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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14화 (114/1,000)
  • 114화 가혹한 설산 (3)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10년 전의 기억이다.

    당시, 나는 평균 B등급의 장비들로 무장한 채 설산을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우지끈-

    화염과 강철 계열 특성이 덕지덕지 붙은 도끼를 몇 번이고 욱여넣은 끝에.

    쿵-

    된서리 엔트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우수수수수…….

    거대한 몸뚱이가 땅에 쓰러지자 옅은 지진이 일어 잎사귀들 위에 쌓인 눈을 떨군다.

    “좋았어!”

    고등급 몬스터를 1:1로 쓰러트렸다는 것에 나는 가슴 벅차했다.

    B+등급이라고 해도 그냥 B+등급이 아니다.

    그 악명 높은 북대륙의 몬스터가 아니던가!

    동급의 몬스터에 비해 약 반 수 이상 높게 평가되는 북대륙의 몬스터들이다.

    특히나 ‘된서리 엔트’는 개체값과 특성치만을 따졌을 때 A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력한 존재!

    나는 그런 놈을 1:1로 잡은 것이다!

    “됐어! 이 녀석이 이 근방에서 제일 강한 몬스터겠지?”

    나는 죽을 둥 살 둥 쓰러트린 된서리 엔트가 이 구역의 최강 몬스터라고 확신했다.

    녀석의 방어력과 공격력, 특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된서리 엔트는 상당히 많은 양의 경험치를 주었지만 별다른 아이템을 떨구지는 않았기에, 나는 레이드 기록만을 아카식 레코드에 새기고 된서리 숲을 빠져나왔다.

    숲을 빠져나온 나는 거센 눈보라를 피해 이글루를 팠다.

    눈을 단단하게 다져서 벽돌을 만든 뒤 그것을 동그랗게 쌓는다.

    그리고 그 위에 삭정이나 눈을 끌어 모아 뒤덮으면 훌륭한 은신처가 되는 것이다.

    뿌지직-

    나는 이글루 안에 숨어 된서리 엔트의 나뭇조각으로 불을 피웠다.

    “좋네.”

    모닥불 위에 고기스프가 든 냄비와 사케 병을 올려놓자 절로 풍류에 젖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밖은 춥고 안은 훈훈하다.

    맛있는 안주와 술이 있었고 경관도 좋다.

    아무것도 부족한 게 없었다.

    이히히히…….

    ‘그것’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뭐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뿌슉-

    이글루의 눈 벽에 구멍을 뚫자.

    이히히히히-

    ‘그것’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뚜렷하게 들려왔다.

    저 멀리, 눈보라 때문에 흐릿하게 보이는 산등성이 위에 무언가가 서 있었다.

    그것은 흐느적거리는, 어딘가 불쾌하게 느껴지는 움직임으로 비탈길을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있는 이글루를 향해서 말이다.

    “…몹인가?”

    나는 허리춤에 있던 도끼를 빼들었다.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오며 수많은 몬스터들과 맞붙어 왔다.

    흰 털을 가진 늑대,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펭귄, 얼음 갑옷으로 무장한 거대 고릴라.

    모두들 강했지만 내 상대는 아니었다.

    “넌 또 무슨 몹이니?”

    나는 옅은 기대감으로 도끼 손잡이를 말아 쥐었다.

    하지만.

    이윽고 등장한 몬스터의 외형은 내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나를 향해 꾸물꾸물 기어오는 것은 큰 키에 깡마른 몸을 가진 여자였다.

    그것은 네 개의 팔다리를 기괴한 각도로 뒤틀며 이쪽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기어왔다.

    찌걱- 찌걱-

    그녀의 손이나 발, 머리카락에 닿는 곳에는 눈보다 하얀 서릿발이 생겨난다.

    아마 닿는 모든 것을 얼려 버리는 기괴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기어오는 술래 ‘이히히히’> -등급: A / 특성: 얼음, 어둠, 언데드, 술래

    -서식지: 가혹한 설산

    -크기: 2m.

    -마을에서 마녀로 몰린 여자가 얼음 구덩이에 산 채로 던져졌다. 머리 위로 연신 끼얹어지는 차가운 물을 맞으며, 그녀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네임드 몬스터!

