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악마의 식탁 (3)
부서지는 파도 속.
기울어진 배의 난간을 잡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이 있었다.
콰쾅!
낡아서 삐걱대던 갑판의 나무판자들이 이젠 아예 부서져 버렸다.
난간을 휘어 감으며 갑판 위로 올라온 것은 거대한 촉수.
어른 머리통만 한 빨판이 수없이 움찔거리는 촉수였다!
[기에에에에!]
파도 속에서 노오란 눈알이 희번뜩거린다.
<악마손 오징어> -등급: B / 특성: 물, 심해, 무한성장, 고생물
-서식지: 바다 전역
-크기: 18~?m.
-‘가혹한 바다’에 온 당신은 바다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심해라. 그 잔잔한 수면 바로 아래에는 당신을 깊은 심해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괴물들이 득실거린다.
이 악마손 오징어가 바로 그렇다.
이 괴상하게 생긴 오징어는 마치 투구를 쓴 악마와도 같다.
마치 긴 수염을 기른 악마의 머리만이 거꾸로 동동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차라락-
수염과도 같은 긴 촉수의 끝은 시커먼 손바닥 모양을 하고 있었다.
놈은 그것으로 배의 난간을 잡고 갑판 위로 빠르게 기어 올라왔다.
[귀-오오오!]
갑판 위로 머리를 들이민 거대 오징어는 노란 눈알을 번들거리며 소리를 질러 댔다.
새의 것과 같은 부리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초고주파가 터져 나온다.
“큭!”
한 마교인이 움찔하는 사이, 악마손 오징어가 촉수를 뻗었다.
뿌꾸루룩!
빨판이 갑옷에 닿자 마치 하나인 것처럼 단단하게 붙는다.
악마손 오징어는 촉수 끝의 손바닥으로 그를 꽉 움켜쥐었고, 이내 엄청난 악력으로 그를 바다로 끌어들였다.
“어딜!”
유다희가 도끼를 뻗어 악마손 오징어의 촉수를 잘라 버렸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외모, 크기와는 달리 녀석은 B등급이다.
이 정도라면 마교인 10명이서도 어찌어찌 상대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으아아아! 누나! 이것들 한 마리가 아니야!”
유창의 비명은 파도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쭈왑- 쭈왑- 츄릅- 쭈릅- 쭈르릅-
파도 너머에서 뻗어 나온 촉수들이 일제히 배의 난간을 휘감는다.
수많은 빨판들이 달라붙어 빨아대자, 낡아빠진 판자들이 비명을 질러 댔다.
펑! 펑! 퍼엉!
수면이 박살나며, 최소 열 마리가 넘는 악마손 오징어가 튀어 올랐다.
하나같이 균일한 체구에 균일한 외형.
무한성장 특성을 보유한 몬스터답지 않다. 아마 젠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개체들인 모양.
“와씨! 배에 대포 같은 것 없냐!? 갤리온 선이잖아!”
유다희가 으르렁거렸지만 키를 잡고 있는 치 카이는 낄낄 웃을 뿐이다.
[3등실 객들이 바라는 것도 많군. 싫으면 내려!]
“빌어먹을 년!”
유다희는 치 카이를 외면했다.
그리고 갑판 위로 뻗어 오는 수많은 촉수들을 도끼로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잡을 필요 없어! 배에 오르게 하지 못하게만 하면 돼! 갑판 위로 올라오는 촉수만 잘라 내!”
펑! 퍼엉!
유다희의 판단은 정확했다.
상대가 무시무시한 B급 몬스터들이라고는 하지만...
사냥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위협적이지는 않다.
방어.
방어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풍-덩!
10개의 촉수가 다 잘려 나간 오징어는 바다로 떨어져 그대로 가라앉았다.
토막 난 촉수들이 바둥거린다.
서서히 물 밑으로 가라앉는 악마손 오징어의 모습은 상당히 으스스한 것이었지만…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퍽! 퍼억!
여기저기서 악마손 오징어의 촉수를 잘라 내는 소리가 들린다.
잘려 나간 촉수가 갑판에서 펄떡대는 수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 * *
1시간 뒤.
악마손 오징어들은 전부 도망쳤다.
두 마리가 수면 위에 둥둥 떠올라 있었다.
한 마리는 확실히 죽었고 나머지 한 마리가 몸을 바르르 떨고 있기는 했지만 마비마법에 제대로 걸렸기에 움직일 수는 없는 상태다.
“후…….”
유창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칼에 묻은 피와 먹물을 닦아냈다.
열 명의 마교 길드원들도 여덟 명으로 줄어 있었다.
