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25화 (125/1,000)

125화 저주받은 유빙 (1)

-띠링!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고인물>

*       *       *

그것은 얼음바다 위에 고요히 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작은 섬나라로 착각할 만큼 거대한 것.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한 조각의 유빙(遊氷)이었다!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

얼음산의 투명한 꼭대기들마다 달빛이 푸르스름하게 빛난다.

해수면 위에 드리워진 광활한 섬그림자는 바다에 또 다른 밤을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차르르륵- 풍덩!

악마의 만찬 호는 유빙 근처에 닻을 내렸다.

유다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놀랍네.”

그녀는 고인물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려던 것도 잊고 중얼거렸다.

가까이서 본 유빙은 맑고 투명하다.

눈에 덮인 부분을 제외한 곳은 달빛을 그대로 투과시키고 있어 마치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처럼 보일 정도.

꽤 장관인 풍경이었다.

끼걱-

배의 좌현이 유빙에 조금 쓸린다.

고요한 해류를 타고 유빙에 닿는 악마의 만찬 호.

한데?

배가 유빙에 닿는 그 즉시.

생소한 알림음이 떠오른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심해의 악몽’ 004- 유빙의 주인들이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저주받은 유빙 위에서 12시간을 생존하여 그들의 마음에 들도록 합시다 (11:59:59)>

4번째 히든 퀘스트가 발동되었다.

“…12시간 동안 생존하라고?”

유다희는 황당하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이 유빙에는 또 얼마나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살고 있는 것일까?

씨어데블 같은 괴물이 또 나타나기라도 하면…….

하지만.

그녀는 곧 걱정일랑 잠시 접어두게 되었다.

타탁!

악마의 만찬 호에서 제일 먼저 뛰쳐나가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

바로 나 말이다.

*       *       *

“퀘스트 받았지?”

“음, 받았다. 12시간 뒤까지 생존해 있을 것.”

나는 드레이크와 함께 배를 빠져나왔다.

“서라!”

뒤에서 유다희가 도끼를 휘두르며 쫓아온다.

콰쾅!

의외로, 유다희는 항해를 거치며 많이 파워업해 있었다.

‘레벨은 20대 중후반, 장비는 B급 정도인가?’

15년 전 기억 속 유다희보다도 훨씬 더 강하다.

원래대로였다면 그녀는 이제 막 레벨 20대 초반, 장비는 C+급 몇 개를 장비한 정도여야 할 것이다.

“내가 강하게 키운 모양이네.”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나한테 죽고 또 죽으면서, 유다희는 점점 성장한 모양이다.

실례로, 지금 그녀가 나를 향해 집어던지고 있는 저것들은 전부 B급이나 되는 장비가 아닌가!

‘악마손 오징어를 몇 마리 잡았나 본데?’

나는 벽을 자유자재로 뛰어다니는 유다희의 신발을 보며 생각했다.

악마손 오징어의 빨판이 달린 장갑과 부츠를 얻은 효과인 듯싶다.

“서라!”

유창 역시도 바스타드 소드를 든 채 달려온다.

번쩍!

놈의 대검에서 아우라가 터져 나와 얼음바닥을 깊게 쪼개놓았다.

유다희와 유창, 둘 다 북방의 추격전을 거치며 얼음내성이 크게 높아진 모양.

나름대로 척박한 지형에 꽤 적응한 면모를 보인다.

한편.

“…….”

인천연합의 마스터 장태익은 손에 커다란 망치를 든 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대장장이 직업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전투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직군이다.

“마동왕 님의 복수다!”

유다희는 얼음도끼를 크게 흔들었다.

-<근성의 얼음도끼> 양손무기 / B

근성가이들에게는 수없이 많은 인내의 과정이 닥친다.

이 단단한 얼음도끼는 그 과정을 조금 더 잘 버틸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공격력 +500

-얼음 공격력 +200

-수리불가(내구도 7,592/7,800)

-특성 ‘근성’ 사용 가능

공격력이 700이나 되는 아이템.

저걸 정타로 맞으면 아무리 나라도 위험하다.

“술래잡기라면 이히히히랑 지겹게 했어. 질려.”

나는 눈 깜짝할 사이에 줄행랑을 놓았다.

원래 알몸인지라 갑옷 등을 걸친 다른 유저들에 비하면 이동 속도가 비교도 안 되게 빠른 나다.

