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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12화 (112/1,000)
  • 112화 가혹한 설산 (1)

    와장창!

    난동이 벌어지고 있는 성벽 위.

    나는 전력을 다해 포위망을 탈출했다.

    내가 뚫은 곳은 ‘제 13구역’

    포위전선이 끝나가는 무렵이라 비교적 약한 부분이었다.

    “살아남은 도플갱어가 있나 보군.”

    드레이크는 둘로 나뉘는 마교의 추격대를 보며 중얼거렸다.

    포위망과 맞붙기 전.

    나는 ‘도리안 그레이의 숲’으로 가서 도플갱어 12마리를 포획해 왔다.

    도플갱어가 상대를 인식하고 변화하기 직전, 나의 소환수인 ‘쌍뿔칠흑’이 그것들을 집어삼켜 뱃속에 포획한 것이다.

    <쌍뿔칠흑> -등급: B+ / 특성: 백전노장, 과식, 독 면역, 마법면역

    -서식지: 거인국, 똬리를 튼 사념(巳念)

    -크기: 20m.

    -노오란 눈알, 두 개의 뿔을 보고 있자면 저도 모르게 홀려 버린다.

    사악한 주술을 이용해 자기보다 강한 적에게 맞선다.

    몸을 촘촘히 덮고 있는 칠흑의 비늘은 모든 독, 마법 데미지를 흘려 버린다.

    내 반지에서 나온 이 칠흑의 뱀은 ‘과식’이라는 새로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일정 시간 동안 적을 뱃속에 가두는 것인데, 이때 뱃속에 갇힌 적은 HP회복이라거나 특성 등을 쓸 수가 없다.

    도플갱어들을 집어삼킨 쌍뿔칠흑은 내 앞에서 그것들을 다시 게워내었고, 나는 12마리의 분신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총 13명의 고인물!

    나는 그 기세로 포위망을 내달려 결국 도망에 성공했다.

    도플갱어들은 대부분 죽은 모양이지만, 살아남은 녀석도 있기는 있는 모양.

    “그 덕에 추격대의 전력이 반으로 줄었군. 다행이네.”

    나는 안도했다.

    그때.

    드레이크가 문득 의문 하나를 제기했다.

    “그런데 어진. 저들은 도플갱어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것 같던데?”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사실 포위망을 뚫기 직전, 유저들이 도플갱어의 존재를 알게 되면 고인물과 마동왕의 대결이 주작인 것을 의심하지 않을까 싶긴 했다.

    하지만 도플갱어의 카피와 도플갱어 카이저의 카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또한 도플갱어 카이저는 도그숲 깊숙한 곳에서만 등장하는 히든 보스이기 때문에 수년간은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을 것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한데.

    사람들은 도플갱어 카이저의 존재를 알기는커녕 도플갱어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게. 도플갱어가 뭔지도 모르나 보네. 밝혀질 걱정은 전혀 없겠어.”

    나는 일말의 걱정도 할 필요가 없게 되어서 좋았지만, 드레이크는 계속 의문인 모양이다.

    “한데. 우리가 도그숲에 처음 갔을 때, 먼저 온 유저가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

    도리안 그레이의 숲에 처음 갔을 때, 한 마법사 유저의 모습으로 변한 도플갱어를 본 적이 있다.

    그 말인즉슨, 도그숲을 발견한 유저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그숲의 도플갱어들이 어떻게든 인터넷 사이트에 드러나 있을 터인데…….

    “…하지만. 도플갱어의 검색 결과는 0건이군.”

    드레이크는 계속해서 의문을 표시한다.

    하지만.

    나는 드레이크의 말을 듣는 즉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핵이군.’

    그렇다.

    핵, 또는 매크로.

    게임이 인기를 얻고 성황리에 운영되니 핵쟁이들이 슬슬 등판할 때가 되었다.

    본격적으로 핵쟁이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앞으로 1년 정도 뒤이지만…….

    ‘지금부터 슬슬 보인다 이거로군?’

    게임을 켜 놓고 자동사냥을 돌려놓으면 플레이어는 랜덤한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며 자기 등급에 맞는 적을 찾아 사냥한다.

    아마 그 마법사 유저 역시 핵을 돌려놓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핵에 의해 랜덤한 방향으로 움직이다가 도플갱어를 만나 무심코 전투를 벌였고 카피당한 끝에 사망.

