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20화 (120/1,000)
  • 120화 악마의 식탁 (2)

    바다가 얼어붙어 만들어진 광활한 해변.

    어마어마하게 넓은 바다가 모든 이들을 압도하고 있다.

    거대한 유빙들이 둥둥 떠다니는 연안의 만(灣).

    그곳에는 시커먼 범선 하나가 정박해 있었다.

    “그래, 역시 이곳에 숨겨져 있었군.”

    나는 15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한 커뮤니티에 ‘세상의 끝’이라며 처음 올라왔던 사진 한 장.

    모험가 하나가 별 생각 없이 찍어 올린 사진의 구석에 희미하게 나온 물체는 네티즌들의 엄청난 관심을 끌어 모았었다.

    ‘그때 그 사진을 두고 진짜다 아니다 말이 많았었는데…….’

    세상 그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월드맵의 끝, 지형의 최외곽에 설마 이런 게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나는 눈앞에 있는 ‘배’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무게가 약 1천 톤에 달하는 갤리온 선.

    이 배는 17세기의 양식에 따라 축조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뱃머리엔 시커먼 해골이 거대한 말뚝 수십 개에 못 박혀 있는 게 보인다.

    돛은 다 찢어져 을씨년스럽게 보였으며 난간엔 얼어붙은 밧줄과 해조류가 덕지덕지 늘어져 있었다.

    얼어붙은 유령선!

    이것이 눈앞의 배를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한 말일 것이다.

    배의 옆구리에는 음울한 글씨체로 휘갈겨진 글귀가 보였다.

    ‘Devil's banquet’

    ‘악마의 만찬’ 호.

    배의 이름 치고는 다소 특이하다.

    타탁-

    나는 빙판 위를 달려 배에 다가갔다.

    싸늘한 냉기가 감도는 닻줄이 빙벽에 단단히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우-우우우…….

    가까이 다가가자 낮고 무거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얼어붙은 돛이 퍼덕이는 소리.

    마치 배가 우는 것 같았다.

    더욱 더 가까이 다가가자 닻줄 아래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는 우스꽝스럽게 생긴 삼각형 모양의 모자를 쓰고 휘황찬란한 선장복을 입은 채 닻줄 위에 앉아 있다.

    뼈만 남은 채로.

    체형을 봐서는 여자로 짐작되었지만, 키가 2미터도 넘어서 그런가 어쩐지 이질감이 들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얼굴 가죽은 해풍에 닳고 닳아 거의 사라져 있었다.

    금이빨이 아닌 부분은 죄다 숭숭 빠져있어 보기 흉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끼긱-

    그녀는 움직였다.

    […승객인가?]

    그리고 나를 향해 깊고 어두운 눈을 들어 보였다.

    실로, 실로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 앉아 승객을 기다려 온 것 같았다.

    이내.

    -띠링!

    해골 선장의 머리 위에 숨겨져 있던 이름이 떴다.

    <‘악마의 만찬’ 호 선장 치 카이>

    치 카이.

    나는 그녀가 이 유령선의 총책임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배를 타고 싶은데.”

    내 말을 들은 치 카이는 따개비 가득한 해골을 끄덕였다.

    [돈은 있나?]

    그 말에, 나는 옆에 있던 드레이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드레이크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돈? 돈! 그래, 얼마가 필요하지?”

    그러자.

    치 카이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삼백만 골드라. 비싸군.”

    현실 세계에선 삼십만 원, 달러로는 300달러가량이다.

    결코 적은 돈은 아닌 셈.

    하지만.

    치 카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삼천만 골드라네 친구들.]

    치 카이의 뻥 뚫린 콧구멍에서 게 몇 마리가 콧방귀에 실려 나와 드레이크의 얼굴에 철썩 붙었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그 게를 떼어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뭐, 뭐가 그렇게 비싸?”

    뱃삯으로는 지나치게 비싸다.

    현실 돈으로 거의 300만 원에 이르는 거금이 아닌가!

    하지만 치 카이는 싫으면 말라는 식이다.

    바로 그때.

    퍽!

    화살 한 대가 날아와 드레이크의 발뒤꿈치를 스쳤다.

    “잡아 죽여!”

    마교의 추적이 시작된 것이다!

    퍽!

    이번 소리는 드레이크의 옆구리에서 터졌다.

    화살이 박힌 것은 아니고, 내가 옆구리로 다시 한 번 친 것이다.

    “빨리 내.”

    물론 더치페이다.

    “삼천만이라니…….”

    드레이크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신속하게 돈자루를 꺼냈다.

    짤랑-

    돈자루가 오갔다.

