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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13화 (113/1,000)
  • 113화 가혹한 설산 (2)

    뿌드득-

    서리가 깨지는 소리는 분명히 가까이서 들려온다.

    “……?”

    드레이크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딱히 특이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소리는 엄청나게 컸지만 풍경은 변함이 없다.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거늘, 주위 풍경은 정적인 채 그대로였다.

    “대체 뭐지?”

    드레이크는 긴장한 표정으로 활시위를 당긴 채 주변을 경계했다.

    나는 그런 드레이크에게 힌트를 주었다.

    “나무를 숨기려거든 숲에 숨겨야 하는 법이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콰쾅!

    하늘에서 시커먼 철퇴가 떨어져 내렸다.

    “우왓!?”

    드레이크는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눈밭을 굴렀다.

    이윽고.

    습격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된서리 엔트> -등급: B+ / 특성: 풀, 독, 얼음, 무한성장, 바벨(Babel)

    -서식지: 된서리 숲

    -크기: ?m.

    -북대륙에 빙하기가 찾아옴에 따라 많은 생물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이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이 기묘한 나무괴물들은 혹독한 추위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고 얼어붙은 몸으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들이 어떤 목적 어떤 과정으로 이 땅에 나타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시커먼 나무껍질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나무 괴물.

    그 모습은 마치 커다란 야자수가 뿌리를 발처럼 뻗어 걸어 다니는 듯하다.

    놈이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는 이 맵 전체가 나무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촤아악-

    땅 위에서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나무줄기.

    그리고 땅 밑에 매복해 있다가 솟구치는 송곳 같은 가시로 공격해온다.

    “이 녀석이 된서리 숲의 보스야. 등급이 높으니 조심하라고.”

    내가 경고하자, 드레이크는 의문을 표했다.

    “이 몬스터를 꼭 상대해야 할 이유가 있나?”

    “있지. 이걸 잡아야 눈보라를 뚫을 수 있거든.”

    “그렇다면야.”

    드레이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쇠뇌와 마름쇠를 집어 들었다.

    […Mox nox.]

    된서리 엔트의 목소리는 고요하게 얼어붙은 숲 속에서 음산하고 고독하게 울려 퍼졌다.

    이내.

    놈은 거대한 몸뚱이를 뻗어 우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콰직!

    거대한 나무줄기가 굵은 채찍이 되어 얼음바닥을 때린다.

    퍼퍽!

    땅 밑에 숨어 있던 매복뿌리가 송곳처럼 튀어 올라 발바닥을 노렸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이 몬스터에 대한 세부 정보를 떠올렸다.

    ‘단조로운 공격 패턴에 느린 공격속도, 하지만 덩치가 워낙 커서 예상치 못한 피격에 주의할 것. 가끔 보이는 상태이상 공격이나 지형 데미지 역시도 경계해야 하지.’

    아니나 다를까.

    된서리 엔트는 내 기억 속 모습과 똑같이 행동한다.

    철썩-

    먼저 전방의 부채꼴 모양의 범위를 나무줄기로 쓸어버리는 공격.

    촤아악-

    짧은 시간 동안 입에서 녹색의 수액을 뿜어내는 공격.

    뚜두둑-

    땅 속에 매복시켜 놓은 뿌리를 송곳처럼 뽑아내는 공격.

    콰콰쾅-

    특정 방향으로 돌진해 오는 공격,

    하나하나가 강력한 데미지를 주는 공격이다.

    맞으면 꽤 아프겠지만, 맞지 않으면 아플 일도 없다.

    “자, 한 방에 잡는다는 생각은 버리고. 각 부위들을 먼저 파괴하면 편하다. 뿌리는 재생되지 않으니 땅 위로 튀어나왔을 때 하나씩 제거하면 되고.”

    “그럼 나는 저 성가신 팔을 맡지.”

    “좋아. 나는 그럼 왼쪽 다리를 노려볼까.”

    드레이크와 나는 각각 엔트의 팔과 다리를 노렸다.

    퍼퍽!

    단단한 나무껍질 갑옷을 불걸음으로 걷어차자 이내 흰 속살이 보인다.

    나는 그곳에 가차 없이 깎단을 박아 넣었다.

    펑-

    된서리 엔트는 커다란 몸을 기우뚱 휘청인다.

    젠 된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덩치가 커지는 ‘무한성장’ 특성.