    매크로를 돌렸기 때문에 자기가 어디서, 왜 죽었는지도 모르겠지.

    당연히 도플갱어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플레이 하는 것을 보면 핵인지 아닌지 딱 알 수 있지만, 그때는 죽은 시체를 본 상태여서 핵쟁이인줄 몰랐다.

    그리고.

    나는 15년 동안의 기억을 빠르게 더듬었다.

    이윽고, 내 머릿속에 유명한 핵쟁이 하나가 떠오른다.

    ‘김정은!’

    마법사 클래스로 꽤나 독보적이었던 랭커.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레벨로 세간에 주목을 받았지만, 그 끝은 좋지 않았다.

    그녀가 일궈낸 성과들이 대부분 핵, 매크로로 인한 것임이 들통 났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돈 복사, 아이템 복제 버그 등으로 꽤나 말썽을 일으켰던 뻔뻔한 여자.

    게임이 서버 종료를 앞둔 시점까지 불법적인 행위를 일삼던 사람이다.

    나는 도그숲에서 만난 여자 마법사 도플갱어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쩐지 낯이 좀 익다 했어. 15년 전이라서 몰라봤네.’

    하지만.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휘이이이잉-

    전신을 토막 낼 기세로 몰아닥치는 칼바람.

    그렇다.

    우리는 중앙대륙을 벗어나 북대륙, ‘가혹한 설산’에 도착한 것이다!

    *       *       *

    “…더럽게 춥군.”

    드레이크는 턱수염에 얼어붙은 서리를 쓸어내며 투덜거렸다.

    북대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설산’ 맵.

    말 그대로 온통 눈과 얼음에 뒤덮여 있는 가파른 곳이다.

    -띠링!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눈보라는 초당 최대 HP의 0.01%를 앗아갑니다>

    이곳은 설산 중에서도 높고 가파르기로 악명 높은 ‘가혹한 설산’

    지형만 해도 가혹한데 거기에 HP를 깎아먹는 눈보라까지 밥 먹듯이 몰아친다.

    아무리 대단한 랭커라고 해도 전문 장비 없이 2시간 이상을 등산하는 것은 체력적으로 무리다.

    거기에 몬스터들과 각종 천연 함정들까지 감안한다면… 이곳에서의 레이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침없이 이 설산을 올랐다.

    “눈보라는 피하면 돼.”

    내 신발, 간쇼마루의 발가죽이 불을 뿜는다.

    원래는 마동왕의 아이템이지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쿠르륵-

    내 발이 뜨겁게 달아오르자, 이내 단단하게 뭉친 눈이 녹기 시작했다.

    “이리로 들어오도록 해.”

    나는 눈 동굴 속에 들어간 뒤 밖에 서 있던 드레이크에게 말했다.

    “눈보라는 얼마 동안 몰아치나?”

    “랜덤이야. 짧으면 1분, 길면 며칠.”

    “현실과 거의 같다고 보면 되는군.”

    나와 드레이크는 이글루 속에서 참을성 있게 버텼다.

    운이 좋았는지, 눈보라는 약 2시간 뒤에 멎었다.

    “오오!”

    이글루 밖으로 나온 드레이크는 탄성을 질렀다.

    눈보라가 걷히자 드러난 것은 압도적인 대자연!

    눈앞엔 깎아 내지른 듯한 두 개의 절벽이 마주하고 있었고 그 주변을 얼음의 산맥들이 웅장하게 둘러싸고 있다.

    검푸른 빛의 오로라가 산맥의 끝자락을 뒤덮고 있었고, 그 아래엔 반사광을 내뿜으며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거대한 설원이 깔렸다.

    이 웅장하고 고요한 세상은 만들어진 이래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은 채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내 왔을까.

    오묘하고도 압도적인 대자연의 신비는 마치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진다.

    ‘거대한 신세계(新世界)’

    바라보고 있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소름이 돋게 만드는 것.

    게임 속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장관에 드레이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 감동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이가 있었으니…….

    “으쌰! 그럼 또 시작해 볼까!”

    핑크색 알몸을 뽐내는 대머리 사내.

    바로 나다!

    나는 알몸으로도 씩씩하게 눈 덮인 설산을 등반했다.

    이내, 나와 드레이크는 설산의 중턱, 평야 부근에 이르렀다.

    -띠링!

    <된서리 숲 (1) 구역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익숙한 알림음들이 뜬다.