거기에 씨어데블을 잡고 얻은 신발의 효과까지 덧붙여졌으니 날개를 단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해마귀 씨어데블의 발가락> 신발 / A+

익사 직전에 놓인 이가 마지막으로 치는 발버둥.

그 필사적인 간절함이 담겨 있다.

-이동 속도 +200% (특수)

-물 속 이동 속도 +300% (특수)

-특성 ‘마찰계수’ 사용 가능 (특수)

내가 새로 얻은 특성은 ‘마찰계수’

안타깝게도, 씨어데블처럼 365일 24시간 연중무휴로 발동시키는 것은 무리다.

다만.

치명적인 공격을 당했을 때나 이렇게 냅다 도망칠 때 몸을 일시적으로 미끌거리게 할 수는 있다.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 정도려나?’

숨을 참으면 미끈거리는 점액이 내 몸을 뒤덮는다.

이때만큼은 씨어데블의 ‘절대회피’를 흉내 낼 수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끄덩-

유다희의 참격은 내 몸에 닿자마자 미끄러져 흘러가 버린다.

“으아! 저 변태 X끼!”

그녀는 내 뒷모습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미끌미끌한 점액으로 윤기가 흐르는 알몸.

이제, 핑크색 물은 빠져서 그나마 덜 변태같다.

“푸하!”

참았던 숨을 내쉬자.

후두둑- 후둑-

몸에 덮여 있던 점액들이 다 바닥으로 흘러내려 버렸다.

마찰계수 특성이 해제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뜻밖의 효과를 만들었다.

“꺄악!”

“으헉!”

“어이쿠!”

나를 뒤쫓아 오던 세 명이 바닥에 흘린 내 점액을 밟고 미끄러져 버린 것이다.

“이때다. 빨리 거리를 벌리자구!”

나는 드레이크의 어깨를 툭 치며 유빙 중앙에 우뚝 솟은 얼음산으로 향했다.

*       *       *

“이, 이 X끼 어디로 갔어!?”

유다희는 이를 갈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잡힐락말락 했던 고인물은 간 곳이 없다.

놈이 흘린 점액을 밟고 미끄러진 순간, 거리가 확 벌어져 버린 것이다.

인천연합의 장태익이 걱정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누님, 고인물을 죽이는 건 그렇다고 쳐도. 12시간 뒤까지 생존해야 하는데…….”

그렇다.

그들 역시 히든 퀘스트를 받았다.

이 저주받은 유빙 위에서 12시간을 버텨야 하는 처지인 것은 모두 똑같다.

유다희는 그런 장태익을 향해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뭐, 보아하니까 이 유빙 위에는 별다른 몬스터도 없는 것 같더구만. 뭐가 문제야?”

“…그래도.”

장태익은 못내 불안한 표정이다.

하지만, 유다희 역시 바보가 아니다.

그녀는 유빙에 내려섰을 때부터 경계태세를 풀지 않고 있었다.

-<눈 기러기의 눈> 마스크 / C+

설산에 사는 기러기의 눈을 뽑아서 만든 안대.

눈 위에 난 흔적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도 감지해낼 수 있다.

-민첩 +50

-얼음지대 시야 +200%

그녀의 시야는 남들보다 훨씬 더 넓다.

현실에서 그녀의 시력은 양쪽 눈 전부 2.5.

거기에 200%의 버프가 더해졌으니, 그녀의 시력은 거의 5.0에 육박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얼음지대 한정이기는 하지만)

“걱정 마, 맵을 쭉 보니까 몬스터의 흔적은 전혀 없어. 혹시 나온다고 해도 뭐, 이제 여기가 배 위도 아닌데 도망치면 되지!”

유다희의 말에 장태익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편.

유창은 유빙의 지형을 둘러보며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근데 누나.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유다희가 심드렁하게 되묻자, 유창은 주변을 슥 돌아본다.

사채업자 특유의 눈썰미가 발동된 모양이다.

“아니, 봐봐. 여기는 분명히 얼음섬 한복판이야.”

“본론만 말해, 처맞기 싫으면.”

“…섬 한복판에 바다생물들의 시체가 이렇게 많다니, 이상하잖아.”

말을 마친 유창은 옆에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얼음바위를 툭툭 두드렸다.

