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30화 (130/1,000)
  • 130화 고인물 퀴즈대회 (1)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

    전체 넓이 365,059.01㎡. 높이 1,200m의 이 커다란 얼음섬은 결국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뭐. 애초에 섬이 아니라 거대한 유빙 조각이었던 만큼.

    가라앉았다기보다는 산산조각 나 바다 위로 흩어져 버렸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리라.

    악마의 만찬 호는 섬에 있던 그 누구도 구조하지 않은 채 육지로 뱃머리를 돌려 버렸다.

    얼음만 둥둥 떠다니는 얼음 바다 위, 섬에 있던 모두는 그대로 이 풍랑 속에 내팽개쳐지게 되었다.

    저주받은 유빙은 24시간 뒤에 다시 재생되겠지만, 이 격렬한 파도와 차가운 수온을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 용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

    그럼 나는 어떻게 되었냐고?

    *       *       *

    차가운 어둠 속.

    나는 현재 바다 밑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물론, 영화 타이타닉의 디카프리오 같은 모습은 아니다.

    -<심해의 정수> D

    심해의 기운이 담긴 구슬이다.

    씨어데블이 죽어가면서 드랍한 아이템.

    이것은 씨어데블의 점액으로 만든 커다란 구슬 잠수함으로 심해 맵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이동수단이다.

    ‘말하자면, 엘리베이터랄까?’

    그렇다.

    씨어데블은 해수면 위와 심해의 바닥을 잇는 엘리베이터 역할을 하는 몬스터이다.

    심해로 가는 방법은 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것은 개중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다.

    ‘씨어데블에게 제물로 바쳐져서 심해로 바로 다이브하는 방법도 있지.’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방법이기에 기각.

    뭐 자신의 육체가 씨어데블의 힘과 심해의 수압을 버텨 낼 정도로 충분히 강하다면야 시도해 봄직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HP가 두부나 다름없어서 조금 곤란한 방법.

    대부분의 경우에도 씨어데블에게 잡혀 바닷속으로 끌려 내려가는 도중에 익사한다.

    때문에.

    나는 씨어데블의 점액 구슬을 잠수함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심해의 수압에서 오는 데미지를 전부 0으로 만들어 주는 아이템.

    일회용이지만 그 효과는 제법 쏠쏠하다.

    지름 5미터의 이 투명한 구슬은 나와 드레이크를 감싼 채 검은 물 밑으로 천천히 하강한다.

    바다 밑의 풍경은 꽤 아름다웠다.

    은색 비늘을 반짝이는 정어리 떼가 은하수처럼 움직이는가 하면 고래 가족이 삼삼오오 모여 여유롭게 헤엄치는 것도 보였다.

    절경이라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다.

    …….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우리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심해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어둡군.”

    드레이크는 된서리 엔트의 뿌리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지글지글지글…….

    단백질 타는 냄새와 함께,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순간!

    “뭔 짓이야!?”

    나는 황급히 드레이크의 손에서 횃불을 빼앗았다.

    그리고 바로 입김을 훅 불어 불을 꺼 버렸다.

    “……!”

    드레이크는 뭐가 문제냐고 물어보려다가 멈칫했다.

    횃불이 꺼지기 직전, 그는 보았던 것이다.

    심해의 어둠 속, 눈앞을 천천히 지나가고 있는 거대한 무언가를.

    “저, 저게 뭐냐?”

    드레이크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있는 투명한 점액 구슬 앞을 스쳐 지나간 것.

    그것은 단단한 철갑 피부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바다괴물이었다.

    불빛은 짧았고 또 상대의 덩치가 너무나도 커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일전에 보았던 저주받은 유빙의 ‘대망자(大亡者)’와 비슷한 크기로 짐작된다.

    쿠구구구-

    놈은 어찌나 큰지 아직도 우리가 있는 구슬을 스쳐 지나가고 있다.

    으스스한 물결이 점액 구슬에 와 닿을 때마다 점액 벽 전체가 출렁거린다.

    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말했다.

    “심해에서는 함부로 빛을 밝혀선 안 돼. 적에게 일방적으로 노출된다.”

    우리가 지금 진입하는 심해는 상당한 고렙들이 들어가는 사냥터.

    당연하게도, 이곳을 지나다니는 몬스터는 잡몹이라고 해도 상당히 위험하다.

    방금 지나간 거대한 녀석의 이름은 ‘둔클레테’

    무려 A등급의 몬스터이지만, 이곳에서는 잡몹 취급을 받는 녀석이다.

    “아무튼, 이 점액 안에 있는 동안에는 불을 쓰면 안 돼. 소리도 크게 내지 마. 그랬다간 바로 놈들이 눈치챈다.”

    “…놈들이라면?”

