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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16화 (116/1,000)
  • 116화 죽음의 얼음땡 (2)

    “역시 술래는 떠넘겨야 제맛이지.”

    나는 얼어붙은 통나무를 넘으며 말했다.

    왜 다들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은가.

    얼음땡을 하다가 마음에 안 드는 놈이 보이면 자기를 쫓아오던 술래를 슬쩍 그쪽으로 떠넘겨 버리는 것.

    한편.

    내 뒤를 따라오던 드레이크는 못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이 참에 이히히히와 마교까지 전원 처치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쉽군.”

    궁수로서는 당연한 아쉬움일 것이다.

    먼 곳에 있는 적들이 서로 싸우며 자중지란을 일으켰을 때 은밀하게 화살로 하나씩 수를 줄여 가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여기서 저들을 몰살시키면 곤란하다.

    “안 돼. 저들은 아직 이용가치가 남았다.”

    나는 가만히 머리를 굴렸다.

    나를 위해 나를 죽이려 드는 저 인간들을 어떻게 떼어놔야 할까?

    휘이이이이잉-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눈보라는 거세게 불어온다.

    “이번 눈보라는 정말로 오래 갈 모양인데.”

    드레이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의 눈을 걷어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바위인지 얼음덩어리인지 모를 것들이 산을 이루고 있다.

    가뜩이나 험난한 지형에 눈과 얼음이 쌓이니 더욱 더 위험하다.

    체력은 가랑비에 옷 젖듯 계속 닳고 있었다.

    나는 그런 드레이크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요 바로 앞이 마을이야.”

    “……?”

    내 말에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눈 앞에는 오로지 어둠과 추위만이 존재할 뿐, 인기척이 있는 장소라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거침없이 어둠을 뚫고 나아갔다.

    허리가 꺾여 부러진 침염수, 입을 쩍 벌리고 있는 크레바스, 설광에 푸르스름하게 물든 얼음산.

    이윽고.

    툭-

    발에 무언가가 걸린다.

    “……?”

    드레이크는 뭔가 싶어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쓱쓱 걷어내자, 딱딱하게 굳은 인간의 형체가 보인다.

    “…시체?”

    드레이크는 눈을 찌푸렸다.

    “오오!”

    나는 작은 환호성과 함께 드레이크에게 다가갔다.

    푹푹 빠지는 발걸음, 바닥의 눈을 조금 쓸어내자.

    이내 푸르딩딩하게 변한 시체 하나가 보였다.

    이제 막 7살 정도 된 소녀가 몸을 웅크린 채 죽어 있었다.

    마을 밖으로 나가려다가 동사한 모양이다.

    “좋았어. 꼬마 여자애의 시체가 있으니 마을이 가깝다는 증거다. 이젠 진짜 다 왔어.”

    “…시체를 이정표로 쓰나?”

    “다들 그러는걸 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소녀를 기준으로 6시 방향을 향해 이동했다.

    퍼석-

    나는 눈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치 사구(沙丘)처럼 생긴 지형.

    하지만 그 너머의 바닥에는 다소 낯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오 마을인가!”

    드레이크는 감탄했다.

    꽤나 높은 눈 언덕 밑에 바로 붙어있었기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

    …….

    하지만.

    “뭐야? 불빛이 하나도 없잖나?”

    드레이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작은 마을.

    통나무와 거죽떼기로 만들어진 오두막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마치 임시로 건설된 숙소 같은 모양새.

    하지만 불이 켜져 있는 집은 한 곳도 없었다.

    -띠링!

    <‘얼어붙은 마을’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나와 드레이크는 낡아빠진 울타리를 넘어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가까이서 본 마을은 폐허였다.

    을씨년스럽게 뻥 뚫린 벽, 금방이라도 귀신이 울부짖을 것 같은 창문, 반쯤 허물어진 굴뚝…….

    “으음. 포션도 좀 사고, 불도 쬐고 하려고 했는데…….”

    드레이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슨 소리야. 여기만큼 풍요로운 마을이 어딨다고!”

    나는 드레이크의 어깨를 팡 치며 말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드레이크, 나는 그런 그를 데리고 가까운 오두막의 문을 벌컥 열었다.

    <잡화점>

    원래는 이것저것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곳.

    하지만 지금은 그저 얼어붙은 폐허에 불과하다.

    그러나!

    “헉!”

    잡화점에 들어온 드레이크는 헛바람을 집어삼켜야 했다.

    잡화점 안, 계산대에는 건장한 체격의 한 남자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눈을 부릅뜬 채 얼어 죽은 모양새로.

    “뭐, 뭐지?”

    드레이크는 당황해서 뒷걸음질쳤다.

    나는 그런 드레이크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여기 있는 NPC들은 전부 이히히히에게 당한 상태니까.”

    안타깝게도, NPC들은 이히히히에게 당한 이상 방법이 없다.

    그들은 ‘땡’을 해 줘도 다시 살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잡화점을 쭉 둘러보았다.