    이 무한성장 특성이 붙어있는 몬스터답게, 이 녀석은 양 다리와 양 팔, 그리고 몸통의 HP가 부위별로 따로 따로 분리되어 존재한다.

    때문에 깎단의 도트 데미지만으로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콰쾅!

    깎단의 도트 데미지가 엔트의 발을 파괴했지만, 나머지 부위들은 아직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푸확!

    놈은 커다란 입만 달린 얼굴을 내게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쩍 벌어진 검은 입 속에서 녹색의 수액을 뿜어냈다.

    철썩-

    나는 그 독을 뒤집어썼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 데미지를 입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독’ 특성보다 4배는 더 강한 ‘맹독’ 특성을 이미 패시브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푸확!

    된서리 엔트는 드레이크를 향해서도 녹색의 수액을 뿜어냈다.

    “어림없지.”

    드레이크가 막 그 수액을 피하려고 하는 순간!

    “피하지 마!”

    나는 드레이크를 만류했다.

    “……!”

    결국, 드레이크는 어정쩡한 자세로 된서리 엔트의 독액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뿌직-

    드레이크에게 독 데미지가 들어간다.

    1초에 최대 HP의 0.0025%가 닳게 된 것이다.

    “으윽! 끈적거려. 이걸 왜 맞으라고 한 건가?”

    드레이크는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다 생각이 있다.

    “된서리 엔트의 수액은 독이 있긴 하지만 추위 저항력을 높여 주지. 피부에 바르면 눈보라로 인한 데미지를 막을 수 있어.”

    “하지만 독 데미지가 들어오잖나?”

    “일반 독 데미지는 최대 HP의 0.0025%밖에 되지 않아. 반면 눈보라는 0.01%를 깎지. 데미지를 1/4로 줄일 수 있다고.”

    나는 지금까지 잘라 놓은 된서리 엔트의 뿌리들을 있는 대로 집어 들어 인벤토리에 넣었다.

    “자, 이제 튈 시간이야.”

    저 거대한 나무괴물을 굳이 다 잡을 생각은 없다.

    […Alea iacta est.]

    된서리 엔트는 괴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우리를 따라왔다.

    하지만, 나는 굳이 이 녀석을 지금 잡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말이다.

    된서리 엔트는 말 그대로 ‘특이한’ 몬스터이다.

    놈의 가지고 있는 ‘무한성장’ 특성은 좀처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

    어찌 보면 내 소환수인 쌍뿔칠흑이 가지고 있는 ‘백전노장’ 특성의 하위 호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의 진정한 가치는 무한성장 특성과 함께 붙어 있는 ‘바벨(Babel)’ 특성에서 나온다.

    “…뭐, 아직은 먼 미래니까.”

    나는 먼 훗날, 하늘에 닿을 듯 커져있을 된서리 엔트를 떠올리며 잽싸게 숲을 빠져나갔다.

    *       *       *

    휘이이잉-

    된서리 숲을 나서자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친다.

    하지만 엔트의 수액을 온몸에 바르고 있기 때문에 추위는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깎여 나가는 HP역시 1/4로 줄었기에 한결 버틸 만했다.

    쿠르륵-

    나는 땅에서 잡아 뽑은 엔트의 뿌리에 불을 붙였다.

    끈적한 수액에 불이 붙자, 그것은 가혹한 눈보라에도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었다.

    드레이크는 횃불에서 송글송글 배어나오는 수액을 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냄새 하나는 정말 역하군.”

    “그나마 시야를 밝힐 만한 게 이것뿐이니 별수 없지. 이 정도 굵기면 하루는 탈거야.”

    나는 횃불을 들어 정면을 비추어 보았다.

    휘이이잉-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북쪽 끝으로 보이던 북극광도 이젠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흑과 백. 어둠과 눈만이 지배하고 있는 설산.

    횃불 타는 소리만 지글거리는 설원이다.

    푹- 푹- 푹-

    우리는 추위와 어둠 속을 횃불 한 자루에 의지해 걸어 나갔다.

    몬스터와 싸운다거나 함정을 피한다는 게 아닌, 그냥 존재하는 것 자체가 시련이 되는 맵.

    “…….”

    드레이크는 이런 가혹한 환경에서도 별다른 불평이 없다.

    “조금만 참으면 마을이 나올 거야.”