    “이 심해 안에 우글우글한 심해괴물들 말야. 이 점액 벽은 지형 데미지에는 강하지만 몬스터가 주는 물리 데미지에는 형편없이 약하니 주의해야 해.”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경고하자,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까지 이 안에 있어야 하지?”

    “그야 바닥에 도착할 때까지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데?”

    나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드레이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세 시간이라. 그 정도라면 버틸 만하지.”

    그러자, 나는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3시간 안에 ‘대심해(大心海)’까지 어떻게 가. 적어도 3일은 걸린다고.”

    그렇다.

    이 게임은 제법 현실 고증이 뛰어나다.

    꽤나 빠른 속도로 침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시간으로 3일은 걸린다.

    정확히는 3일하고도 3시간이 더 걸린다.

    심해 1만 미터 아래로 잠수하는 것이니만큼, 그 정도의 시간은 투자해야 하는 것이다.

    드레이크는 암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 마. 이 점액 구슬 안에서는 로그아웃해도 위치가 유지되니까.”

    “아, 그런 건가?”

    “그렇지. 이 점액 구슬은 ‘엘리베이터’ 역할이거든. AI 설정 상 육지 지형으로 인식될 수밖에. 그래서 해저의 지형 데미지도 0으로 처리되지. 이건 오류가 아냐.”

    뭐 지형 인식이니 데미지니 하는 복잡한 설정 따위는 집어 치워도 좋다.

    중요한 건 여기가 로그아웃 안심구역이라는 것이니까.

    나는 드레이크에게 3일 뒤에 보자는 인사를 남겼다.

    “그럼 정확히 75시간 뒤에 보자고.”

    드레이크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핏-

    나는 이내 게임 접속을 해제했다.

    로그아웃을 할 때 환한 빛무리가 터져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       *       *

    나는 캡슐에서 일어난 뒤 핼멧을 벗었다.

    푸슉-

    캡슐의 전원이 꺼진다.

    나는 캡슐의 손 받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과연, 비싼 캡슐을 사니 이런 건 좋네.”

    전에 구형 캡슐을 쓸 때는 오랜 시간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

    캡슐의 팔 부분이 과열되어서 너무 뜨거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싼 캡슐을 쓰니 냉각기가 너무 잘 돌아가서 기계가 과열될 일도 없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이상한 곳에서 여전히 아날로그란 말이지.”

    나는 책상 위 데스크탑의 냉각기와 캡슐의 냉각기를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캡슐 밖으로 나온 뒤에도 할 일은 많다.

    은행 펀드에 맡겨 둔 돈들이 잘 운용되고 있는지.

    잔뜩 사 놓은 주식들이 얼마나 올랐는지.

    법무사, 세무사는 일을 잘하고 있는지.

    광고 문의는 얼마나 들어왔는지.

    개인방송 후원 수익은 어느 정도인지.

    최신 게임 뉴스가 나왔는지.

    프로리그의 소식은 어떤지.

    그리고 장시간 게임 플레이에도 견뎌낼 수 있는 육체를 위한 운동, 식단, 수면 밸런스 등등…….

    “거 참, 따질 것 많네.”

    나는 냉장고로 가서 당근과 버섯, 양파, 바질, 흑마늘, 닭가슴살 등을 죄다 끄집어냈다.

    드르르르륵-

    믹서기에 죄다 때려 넣고 갈자, 정체불명의 걸쭉한 액체가 완성된다.

    꿀꺽- 꿀꺽- 꿀꺽-

    나는 그것들을 큰 컵에 담아 그대로 들이켰다.

    맛은 중요하지 않다.

    튼튼한 육체와 강인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영양분만 충분하면 그만이다.

    “소화도 잘되고, 영양도 있고, 시간도 단축되고. 좋네.”

    식사에 큰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점은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요즘에는 영양소에 신경을 쓴다는 것 정도?

    “냉장고도 좀 큰 걸로 바꿔야겠다.”

    나는 신선한 식재료를 더욱 많이 보관할 필요성을 느꼈다.

    원래 프로게이머의 필수템은 커다란 양문형 냉장고 아니겠는가.

    이내.

    식사를 마친 나는 오피스텔 4층에 마련되어 있는 입주자 전용 헬스장으로 향했다.

    정해진 루틴에 따라 1차 무산소 운동을 하고 땀을 흠뻑 낸 뒤에는 수영장에 가서 2차 유산소 운동 그리고 샤워까지 끝낸다.

    은행에서 VVIP 고객에게 제공하는 재무설계 서비스까지 전부 받고 다시 집에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총 6시간.

    “음… 69시간 남았네?”

    다시 게임에 접속하기까지 남은 시간, 정확히 68시간 52분.

    “…뭐 하지?”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마사지 의자에 앉았다.

    운동은 많이 했고 식사도 다 끝냈다.