    치 카이는 돈자루를 받고 그것을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 얼마 있지도 않은 이를 딱딱 부딪치며 웃었다. 해적답게 돈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돈은 받았는데… 자리는 몇 등석으로 드릴까?]

    “1등석으로.”

    [돈으로는 2등석까지야. 1등석에 타려면 필요한 물건이 따로 있는데…….]

    치 카이는 뼈만 남은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그러자.

    -띠링!

    드레이크의 머리 위에 느낌표 표시가 떴다.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셨습니다>

    <‘심해의 악몽’ 002-해적들은 오랜 항해로 치아가 약해져 있습니다>

    치 카이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내가 요즘 이가 시려서 당최 닻줄을 끊을 수가 없어. 괜찮다면 틀니로 쓸 만한 이빨을 좀 구해다 주겠… 응?]

    그녀는 말을 미처 끝맺지도 못했다.

    나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리이빨 상어의 이빨 스물여덟 개를 내민 것이다.

    […호오.]

    치 카이는 기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내 손에서 서리이빨 28개를 받아들고는 그것을 하나하나 자신의 잇몸에 박아 넣었다.

    딱! 딱!

    날카로운 칼이빨로 잇몸을 가득 채운 그녀는 만족스러운 듯 씩 웃어 보였다.

    [좋다. 1등석을 내주지.]

    이내.

    -띠링!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심해의 악몽’ 002-해적들은 오랜 항해로 치아가 약해져 있습니다. (틀니 1/1)>

    히든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알림음과 함께.

    드르르륵-

    얼어서 딱딱한 줄사다리가 내려온다.

    나와 드레이크는 그것을 붙잡고 배로 올라갔다.

    사다리는 배의 위가 아닌 중간 부분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창(魚艙).

    잡은 물고기를 넣어 두는 창고로 배의 가장 밑부분이었다.

    “…이게 무슨 1등석이지?”

    드레이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창 바닥엔 각종 물고기들이 얼어붙어 있었다.

    수 미터가 넘어가는 참치부터 어지간한 마차보다 큰 사이즈의 문어, 마상용 창을 코에 붙이고 다니는 돛새치, 거대한 가시들로 뒤덮인 쏠베감팽, 흰 배를 드러내고 누운 백상아리…….

    당연한 말이지만, 어창 안은 추운데다가 비린내로 진동을 했다.

    얼어붙은 콧속 점막에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역겨움.

    삼천만 골드나 지불하고 탄 1등석이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이런 곳은 노예나 밀항자 따위에게나 적합하다.

    하지만.

    나는 이 장소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나중에 2등석, 3등석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그러자 드레이크는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하긴, 1등석이 이 모양이라면… 2등석, 3등석은 볼만 하겠군. 줄에 묶어서 바다 위로 끌고 오기라도 하나?”

    “…그럴 리가. 2등석은 선실, 3등석은 갑판이야. 탁 트여 있어서 경치도 좋고 바닷바람도 시원하지.”

    “뭐라고? 어창보다 훨씬 좋잖나? 왜 1등석이 제일 후진 것이지?”

    드레이크는 항의하듯 물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드레이크 역시도 곧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배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이 비린내 나는 창고가 왜 1등석인지.

    *       *       *

    한편,

    “우리도 배에 타고 싶다.”

    유다희가 이끄는 스무 명의 마교인들 역시도 배 앞에 도착했다.

    치 카이는 피식 웃었다.

    [돈만 낸다면 얼마든지!]

    이내.

    마교인들은 그녀가 요구하는 뱃삯을 듣고 기겁했다.

    “무슨 탑승권이 그렇게 비싸!”

    그녀가 항의하자, 치 카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두당 3천만 골드.

    상당한 거금이다.

    하지만 마교인들은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유다희는 기꺼이 길드 금고를 열기로 했다.

    “미개척지를 탐험하는 일이야. 동영상만 잘 찍어 올려도 손해는 금방 메꿀 수 있어.”

    게임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엄청난 흥행을 누리고 있다.

    아마 월드맵 밖으로 나간 동영상을 올린다면 유료결제해서라도 볼 이들이 널리고 널렸다.

    이윽고.

    배에 탈 10명이 추려졌다.

    나머지 10명은 돈이 아깝다거나, 항해가 무섭다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뭍에 남기로 했다.

    마교 교주 유다희.

    부교주 유창.

    그리고 인천연합 길드의 마스터 장태익.

    이 3명 외에도 마교에서 가장 랭킹이 높은 이들 7명이 거침없이 승선했다.

    [몇 등석?]

    치 카이의 말에 유다희는 잠시 고민했다.