    나 역시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난 15년간의 기억이 맞다면 이 근방에 분명 간이 마을 하나가 존재한다.

    맵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은 비공식 마을.

    뭐 그래도 NPC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온기를 쬘 수도 있고 포션 등의 잡화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싸겠지만 말야. 돈 있지?”

    내가 드레이크를 독려하자, 그는 건조하게 웃었다.

    “웬일로 설명이 친절하군? 평소에는 따라올 테면 따라오고 말려면 말라는 뉘앙스였는데.”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나는 한 번도 드레이크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없다.

    언제나 선택지를 권했을 뿐.

    그리고 그런 식으로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드레이크의 마음에는 제법 들어 버린 듯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이 맵은 혼자서는 못 넘는 맵이거든.”

    그 말에 드레이크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모든 것을 혼자서 척척 해 왔던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진지하다.

    “이 맵은 꼭 두 명 이상이 함께 넘어야 하는 맵이야.”

    마치 산골로 혼자 들어가는 나그네에게 호환(虎患)을 경고하는 소금장수처럼, 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설산을 향해 말했다.

    …진지한 궁서체로.

    그러자 드레이크는 다시 한 번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어째서 그렇지?”

    “…그야 무서우니까.”

    나는 심플하게 대답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무서우니까.

    죽는 게.

    내 대답을 들은 드레이크는 여전히 의아하다는 눈치였다.

    “뭐가 그렇게 위험하지?”

    “지형도 지형이지만, 북방의 몬스터들은 진짜 괴랄하거든.”

    북대륙의 몬스터들은 가혹한 지형에 맞게끔 진화했다.

    등급 대비 특성치나 종족값이 굉장히 높은 편이며 행동 패턴 역시 난해하다.

    당장 아까의 된서리 엔트만 해도 온갖 요상한 특성들로 무장하고 있지 않았던가?

    드레이크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까의 나무괴물도 상대하기 까다로웠지. 방어력과 HP가 B+등급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높더군. 공격 패턴이야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지만…….”

    하지만.

    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그의 말을 일축했다.

    “된서리 엔트는 말할 가치도 없어. 그 녀석은 이 산의 생태계에서는 아주 순한 축에 든다고. 최약체야 최약체.”

    “…그 정도인가?”

    “진짜 무시무시한 것은 따로 있지. ‘그것’만은 가능한 안 만나고 싶은데…….”

    내 말을 드레이크는 크게 놀란다.

    지금껏 내 입에서 이렇게 자신 없는 말이 나온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뭔데 그러나?”

    “…….”

    드레이크의 질문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옅은 두려움과 우려,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혹시나 마주칠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한.

    “‘그것’은 말야…….”

    내가 막 대답을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이히히히히히-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실려 온 작은 웃음소리.

    “……?”

    드레이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는 분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하얀 눈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끝없는 눈길과 칼바람 저편에서 들려오는 웃음.

    이히히히히히히-

    그 웃음소리는 이제 아주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나는 표정을 구겼다.

    가혹한 설산을 넘다 보면 극히 낮은 확률로 만나고 마는 존재.

    우리는 ‘그것’에게 발각되어 버린 것이다!

    이윽고.

    어둠에 잠긴 언덕 봉우리 끝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괴할 정도로 깡마른 몸에 큰 키를 가지고 있다.

    언뜻 보기엔 긴 머리를 풀어헤친 여자의 모습 같았지만, 도저히 사람으로 생각되지 않는 기묘한 움직임으로 봉우리를 내려오고 있었다.

    네 발로 껑충껑충 기면서 말이다!

    이히히히히히-

    ‘그것’은 온 관절을 사방으로 꺾으며 네 발로 눈 쌓인 비탈길을 사사삭 기어 내려왔다.

    한번 몸을 덩실거릴 때마다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설산에 가득 메아리친다.

    “…헉!”

    그 오싹한 모습을 본 드레이크는 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눈보라, 높게 쌓인 눈.

    모든 것이 불길한 환경 속에서.

    와사사삭-

    ‘그것’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며 이쪽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기어오고 있었다!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그것’에게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다.

    “…으으, 내가 이래서 여기를 혼자 못 와. 저 웃음소리를 다시 듣게 되다니.”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그것’을 피해 앞으로 내달렸다.

    ‘이히히히히히히-’

    머릿속에서는 ‘그것’에게 당했던 10여 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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