    눈과 얼음이 가득 쌓여 있었지만, 선반 위에 있는 물건들은 아직 쓸 만했다.

    갑작스럽게 닥쳐 온 저주에 미처 뭔가 할 새도 없이, 일상이 통째로 얼어붙은 것이리라.

    달그락-

    나는 선반 위에 있는 물건들을 훔쳤다.

    포션 세 병, 햄 슬라이스 두 조각, 소금에 절인 연어 한 마리, 고래 기름 한 덩어리, 말라비틀어진 순무와 당근 몇 뿌리, 그리고 동상 치료제…….

    드레이크는 그런 나를 보며 물었다.

    “그렇게 맘대로 가져가도 되나?”

    “음, 여기 있는 잡화들은 첫 발견자에 대한 보상 같은 거야. 일반적인 상점의 아이템들과는 다르게 리젠이 안 되지.”

    “어쩐지 죽은 자의 물건을 훔치는 것 같아서 꺼림칙하군.”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드레이크의 몸은 솔직하다.

    드레이크는 다른 오두막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왔다.

    그는 낚시줄과 바늘, 지혈제, 화살촉, 단검 몇 자루……. 그리고 ‘잠수병 치료제’를 찾아냈다.

    “호오? 잠수병 치료제라. 그게 어디에 있었어? 마침 찾던 건데.”

    “잘한 건가? 눈에 보이는 건 죄다 찾아왔지.”

    남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마구 뒤지는 건 모든 RPG의 기본이 아닌가?

    ‘심지어 젤X 놈은 막 항아리도 다 깨트리는데 뭐.’

    아, 젤X가 아니라 링X였던가?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자, 그럼 챙길 건 다 챙겼으니 폐허를 빠져나갈 차례다.

    막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벽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한 오두막이 보인다.

    펄럭-

    오두막의 책상 위에 있던 책 하나가 바람에 움직였다.

    “……?”

    나는 뭔가 싶어 책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일기였다.

    <ㅇ월 ㅇ일>

    가혹한 눈보라가 몇 달째 계속되고 있다.

    이제 식량도 거의 다 떨어졌다. 사냥을 나가지 않으면 모두 굶어 죽게 될 것이다.

    <ㅇ월 ㅇ일>

    최후의 식량조차 떨어졌다.

    눈보라는 여전히 거세다.

    <ㅇ월 ㅇ일>

    사냥감을 찾으러 나갔던 수색대가 돌아오지 않는다.

    다들 어떻게 된 걸까...

    <ㅇ월 ㅇ일>

    눈보라는 아직도 거세다.

    이것은 도저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없다.

    누군가가 악의로 우리 마을을 저주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ㅇ월 ㅇ일>

    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배고파....

    <ㅇ월 ㅇ일>

    남편이 미쳤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다며 칼을 갈기 시작했다.

    <ㅇ월 ㅇ일>

    빌은 며칠 째 칼을 갈고만 있다.

    무언가를 갈등하는 것 같다.

    뭘 하려는 걸까?

    이 눈보라 속에서는 사냥도 못 할 텐데...

    <ㅇ월 ㅇ일>

    빌과 그의 친구들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마녀이고 이 눈보라의 원인이 나라는 것이다.

    다들 미쳤다.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기에 일단 문을 잠가두었다.

    <ㅇ월 ㅇ일>

    남편이...빌이... 문을 열려고 한다.

    제발 그만둬.

    제발.

    그나마 웬디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ㅇ월 ㅇ일>

    잠에서 깨니 웬디가 없다.

    어디에 있니 웬디...나의 딸 웬디...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단다...

    .

    .

    일기는 여기에서 끊겨 있었다.

    뒤의 페이지는 모두 하얗게 텅 비었다.

    드레이크는 일기를 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숨겨진 설정인가.”

    한 몬스터가 머릿속에 절로 떠오른다.

    <기어오는 술래 ‘이히히히’> -등급: A / 특성: 얼음, 어둠, 언데드, 술래

    -서식지: 가혹한 설산

    -크기: 2m.

    -마을에서 마녀로 몰린 여자가 얼음 구덩이에 산 채로 던져졌다. 머리 위로 연신 끼얹어지는 차가운 물을 맞으며, 그녀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눈보라가 칠 때만 나타나는 히든 필드 보스.

    그렇다.

    이 일지는 이히히히가 몬스터가 되기 전에 썼던 일기다.

    드레이크는 일기를 내게 보여줬다.

    “어진. 꽤나 흥미로운데 한번 읽어 볼…….”

    “[SKIP]”

    “역시.”

    어차피 나는 공략집에서 다 봐서 아는 내용이라 굳이 또 볼 필요는 없다.

    “흠, 그래도 직접 발견하니 또 새로운 기분이네.”

    나는 이히히히의 일기를 인벤토리에 넣고는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       *       *

    우리는 그렇게 몇 개의 폐허를 지났다.

    그 동안 생필품을 꽤 많이 모을 수 있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현실과 상당히 흡사하다.