한 명은 오징어의 부리에 씹혀 즉사했고, 나머지 한 명은 촉수에 잡혀 깊은 심해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쾅쾅쾅!
“빌어먹을! X발!”
유다희가 갑판 바닥을 발로 구르며 욕을 했다.
두 명이나 죽었다.
두당 삼천만 골드씩 내고 승선했는데 이 무슨 개죽음이란 말인가!
하지만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하다.
아무런 대답도, 피해보상도 없다.
당연한 일이다.
마교인들이 담담히 진열을 재정비하고 있을 때.
[낄낄낄! 이제는 2차 웨이브다!]
치 카이가 밉살맞은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마교인 전원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제는 뼈져리게 알 것 같다.
배 깊숙한 곳에 있는 저 비린내 나는 어창이 왜 1등석인지.
한편.
퍼-엉!
수면 위에서 둥둥 떠 있던 악마손 오징어 두 마리가 엄청난 기세로 물 밑으로 끌려들어갔다!
우드득- 우드득- 우드득- 우드득-
파도 속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거의 다 뜯어 먹힌 오징어 시체 두 구가 파도 밖으로 내팽개쳐졌다.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새로운 몬스터.
<둔클레테> -등급: A / 특성: 물, 심해, 무한성장, 고생물
-크기: 20~?m.
-5억 년 전부터 모습이 전혀 변하지 않은 고대의 판피어(板皮魚).
원래는 심해 깊숙한 곳에 살고 있었는데 어떤 영문인지 수면 근처로 올라와 오가는 상선이나 해적선을 습격하곤 한다.
단단한 외피에는 물리적 충격이 먹혀들지 않으며 무시무시한 턱은 배도 통째로 깨물어 부순다.
전신에 철갑을 두르고 있는 이빨괴물.
도저히 어류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크기!
[그-오오오오!]
둔클레테는 거대한 앞 이빨을 들이밀며 배를 들이받기 시작했다.
뻐적! 뻐저적!
악마의 만찬 호가 순식간에 누더기로 변했다.
그 와중에도 치 카이는 뭐가 즐거운지 연신 낄낄 웃고 있다.
“제기랄!”
유다희가 도끼를 들어 난간을 씹어 대던 둔클레테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따-악!
하지만 상대는 A급 몬스터.
데미지가 박힐 리가 없다.
[……?]
둔클레테가 누런 눈을 번뜩여 유다희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에겐 물리공격이 그다지 듣지 않는 듯하다.
“법사님들! 딜좀요!”
유다희가 헬프를 치자, 마교인들이 허둥지둥 앞으로 나섰다.
콰콰콰쾅!
마법사들의 전격과 화염이 둔클레테를 지졌다.
유다희를 향해 쩍 벌어졌던 입 속으로 쏟아지는 마법 줄기들.
이것은 제법 효과가 있었던지, 둔클레테는 입을 합 다물고 파닥거리더니 다시 물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
거짓말처럼, 갑판 위에는 또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유다희는 불길함을 참으며 물었다.
“사망자 있나요?”
“또 두 명이 죽었어, 누나.”
유창의 보고를 들은 유다희가 이를 으득 갈았다.
이번에도 두 명 다 까마득한 심해로 끌려들어갔다.
이제 생존자의 수는 여섯.
유다희는 키를 잡고 있는 치 카이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먼저 탄 그 핑크 대머리들은 어디에 있냐!?”
[1등석.]
“그 1등석이 어디야!”
[어창.]
“왜 놈들은 웨이브에 참여하지 않지?”
[1등석 손님이니까.]
너무도 담담히 말하는 치 카이였다.
유다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물었다.
“이러다 배가 가라앉으면 어떡하려고!?”
[용감한 해적은 그런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지. 요호호!]
“크윽!”
인공지능을 상대로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유다희는 씩씩거리며 뒤돌아섰다.
뒤에서 치 카이가 나직하게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3차 웨이브다.]
“빌어먹을! 좀 쉬었다 하자고!”
[이게 마지막이야. 힘내 봐.]
유다희는 치 카이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마지막이라니 참기로 했다.
이 시점에서 NPC를 적으로 돌려 좋을 게 없다.
“…뭔가 옵니다.”
장태익이 불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쿠구구구구구…….
뱃머리 앞에서 거대한 물무리가 융기해 올랐다.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불길한 조짐.
퍼-엉!
높게 융기했던 물무리가 박살났다.
이내, 그 안에서 기묘한 외형의 몬스터가 툭 튀어나왔다.
전에 나타났던 악마손 오징어나, 판피어 둔클레테와 비교하면 아주 작은 체구.
그것은 마치 투구게를 머리에 뒤집어쓴 인간처럼 생겼다.