투명한 얼음바위 속에는 낯익은 몬스터 한 마리가 갇혀 있었다.

악마손 오징어다.

몬스터 웨이브에서 지겹게 봤던.

그리고 그 외 둔클레테 등등… 고등급의 바다괴물들이 얼음 속에 갇혀 죽어 있다.

불가사리나 성게, 새우 등등 바다에서 살 법한 몬스터들의 시체들도 꽤나 자주 보인다.

심지어 얼음 속에는 배도 있었다!

낡고 오래된 유령선이 얼음산 중턱에 반쯤 파묻혀 있는 것이 보인다.

상당히 낡고 오래되어 보이는 범선.

돛대는 이미 부러져 나가고 없다.

선체는 온통 해조류에 뒤덮여 있었는데 그 탓에 배인지 뭔지 눈치채기도 어려웠다.

유다희는 그제야 턱을 쓸었다.

“흠, 배가 산 중턱에 박혀있다고? 이건 좀 이상한데…….”

“그치? 폭풍우에 날아온 걸까?”

“아니야. 빙벽에 난 스크래치들을 봐. 이건 마치… 물 위에 정박해 있다가 끌려온 것 같은데…….”

유다희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점점 불안한 마음이 든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인물, 그놈은 어디로 갔지?’

이런저런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고 있을 때.

쿵-

갑자기 요란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모두들 경악했다.

끼기기기긱-

기울어지는 지면.

동시에 저 멀리 보이는 바다에서 무언가가 올라온다.

푸확!

건너편 바다 밑에서 올라온 것.

그것은 거대한 얼음산이었다!

콰콰콰쾅!

엄청난 해진이 해수면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거였나!”

유다희는 입술을 깨문 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주받은 유빙 마트료시카가 기울고 있다!

이 거대한 유빙은 마치 잠수를 하듯 바닷물 속으로 머리를 처박는다.

퍼펑!

얼음산 중턱에 파묻혀 있던 낡은 배가 물속으로 끌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장태익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외쳤다.

“유빙이 녹고 얼길 반복하면서 몸을 180˚ 뒤집는 거였어!”

이제야 얼음산 중턱에 배나 바다괴물들이 얼어붙어 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얼음섬이 뒤집어지는 순간 강제로 딸려 올라왔던 것이다.

“크윽!?”

유다희는 재빨리 퀘스트 창을 열어보았다.

-띠링!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심해의 악몽’ 004- 유빙의 주인들이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저주받은 유빙 위에서 12시간을 생존하여 그들의 마음에 들도록 합시다 (00:00:59)>

어느새 12시간이 거의 다 지났다.

이제 남은 시간은 1분!

섬이 뒤집어지는 가운데에서 1분을 살아남아야 한다!

“으아아아! 어쩐지 퀘스트가 쉽다 했어!”

울상을 짓는 장태익과 유창.

하지만.

“…….”

그 와중에 유다희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고인물!’

그놈들도 이곳에 왔다.

같은 퀘스트를 받은 채로!

‘분명 그놈들은 답을 알고 있을 거야!’

유다희는 눈에 최대한 힘을 주고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끼기기긱-

기울어지는 얼음산 너머, 호다닥 달려가고 있는 두 명의 남자가 눈에 보인다!

촤아아악!

파도가 치며, 물속에 가려져 있던 얼음산이 올라온다.

그리고.

지금껏 물 밑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얼음동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 유빙 주인의 맘에 들 시간이다!”

고인물은 물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얼음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타탁!

유다희는 뛰었다.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고인물을 따라서!

전력을 향한 다이브!

“어어 누님! 같이 가요!”

“제기랄! 지 혼자만!”

장태익과 유창이 이를 악물고 유다희의 뒤를 쫓는다.

유다희는 핏발 선 눈으로 얼음굴을 향했다.

‘이번엔 안 놓친다!’

예전에 악의 고성에도 이런 일이 한번 있었다.

비밀통로로 다이브했다가 죽었던 기억.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번엔 동생도 옆에 있지 않은가!

“기필코 죽여 주겠어! 으아아아아!”

유다희는 거의 수직에 가깝게 변한 바닥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저 아래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얼음굴을 향해 다이브했다.

풍덩!

파도와 얼음 부스러기들이 뒤섞이는 가운데.

쿠웅-

섬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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