    먹지 않거나 쉬지 않으면 HP가 줄어든다.

    그리고 춥고 어둡고 활동하기 불편한 지형을 계속 걷다 보면 심적으로도 지치기 마련이다.

    정신적으로 꽤나 한계에 몰렸을 무렵.

    우리는 또 하나의 마을을 발견했다.

    따지고 보면 마을은 아니었다.

    통나무로 된 허름한 오두막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이 오두막에서는 적어도 따스한 불빛이 번지고 있기는 했다.

    끼긱-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수한 냄새가 우리를 반긴다.

    [뭐야?]

    냄비에 든 음식을 국자로 뜨고 있던 남자가 우리를 향해 눈을 사납게 떴다.

    하지만 그는 NPC였기에 딱히 위해를 가해오지는 않았다.

    우리가 다가가자, NPC사내는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 말했다.

    [여행자인가. 뭐 식량은 당분간 넉넉하니… 앉아서 먹어도 좋아.]

    그는 우리에게 따듯한 국밥 한 그릇씩을 건넸다.

    우거지와 선지가 잔뜩 얹어져 있는 돼지국밥.

    뜨거운 김과 함께 구수한 냄새가 뭉근하게 퍼진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서는 미각 기능도 제공된다.

    향기 나는 TV가 출시된 이후로 급격하게 발전된 과학 기술 덕분이다.

    이제 게임 내에서도 온갖 종류의 요리들이 다 가능하게 되었다.

    비싸서 구하지 못하는 식재료들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다 보니, 요리사들이나 미식가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실정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쿡방, 먹방 등도 다 이 게임에서 할 수 있게 되지.’

    나는 앞으로 다가올 근미래를 떠올리며 국밥을 퍼먹었다.

    우적- 우적-

    옆을 보니 드레이크 역시도 정신없이 돼지국밥을 퍼먹고 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드레이크에게 묻고 말았다.

    “마, 데지국빱 무밨나? 직이제?”

    “……?”

    드레이크는 입을 우물거리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오두막의 따듯한 온기에 취한 듯한 그 모습에, 나는 슬쩍 장난기가 발동했다.

    “드레이크, 그거 알아?”

    “…뭘?”

    “우리 앞에 이 남자. 이히히히의 남편이야.”

    풉-

    그러자 드레이크는 먹던 국밥을 뿜어냈다.

    나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봤던 이히히히 있잖아……. 분명 몸의 살점이 다 뜯겨진 상태였지?”

    “…그, 그만.”

    “그럼 우리가 먹는 이 국밥의 고기… 이게 정말 돼지일까? 이런 추운 곳에서 돼지를 키운다고?”

    “그, 그만둬. 식욕이 떨어지잖아!”

    드레이크는 국밥 그릇을 내려놓으며 질색팔색을 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큭큭 웃었다.

    이것은 나중에 데엑마에서 가장 유명한 괴담, 음모론으로 퍼지게 될 이야기.

    한편.

    NPC 빌은 정해진 프로그래밍대로, 자신의 대사를 읊는다.

    [우리는 괴물의 저주를 피해 매번 주기적으로 마을을 옮기지. 하지만 저번에는 마을을 버릴 타이밍이 너무 늦었어. 안일했지. 괴물은 계속해서 우리를 쫓아온다. 이제는 생존자도 나 하나뿐이야. 아내도 잃고 딸도 잃고… 이제는 조금 지치는군.]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선지를 조금 사고 싶은데.”

    내가 용건을 이야기하자.

    [돈은 됐어. 식량이나 무기가 있으면 놓고 가.]

    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항아리 속에서 선지 몇 덩어리를 골라 내 주었다.

    드레이크는 고개를 갸웃했다.

    “식료품으로 쓰기엔 비린내가 좀 심한 것 같은데… 아니, 그거 애초에 돼지 피는 맞나?”

    “몰라 뭔지. 어차피 먹으려고 산 건 아니야.”

    나는 빌에게 소금에 절인 햄 슬라이스 몇 조각을 돈 대신 넘겼다.

    폐허에서 가져온 아이템이다.

    북방에서는 골드를 이용한 화폐거래보다는 이런 식의 물물거래가 더욱 빈번하다.

    NPC를 상대로 할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단도, 화살촉, 기름, 장작, 고기, 모든 것들이 훌륭한 화폐다.

    꿀렁-

    나는 선지가 가득 담긴 자루를 움켜쥐었다.

    “이건 미끼용이야.”

    “…미끼?”

    “이 설산에서 꼭 잡고 가야 할 최후의 몬스터가 하나 있거든.”

    자루 속에서 비린내를 풍기는 선지.

    나는 눈을 빛냈다.

    “질질 끌 것 없지. 바로 움직이자고.”

    “바로 사냥인가. 좋지.”

    드레이크는 내 말을 듣자 바로 일어났다.

    우리가 막 오두막 문을 나서려 할 때.

    저 멀리, 창밖으로 낯익은 소리가 들려온다.

    [교주님! 저깁니다! 저기 불빛이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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