눈에는 눈꺼풀이 없었다.
죽은 물고기 특유의 탁하고 퀭한 눈.
그것은 그저 공허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창백한 피부와 육체는 영락없는 인간의 것이었지만 등에 수없이 돋아난 촉수는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완벽히 부정했다.
마치 투구게를 뒤집어쓴 익사체의 등 뒤에 문어가 한 마리 붙은 듯한 모양새.
뚝- 뚝-
놈이 물을 떨어트리며 갑판 위로 올라오자 생선 썩는 냄새와 비린내가 바다 전체에 진동한다.
<심해마귀(深海魔鬼) ‘씨어데블’> -등급: A+ / 특성: 물, 심해, 마찰계수, 도장 깨기, 풍랑(風浪)
-서식지: 가혹한 바다, 블루홀
-크기: 2.5m.
-원념을 가진 익사체가 심해의 저주를 받아 두 번째 목숨을 얻었다.
심해에 서식하는 강력한 몬스터들을 찾아가 싸우며 더욱 강한 육체로 진화해 왔다.
놈이 심해에 둥지를 튼 이후 많은 심해 괴물들이 수면 위로 도망쳐 온다고 한다.
심해마귀(深海魔鬼) ‘씨어데블’
생김새부터가 무시무시한 위험등급 A+의 네임드 몬스터.
서리이빨 등의 심해 몬스터들을 연안으로 쫓아 보낼 정도로 흉악한 성질머리를 가졌다.
전에 해치웠던 악마손 오징어보다 최소 천 배 이상 강한 상대.
지금까지의 괴물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다.
[주세요.]
놀랍게도 ‘그것’은 말을 했다.
몬스터가 말을 걸어오다니?
마교인들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제물 주세요.]
씨어데블은 허공에 뜬 채 공손하게 말했다.
자세히 보니 놈은 수면 위로 불뚝 솟아오른 물기둥을 발로 딛고 선 상태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유다희는 도끼를 고쳐 쥐었다.
“제물? 뭘 내놓으라는 거냐?”
그녀가 묻자, 씨어데블은 퀭한 눈을 들어올렸다.
[여러분들께서는 앞으로 1시간에 1명씩 제 ‘먹이’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놈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이들의 표정이 멍하게 바뀐다.
먹이.
먹이란다.
몬스터에게 이런 취급을 받을 줄이야.
차라락- 터억-
놈은 두 개의 긴 팔과 등에 돋아난 여섯 개의 촉수로 배의 난간을 단단히 붙잡았다.
아무래도 매우 본격적으로 진심인 듯하다.
삐죽-
촉수의 끝.
선홍색 잇몸에 붙은 칼이빨들이 그 촘촘한 모습을 드러냈다.
씨어데블은 죽은 물고기 특유의 맛 간 눈으로 모두를 돌아보았다.
[제물을 내놓지 않으면 배를 통째로 바다 밑까지 끌고 내려갈 거예요.]
놈은 정말로 배를 심해까지 끌고 내려갈 기세였다.
그때.
[어이, 그건 안 돼.]
선장 치 카이가 씨어데블에게 주의를 주었다.
[1등석에 손님들이 타고 계신다. 민폐야.]
[앗, 그런가요? 실례를 범했군요.]
씨어데블은 머쓱한 표정으로 투구를 긁었다.
[그럼 갑판 위에 있는 분들만이라도 전부 끌고 내려가도 될까요?]
[그래, 그건 상관없어. 어차피 3등석 돼지들이니까. 요호호호!]
둘의 대화를 들은 유다희는 표정을 와락 구겼다.
NPC 주제에 몬스터랑 낄낄거리다니.
공손한 몬스터에 정신 나간 NPC.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유다희는 저 멀리서 낄낄거리고 있는 치 카이에게 물었다.
“…항해는 몇 시간이나 걸리지?”
[어디 보자, 얼추 네 시간은 남았군.]
치 카이는 뼈만 남은 손가락을 꼽으며 즐거워했다.
4시간.
1시간에 1명씩 제물로 바친다면 총 4명이 죽게 된다.
생존자의 수는 여섯.
이 중에 누가 악마의 식사거리로 바쳐질 것인가?
뿌득-
유다희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자존심을 잠시 접어 둔 채 부탁하듯 말했다.
“배를 돌려 줄 수는 없나?”
[기꺼이 그렇게 하지. 1등석 손님들의 동의를 구해 온다면.]
치 카이의 대답을 들은 유다희는 발로 애꿎은 갑판만 몇 번 팡팡 걷어찼다.
이제야 정말로 뼈저리게 알겠다.
이 배의 이름이 왜 ‘악마의 만찬(Devil's banquet)’ 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