    랜덤으로 출현하는 필드 보스가 분명하다.

    나는 눈앞으로 기어오는 이 알몸의 여자를 향해 전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이히히히-

    막상 그녀가 내 눈앞에 섰을 때, 나는 그만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차가운 어둠 속에서 드러난 그녀의 얼굴.

    “으아아아아!”

    비명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게임의 장르가 순식간에 공포/호러로 바뀐 것에 적응하지 못한 나는 곧장 뒤돌아 도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히히히히-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없었다.

    두터운 갑옷으로 무장한 나는 당연하게도 이동 속도가 느렸다.

    사삭.

    사사삭.

    파사사사삭-

    그에 반해 이히히히가 바닥을 기어오는 속도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다.

    결국.

    나는 이히히히가 뿜어내는 냉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쩌저적-

    발바닥부터 타오르는 서리.

    나는 순식간에 투명한 얼음 속에 갇혀 버렸다.

    ‘허윽!?’

    얼음 속에 갇히고 나서도 한동안 의식은 있었다.

    휘이이이잉-

    HP를 천천히 깎아 먹는 눈보라 속에서, 나는 투명한 얼음덩이에 갇힌 채 정면만을 쳐다보게 된 것이다.

    이히히히히-

    그동안, 이히히히는 내가 갇힌 얼음 근처를 빙글빙글 돌며 끊임없이 웃어 댔다.

    때때로 내 얼굴 바로 앞에 자기 얼굴을 들이대며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보라색의 긴 혀를 꺼내 핥는 등의 행동도 보였다.

    ‘살려 줘!’

    나는 가진 모든 아이템을 동원해 얼음을 깨려 했지만.

    -띠링!

    <이 얼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 얼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 얼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 얼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

    .

    계속해서 파괴불가를 알리는 알림음만이 뜰 뿐이다.

    그 와중에도 눈보라는 계속해서 나의 HP를 깎아 먹는다.

    이히히히히-

    이히히히의 괴기스러운 웃음소리와 외모 역시도 나의 정신을 조금씩 깎아 낸다.

    결국.

    나는 밀려오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로그아웃해 버리고 말았다.

    *       *       *

    “그 뒤로 한동안 게임에 접속을 못 했지.”

    나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어둡고, 춥고, 아무도 없는 곳.

    그런 곳에서 얼음에 갇혀 천천히 천천히 홀로 홀로 죽어간다는 것.

    …상상만 해도 너무 무서운 일이다.

    심지어 저렇게 흉악한 몰골을 가진 귀신에게 붙잡힌 상태라니!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히히히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으스스하게 드리워진 머리카락 사이로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된다면 그 어떠한 강심장이라도 소름이 끼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히히히에게 붙잡힌 한 여성 유저가 충격으로 기절하는 사고가 터지는 등 말썽이 많은 몬스터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사고들 때문에 나중에 얼굴이 모자이크 되게끔 편집이 되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욱 불길한 상상을 자아내는 몬스터.

    “으으, 지금은 패치 전이잖아. 저 얼굴을 또 보긴 싫어.”

    나도 어지간한 호러/고어 영화쯤은 곱창전골에 소주를 먹으며 볼 수 있는 비위를 가졌지만…….

    그래도 이히히히만큼은 절대 사절이다.

    한편.

    나와 같이 열심히 도망가는 드레이크는 연신 고개를 갸웃한다.

    “왜 옷을 벗고 있는 거지, 저 여자.”

    그대 호기심이 많은 중생이여.

    하지만 도망가는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과연 탑은 다르구나 싶다.

    나는 고인물답게 답변을 해 줬다.

    “사람이 저체온증에 걸리면 뇌가 이상을 일으켜서 오히려 덥다고 인식하게 된다나 봐. 그래서 실제로도 얼어 죽은 이들은 죽기 전에 옷을 벗어서 시체가 알몸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대.”

    “호오. 고증이 잘 된 것이었군. 어진, 너는 정말 유식하다. 항상 많이 배운다.”

    드레이크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하지만.

    사실 지금 이렇게 한담을 주고받을 때는 아니었다.

    쩌저저적-

    이히히히의 이동 속도는 정말 빠르다.

