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28화 (128/1,000)
  • 128화 한타 싸움 (2)

    “이번 판 던집니다.”

    나는 표정을 구긴 채 라인 뒤로 물러났다.

    의기양양해진 유다희는 파죽지세로 라인을 밀고 우리 진영의 본진까지 침투했다.

    …한데?

    “뭐야? 그러고 보니 넥서스는 어디 있지?”

    원래 이런 류의 게임은 상대팀 진영에 있는 특정 구조물을 부숴야 게임이 끝난다.

    하지만 상대 진영까지 밀고 왔건만, 딱히 부술 만한 증표는 보이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얼음광장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음산한 경고가 들려왔다.

    -띠링!

    <적진이 함락 직전입니다>

    <전사들의 맹렬한 투지가 ‘칼바람 싸움터의 지배자’를 자극합니다>

    <‘대망자(大亡者)’가 눈을 떴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유창과 장태익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게임 센스가 뛰어난 유다희만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설마?’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쿠-구구구구구구!

    얼음광장의 최후미.

    단단한 얼음벽에 기대어 얼어붙어 있던 거대한 해골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유다희는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조금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 얼음광장에 있는 뼈다귀들은 전부 다 어둠의 마나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니, 저 거대한 뼈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도 충분히 해 볼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50m의 크기가 넘어가는 초대형 뼈다귀가 있다면?

    그것은 그냥 지형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십상일 것이다.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으랴?

    저렇게 거대한 것이 움직일 것이라고.

    이내.

    거인족의 대망자(大亡者)가 그 거대한 몸을 곧추세운 채 포효하기 시작했다.

    [우-워어어어어어!]

    놈이 한번 소리치자 전면에 있던 악마 해골병들의 몸이 가루로 변해 파사삭 흩어진다.

    단지 소리를 한번 지른 것만으로도!

    <거인족 대망자> -등급: A+ / 특성: 거인, 어둠, 언데드, 하수인, 자연재해

    -서식지: 칼바람 싸움터 좌파 진영, 거인국

    -크기: 50m.

    -살아생전에는 위대한 거인족 전사였다.

    산을 들어 올려 바다에 집어던져 섬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거인 대망자는 뼈만 남은 몸을 일으켜 앞으로 전진했다.

    녹슨 갑옷과 부러진 대검.

    하지만 뼈와 가죽만 남은 그 몸으로도 놈이 뿜어내는 투기는 압도적이다!

    콰콰콰콰콰쾅!

    놈이 한번 대검을 휘두르자, 라인에 꾸역꾸역 모여 있던 악마 해골병들이 한 줌 골분으로 변해버렸다.

    “말도 안 돼! 이런 OP가 어디 있어!?”

    유다희는 부들부들 떨며 항의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판도가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슈퍼 미니언, 강력한 OP(overpowered: 게임에서 게임의 밸런스를 해칠 정도로 강력한 능력을 가진)캐릭터의 등장!

    전장은 다시 급격하게 역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뿌직! 뿌드득!

    거인 대망자는 가로막는 악마 해골병들 따위는 한 손으로 쥐어 으깨 버렸다.

    “허억!?”

    라인에서 탱킹을 하고 있던 유창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콰쾅!

    그는 거인 대망자의 진격을 피해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그 뒤에 있던 장태익은 미처 피하지 못했다.

    “으아아악!”

    장태익은 대장장이 메타, 서포트형 캐릭터답게 움직임이 민첩하지 못하다.

    뿌직-

    그는 이내 거인 대망자의 발에 밟혀 죽고 말았다.

    북방 설산과 가혹한 바다를 넘어온 모험가의 최후치고는 허무한 것이었다.

    한편.

    “가즈-아!”

    나는 거인 대망자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외쳤다.

    우리에게도 강력한 탱커가 생겼다.

    이제 반격 타이밍!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드레이크가 크게 감탄했다.

    “어진!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던 건가?”

    나는 당연하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이 게임은 라인을 무작정 밀면 안 되는 게임이다.

    특히 초반에는 더더욱!

    게임의 최종 목표는 상대방의 라인을 미는 것이 아니다.