    “1등석에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빨 스물여덟 개를 구해 와.]

    치 카이가 퀘스트를 던졌다.

    마교인 전원의 머리 위에 느낌표 표시가 떴다.

    유다희는 퀘스트를 무시했다.

    “지금 그런 걸 어디 가서 구해? 아무 자리나 좋으니 타겠어. 싼 데로.”

    [그럼 3등석. 갑판 위로 가.]

    치 카이는 줄사다리를 향해 손짓했다.

    고인물 일행이 올라간 곳과는 다른 줄사다리다.

    유다희는 길드원 아홉 명을 데리고 줄사다리를 올랐다.

    입에는 커다란 도끼를 콱 깨문 채로.

    “올라가자마자 놈들을 찾아내서 죽여 버리겠어.”

    유다희의 말에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출항!]

    치 카이가 우렁차게 외쳤다.

    뚝!

    치 카이가 새 이빨로 쇠사슬 닻줄을 콱 깨물자, 그것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투-웅!

    ‘악마의 만찬’ 호는 한번 몸을 바르르 떨더니 이내 가혹한 바다를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개자식! 어디 숨었냐!”

    유다희는 난간 위로 올라오자마자 유령선 위를 뛰어다녔다.

    열 명의 길드원이 갑판 위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배가 워낙에 큰 탓에 수색이 어려웠다.

    또한 오크통이나 밧줄 무더기, 칼 거치대나 복잡한 구조의 망루들 탓에 숨을 곳도 너무 많다.

    “갑판 위엔 없는 것 같습니다!”

    “선실 안에도 없습니다!”

    길드원들의 잇따른 보고에 유다희는 골머리가 짚었다.

    그새 어디로 숨었단 말인가?

    그때,

    “어창에 숨은 게 아닐까요, 누님?”

    인천연합의 마스터인 장태익이 말했다.

    “찾아보지 않은 곳은 밑바닥 쪽 밖에 없어 누나.”

    유창 역시도 같은 의견이다.

    “흠…….”

    유다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까 멀리서 듣기로는 분명 놈들은 퍼스트 클래스를 선택했다.

    그런데 왜 어창에……?

    유다희가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

    쿵!

    배가 크게 한번 흔들렸다.

    항해가 시작된 것이다!

    “제길…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됐군!”

    난간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던 마교인 하나가 욕설을 내뱉었다.

    끼-걱! 끼-걱!

    낡아빠진 나무판자들이 이빨을 맞부딪치며 덜덜 떤다.

    짙게 낀 해무는 날카롭게 삐걱대는 소리가 한번 날 때마다 한 번씩 옅게 출렁였다.

    철썩!

    차가운 얼음파도가 뱃전을 때렸다.

    뱃머리 제일 끝에 붙어 있는 해골 말뚝이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유빙들을 퉁퉁 밀어내며 전진했다.

    “안 되겠군!”

    유다희가 이를 으득 갈았다.

    “전원 집합! 지금부터 어창을 뒤진다!”

    유다희의 명령에 아홉 명의 길드원 전원이 낡아빠진 나무계단을 타 내려갔다.

    이윽고, 그들은 거무튀튀한 얼음벽 하나를 발견했다.

    “얼음 안에 문이 있습니다!”

    얼음벽처럼 보였지만 잘 들여다보면 안에 문고리와 창문이 보였다.

    “이 자식들, 이런 곳에 숨어 있었나?”

    유다희가 도끼를 집어 들었다.

    콰-쾅!

    도끼가 빙벽에 때려 박혔다.

    묵직한 진동파가 일며 얼음이 뒤흔들렸다.

    “이것 봐라?”

    유다희가 눈을 크게 떴다.

    문이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리력뿐만 아니라 화염 마법도 전혀 듣지 않았다.

    어창의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 자식들… 설마 이래서 어창이 1등석인건가?”

    밖에서 절대 들어갈 수 없다니.

    조금 어이없는 특권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시간은 우리 편이야. 어창을 포위하고 있다가 나오는 즉시 끔살해 버리자고.”

    유다희와 아홉 길드원은 갑판 위로 올라가 어창의 문을 포위했다.

    시간은 아군이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키를 쥐고 있는 치 카이의 우렁찬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1차 웨이브 시작이다!]

    쿵-

    거대한 충격과 함께.

    끼-기기기기긱!

    배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이런 X발!”

    유다희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배가 기울어서 욕을 한 게 아니다.

    부서지는 파도 속.

    기울어진 배의 난간을 잡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을 보고 욕한 것이다.

    …….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저 춥고 비린내 가득한 어창이 왜 1등석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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