    놈의 손에서 뻗어 나온 서리 파동이 눈 덮인 벌판을 온통 떨리게 만들었다.

    결국.

    “헉!?”

    드레이크는 바닥을 타고 뻗어 온 서릿발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딱! 따악!

    드레이크는 허벅다리에서 단검을 뽑아 발을 뒤덮은 얼음을 깨려고 했지만…….

    -띠링!

    <이 얼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이 얼음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파괴할 수 없습니다>

    .

    .

    계속해서 파괴불가를 알리는 알림음만이 뜰 뿐이다.

    이내.

    쩌저적-

    드레이크는 순식간에 투명한 얼음에 뒤덮였다.

    이대로라면 얼음에 갇힌 채 눈보라에 맞아 죽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땡!”

    내가 손을 뻗어 드레이크의 몸을 툭 쳐 주자.

    빠그작!

    드레이크의 몸을 덮고 있던 얼음은 너무나도 쉽게 부서졌다.

    “…이건 대체?”

    드레이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닥의 얼음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자기가 깨려고 할 때는 그렇게 안 깨지던 얼음이 남이 툭 치는 것만으로도 깨져 버렸다.

    나는 그런 드레이크에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얼음땡 알지?”

    그렇다.

    이히히히의 특성 중 하나인 ‘술래’

    이것은 이히히히를 극강의 하드코어 몬스터로 만들어 준 괴랄한 특성이다.

    필드 보스로 랜덤 출현하는 이 몬스터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파괴불가의 얼음으로 감싸 버린다.

    일단 이히히히의 얼음에 잡히면 그 뒤는 답이 없다.

    그대로 눈보라 속에 방치되어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료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동료가 얼어붙은 몸을 만져 주기만 해도, 파괴불가의 얼음은 말끔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몸을 만지는 것에는 ‘공격’도 허용된다.

    가령 궁수가 화살을 쏘거나 마법사가 마법을 써도 ‘터치’로 인정된다.

    하다못해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어도 된다.

    얼음에 뒤덮인 동안 입는 모든 데미지는 0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이래서 산을 넘을 때 꼭 두 명 이상이 있어야 한다는 거였군.”

    드레이크는 내 혜안에 탄복했다.

    그리고 그동안.

    “으악! 살려 줘!”

    나는 이히히히의 서릿발에 붙잡혀 버렸다.

    쩌저저적!

    내 몸을 감싸는 파괴불가의 얼음!

    그동안 잊고 있던 악몽이 도지는 것 같다.

    “빨리 날 만져 줘! 터치 마이 바디!”

    나는 드레이크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핑크 알몸 대머리의 사내가 자신의 몸을 터치해 달라고 고래고래 외치는 것은 다소 충격적인 광경일지도 모르지만…….

    “…….”

    드레이크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나보다 뒤에서 다가오는 이히히히의 모습이 훨씬 더 괴상망측한 것이었기에.

    “땡!”

    드레이크는 재빨리 쇠뇌를 들어 내 손을 겨냥했다.

    따악-

    화살이 내 손에 맞자, 내 HP는 전혀 닳지 않으면서도 몸을 덮고 있는 얼음이 싹 사라졌다.

    “네가 원딜 캐릭터라서 다행이야.”

    나는 진심으로 안도했다.

    만약 두 명 다 근접 딜러였다면 이히히히와의 얼음땡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설산을 넘어 도망쳤다.

    이히히히히-

    그동안 이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는 계속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조금씩 멀어지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아직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저 몬스터 상당히 집요한데? 차라리 여기서 잡고 가는 게 낫지 않겠나? 술래 특성만 조심한다면 원딜로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드레이크는 화살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표적이 된 이상 끝까지 쫓아올 거야.”

    “…흐음.”

    “그리고, 잡는다고 해도…….”

    나는 턱을 짚었다.

    “…아니 잠깐, 굳이 여기서 잡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한데.”

    이왕 끔찍한 상대에게 노려질 바에야,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련다,

    이히히히히-

    저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이제는 그리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걸 어떻게 전략적으로 써먹을까 하는 생각뿐이다.

    …….

    나는 몇 분간 생각한 끝에 드레이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마교 애들 지금 어디까지 왔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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