    넥서스, 즉 상대편 진영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대망자를 깨워서 처치하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초반에 라인을 밀어 상대방의 대망자를 잡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그것은 게임이 출시된 지 한 2~3년은 지난 다음이어야지?’

    메인 화력이 되어야 할 챔피언들이 아직 쪼렙인데 섣불리 상대 진영의 대망자를 깨워 버리면 큰일이다.

    실제로.

    유다희와 유창, 장태익은 우리 진영의 대망자에게 변변찮은 딜을 넣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 챔피언(플레이어)들의 절대레벨이 높지 않은 상태인 만큼, 나는 초반 라인을 내주고 일찌감치 우리 진영 대망자를 깨워 내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콰콰쾅!

    그리고 내 전략대로, 대망자는 잘 싸워 주고 있었다.

    놈은 B급 몬스터인 악마 해골병보다 1천 배 이상 강한 언데드 몬스터!

    설정상 거인은 무조건적으로 악마를 싫어하게 되어 있으니 최우선 공격 대상 역시도 악마임에 분명하다.

    장태익이 죽은 것은… 유감.

    “이 자식 고인물!”

    유다희는 타깃을 변경했다.

    그녀는 거인 대망자 뒤에 숨어있는 나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까가가각-

    도끼에서 뻗어 나온 충격파가 단단한 빙벽에 어지러운 스크래치를 남기며 쇄도해 왔다.

    하지만.

    나는 다가오는 참격을 보면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흡.”

    그저 숨을 잠시 참았을 뿐이다.

    끈적-

    땀처럼 배어나온 씨어데블의 점액이 내 알몸을 매끈하게 코팅했다.

    태애앵-

    유다희의 참격은 내 몸을 스쳐 지나가 애꿎은 얼음벽을 쪼개 놓는다.

    콰콰쾅!

    터져 나오는 폭음, 흩날리는 얼음가루들.

    나는 몸을 훌쩍 날려 유다희에게로 다가갔다.

    온몸이 점액으로 번들거리는 알몸의 남자.

    나를 본 유다희는 벌레라도 본 듯 미간을 찌푸린다.

    “으아악!! 제발 꺼져 이 변태 자식!”

    그녀는 절묘하게 내가 잔여 숨결을 내뱉는 순간을 노려 도끼를 내리그었다.

    ‘이야~ 역시 게임 센스 하나는 타고났다니까.’

    그새 나의 점액 피부 공략법을 찾아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플레이 타임 70,000시간에 빛나는 고인물이 아니던가!

    심지어 유다희의 공격 패턴이나 습관, 템트리, 특성치, 레벨, 스텟 등도 전부 꿰고 있다!

    ‘……유다희의 레벨은 약 28~29 정도… 주공격은 도끼를 횡으로 한 번 종으로 한 번 그리고 백스텝 후 훨 윈드… 조심해야 할 함정 특성은… 조디악 번디베일을 죽였던 ‘연대책임’정도려나?’

    나는 15년 전, 유다희가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물론 지금의 그녀는 그 당시의 그녀보다 훨씬 더 강하지만, 그래도 게임 숙련도 자체는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 게임을 7만 시간 이상 플레이한 내 눈으로 보면 유다희의 괄목할 만한 성장이라고 해 봐야 다 거기서 거기다.

    기껏해야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와 앙계장에서 파는 병아리의 차이랄까?

    붕-

    나는 유다희가 휘두르는 도끼를 피해 바닥에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내가 엎드린 이유는…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

    그 상태로 펄쩍 뛰어 유다희를 향해 다가갔다.

    “꺄아아아아악!”

    유다희는 나를 보며 비명을 지른다.

    알몸인 남자가 확 다가오는 것 때문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낌 모양.

    하지만.

    나는 그 상태로 가볍게 발을 뻗었다.

    턱-

    내 발바닥이 디딘 것은 바로 유다희의 얼굴이었다.

    훌쩍-

    나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유다희의 얼굴을 밟고 그녀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타타탁!

    이내 거인 대망자를 따라 악마 진영의 라인을 달려 나간다.

    “…….”

    얼굴에 발자국이 난 유다희.

    그녀는 약 5초간 멍한 표정으로 굳는다.