    평소대로라면 이 모든 걸 후다닥 하고 또 게임을 했을 텐데…….

    이거, 강제로 사흘간의 휴가를 얻어 버렸다.

    “친구라도 만날까?”

    모처럼 난 휴가에, 나는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그런데 그때!

    ……!!!

    나는 폰을 향해 가져가던 손을 파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마치 빨간약을 삼킨 네오처럼, 나는 중대한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나 친구 없구나.”

    돌아오기 전, 지난 15년간의 시간을 기억해 봐도 사귄 친구들은 전부 온라인 인맥뿐!

    현실 친구는 0명이다.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는 많지만, 아무렇게나 편히 연락을 할 수 있는 번호는 2개뿐이었다.

    하나는 단골 짜장면 집, 다른 하나는 단골 치킨 집.

    “현실에도 조금 신경 쓰고 살걸.”

    게임에서는 고인물이지만, 현실에서는 뉴비다.

    게임 속에서는 고인물들이 뉴비를 아끼고 배려해 주지만, 현실에서는 그 어떤 누구도 뉴비를 도와주지 않는다.

    현실의 고인물들은 뉴비들을 등쳐먹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릴 뿐.

    “…….”

    나는 약간 시무룩해진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69시간을 뭘 하며 때우나?

    바로 그때.

    지이이이잉-

    뜻밖에도, 내 핸드폰이 울렸다.

    “어? 이 시간에 연락 올 데가 없는데?”

    지금 시간은 오후 9시 40분.

    뭔가를 하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광고, 금융, 방송 등. 비즈니스적인 연락들은 대부분 5시 이전에 온다.

    대부분의 회사원들은 퇴근 후에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야근을 한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는 정규 업무시간에만 연락을 하는 것이 원칙.

    하물며 나같이 ‘갑’에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야 오죽하겠나?

    …음.

    거 핸드폰 하나 받는데 더럽게 생각 많이 했다.

    나는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확인했다.

    번호는 뜻밖의 인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반장> 010-990*-****

    전화를 받자, 핸드폰 너머에서 윤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진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상당히 전형적인 인사, 하지만 진심어린 반가움과 기쁨이 느껴진다.

    “나야 늘 똑같지 뭐. 좋은 일 있어? 목소리가 좋네.”

    그러자, 윤솔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전화했어! 나 이번에 ‘멕심’이라는 잡지에서 표지모델 하게 됐거든!]

    아하, 일이 꽤나 잘 풀린 모양이다.

    멕심이라면 꽤나 인기 있는 패션지가 아니던가!

    안 그래도 윤솔의 뷰티 방송은 가끔 운동할 때 보고 있었다.

    뷰티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나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정도이니 원래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은 오죽할까?

    “이야, 축하해! 방송의 효과가 드디어 제대로 나네! 인기 스트리머 다 됐다 야!”

    [다 네 덕분이야, 요즘은 하루하루가 꿈같아!]

    “내 덕이긴, 네가 잘해서 그런 거지.”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윤솔이 잘된 것은 그녀의 외모가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물론 외모만이 다가 아니었다.

    해당 분야에 대한 풍부한 지식, 시청자를 진심으로 배려하는 태도, 방송에 임하는 마음가짐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던 덕분이었겠지.

    내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진아, 내가 진짜 너무 고마워서 그러는데 밥 한 끼 꼭 사고 싶어. 혹시 언제 시간 괜찮아?]

    좋은 타이밍이다.

    레이드 돌 시간도 없어 늘 쫓기던 일과가 아닌가?

    평소대로라면 정중하게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겠지만, 아직 나에게는 69시간이라는 막대한 휴가가 남아있다.

    “지금도 좋고. 내일도 좋고. 그 다음날도 괜찮아.”

    [어 그래? 너 혹시 집이야? 나 마침 1차 촬영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인데, 아직 저녁 안 먹었거든.]

    “좋지. 촬영 막 끝난 거면 아직 모델 메이크업 상태겠네?”

    [헤헤, 사실 그게 아까워서 지금 보자 한 것도 있어. 집에 가서 바로 지우면 아깝잖아. 메이크업 비도 비싸게 주고 했는데… 아!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만나서 정하지 뭐.”

    마침 나도 운동 후 깔끔하게 씻은 참이다.

    저녁 먹을 시간도 됐고.

    여러모로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아참! 어진아, 내가 정보 하나 물어왔어!]

    윤솔은 이제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가 하는 게임 이름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잖아?]

    “응. 그렇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윤솔은 이내 긴가민가 하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우리 잡지사에서 이번에 ‘퀴즈대회’를 크게 연다나 봐. 그 게임이 주제라는데… 너 혹시 알고 있었어?]

    …그것은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주제였다.

    이거 저녁식사가 꽤나 흥미로워 지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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