    ‘된서리 숲’

    설산에 있는 숨겨진 오픈필드.

    이곳은 비교적 조용했다.

    눈보라가 이따금 몰려왔지만 된서리 숲의 빽빽한 밀림을 뚫지는 못했다.

    얼어붙은 나무들은 독특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야자수처럼 곧은 직선의 줄기가 하늘 높이 뻗어 있었고 수없이 많은 잎사귀들이 버드나무의 것처럼 드리워졌다.

    껍데기는 하얀 된서리가 잔뜩 얼어붙어 있어 흰 빛을 뿜었지만 군데군데 속이 드러난 곳은 시커먼 흑색이었다.

    마치 거대한 머리카락들이 얼어붙어 있는 듯한 모양새.

    바닥은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고 작고 검은 덤불들 역시 차고 딱딱하다.

    한땐 번성했었던 숲이 천천히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단기간에, 그것도 아주 한순간에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오래 전 이곳에서 레이드를 뛰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이 맵의 설정이 뭐였었더라?”

    아, 기억난다.

    ‘무투룡’과 ‘거인 대왕’의 한판승부.

    이 세계를 다스리는 일곱 용과 과거 멸종당하기 전만 해도 최강 지배종이었던 거인족의 일곱 대왕이 맞붙었다.

    그중 화이트 드래곤에게 패한 거대한 자이언트가 얼어붙어 그대로 ‘가혹한 설산’이 되었다는 이야기.

    ‘뭐 자세한 건 [SKIP]하고…….’

    그러니 우리는 지금 전설 속 거인의 두피 위, 머리카락 사이를 걷고 있는 셈이 된다.

    이 얼음이 녹으면, 세상이 아주 재미있어지겠지?

    나중에 펼쳐질 ‘뜨거운 세상’을 떠올리자 몸이 전율로 떨린다.

    “나중에 대격변 때 만나용~”

    나는 거인의 두피 위를 꾹꾹 밟으며 중얼거렸다.

    그때.

    -띠링!

    <눈보라가 몰아칩니다>

    <눈보라는 초당 최대 HP의 0.01%를 앗아갑니다>

    또다시 눈보라가 몰아칠 기미를 보인다.

    “이번 눈보라는 좀 길겠군.”

    나는 숲 밖으로 몰아치는 눈발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드레이크는 그걸 어떻게 아느냐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눈보라가 부는 시간은 랜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야 그렇지. 근데 대충 어느 정도 지속될지 짐작할 수는 있어.”

    “…어떻게?”

    드레이크의 의문은 계속된다.

    딱히 감출 만큼 가치가 있는 노하우는 아니었기에,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눈보라의 패턴을 보는 거지. 랜덤이라고는 하지만 오래 지속되는 눈보라일수록 프로그램 리소스를 줄이기 위해 움직임이 단순화된다. 요컨대 떨어지는 눈들 중에서 같은 각도, 같은 속도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찾아내서 그 빈도수를 평균 내면 되는 거야. 살짝 보기에도 32개 정도의 눈송이들이 같은 각도로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 눈보라는 굉장히 오래 지속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지.”

    “…….”

    “참 쉽지?”

    내 대답을 들은 드레이크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실제로 눈보라의 지속 옵션을 상, 중, 하로 바꾸면 눈 튀는 거나 서리 내리는 것 등의 효과도 바뀌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기껏 꿀팁을 알려 줬는데 왜 그러지?’

    오히려 내 쪽에서 고개를 갸웃할 일이다.

    …….

    뭐, 아무튼.

    사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얼어붙은 머리카락 나무들을 헤치며 숲 깊숙이 들어갔다.

    “이 눈보라는 꽤나 길 거야. 그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뚫고 나가려면 준비가 필요하지.”

    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띠링!

    <된서리 숲 (2) 구역에 입장하셨습니다>

    <최초 방문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얼어붙은 보스’가 눈을 떠 불쾌감을 표합니다>

    <‘얼어붙은 보스’가 돌아갈 것을 권합니다>

    요란한 알림음들이 꽁꽁 언 귓가에 메아리쳤다.

    드레이크는 알림음을 듣고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분명히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다못해 하늘까지 올려다보았지만 아무런 몬스터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얼어붙은 나무들만이 빽빽하게 깔려 있을 뿐.

    그러나.

    뿌드득-

    얼어붙은 서리가 깨지는 소리는 분명히 가까이서 들려온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언가 아주 거대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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