    끈적-

    얼굴에 흘러내리는 흰 점액.

    이윽고, 유다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 지금 무시당한 거야?’

    그냥 무시만 당한 게 아니다.

    아주 개무시를 당했다.

    뿌득-

    상황을 파악하자, 이마에 절로 핏줄이 돋는다.

    “이, 이 X끼!? 왜 공격 안 했어!? 지금 나 무시하냐아아아!”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랬다.

    무관심만큼 더 비참하고 참담한 게 어디 있으랴?

    유다희는 도끼를 들고 자신의 본진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수많은 미니언들이 그 뒤를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       *       *

    유씨 남매가 막 자신들의 본진에 오자, 예상대로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본진은 깡그리 털리고 있었다.

    콰콰콰쾅!

    거인 대망자가 반토막난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악마 해골병들이 우수수 죽어나간다.

    “아아…….”

    유다희는 좌절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에게도 희망이 생긴다.

    -띠링!

    <우파 진영이 함락 직전입니다>

    <전사들의 맹렬한 투지가 ‘칼바람 싸움터의 또 다른 지배자’를 자극합니다>

    <대망자(大亡者)’가 눈을 떴습니다!>

    좌파 거인 진영에 대망자가 있었으니 우파 악마 진영에도 대망자가 있는 게 당연하다.

    이내, 악마 진영의 대망자가 눈을 떴다.

    [갸-아아아아아악!]

    악마 대망자!

    그것은 뼈와 가죽만 남은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콰콰콰쾅!

    놈이 뿔 달린 머리를 휘젓자, 거인 해골병들이 파사삭 가루로 변해 흩어진다.

    그리고 악마 진영에서 날뛰고 있던 거인 대망자가 악마 대망자를 발견했다.

    [우-워어어어억!]

    [갸-아아아아악!]

    두 마리의 대망자(大亡者)!

    거대한 OP캐릭터끼리 서로 맞붙기 시작했다!

    콰쾅!

    거인 대망자의 주먹과 악마 대망자의 뿔이 맞붙었다.

    두 구의 거대 해골병은 죽어서도 사이가 나쁜 듯 맹렬하게 서로를 부수고 물어뜯는다.

    유다희와 유창은 그 광경을 보고 넋을 잃었다.

    “세상에… A+급 몬스터들 간의 싸움을 볼 줄이야…….”

    몬스터들끼리 영역이나 먹이를 놓고 다투는 것은 많이 봐 왔지만, 이렇게 압도적인 스케일의 대전은 처음이다.

    수없이 많은 망자들을 거느리고 전장에서 자웅을 겨루는 두 구의 대망자!

    보는 이들로 하여금 넋을 잃게 만드는 광경임에 틀림없었다.

    …….

    뭐, 어디까지나 뉴비들의 경우에는 그렇다는 거다.

    “아, 언제 끝나나…….”

    나는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두 대망자의 싸움을 관망하고 있었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게임 친구들이랑 다 같이 모여서 1만 판은 해 본 듯.’

    칼바람 싸움터에서 하는 AOS 게임.

    참고로 나는 ‘최후의 시즌’이라 불리는 15시즌에서 다이아2 티어까지 올라갔었지.

    ‘뭐, 그 이후로는 재능충들에게 밀려났지만.’

    하지만 15년 전인 지금 시점에서 다이아2 티어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애초에 현재 절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은 죄다 심해, 언랭이 아닌가?

    전원이 브론즈5고 오직 나만이 다이아.

    적어도 이 칼바람 싸움터 안에서 나는 황제나 다름없다.

    미니언들의 배치, 대망자의 HP, 라인이 얼마나 밀렸는지.

    전부 다 내 계산 안이다.

    “…….”

    “…….”

    “…….”

    유다희와 유창, 드레이크는 대망자들의 싸움을 넋 놓고 구경 중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들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쾅! 콰쾅!

    서로를 맹렬하게 공격하는 두 구의 대망자.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 저 OP캐릭터들.

    나는 대망자들을 향해 눈을 빛냈다.

    ‘앞으로가 진짜다!’

    이제부터.

    나는 저 두 녀석을 잡아먹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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