갑피에 덮여있는 건틀릿. 육중한 외형만 놓고 보면 망치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집게 안으로 들어온 것은 반토막 난다.

-물리 공격력 +3,600

-특성 ‘지진’ 사용 가능(특수)

심플한 옵션.

깡 공격력 3600에 ‘지진’ 특성이 붙었다.

“마동왕 콘셉트에 딱이로군.”

부캐릭터 ‘마동왕’

묵직한 한 방을 자랑하는 승부사형 캐릭터.

현재 프로리그에서 단연코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고 있는 내가 아닌가!

“나중에 프로리그에 나갈 때가 기대되네.”

나는 집게발 건틀릿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윽고.

전리품을 챙길 차례가 왔다.

드레이크는 대왕게를 잡고 얻은 새로운 마름쇠에 크게 기뻐했다.

“오늘은 수확이 많은 날이로군.”

헤비 게이머이자 애주가이기도 한 드레이크.

그는 난파선 속의 커다란 오크통을 향해 눈을 빛냈다.

파수꾼을 잃어버린 보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레흐락의 럼(Rum)> / D

대해적 레흐락이 목숨 다음으로 아꼈던 명주.

알코올 도수 105%의 위엄을 자랑하는 독주 중의 독주(毒酒)로 너무 많이 마셨다간 실명한다.

나는 궤짝 속에서 럼주 두어 병을 챙겼다.

따개비와 물이끼에 뒤덮인 병.

그리고 그 안에서 호박색으로 빛나고 있는 럼주.

병을 슬쩍 흔들자, 럼주는 갈색의 병 주위를 구르며 끈적한 점도를 뽐낸다.

나는 이 농밀한 술을 바라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레흐락의 술을 손에 넣었으니 됐다. 이제 해저도시의 주민들을 만날 수 있겠어.”

대심해에 잠든 유적.

그 으스스한 폐허로 되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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