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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11화 (111/1,000)
  • 111화 핑크 덜렁덜렁이의 습격 (3)

    어둠이 내린 성벽.

    성벽 위에 있는 요철(凹凸)은 견고하기 그지없다.

    성가퀴 뒤에는 붉은 장포를 휘날리는 플레이어들이 서 있었다.

    <마교(魔敎)>

    정확히는 ‘마동왕사랑교’가 이 길드의 풀 네임이다.

    수많은 마교의 보초병들이 마동왕을 죽인 플레이어 ‘고인물’을 잡기 위해 포진하고 서 있다.

    대부분은 여자들이었다.

    “얘, 이번에 마동왕 님 프로데뷔 경기 몇 번 봤니?”

    “저는 30번 돌려 봤어요 언니. 진짜 압도적이더라고요.”

    “우리가 공식 팬카페 1호니까 나중에 팬미팅도 하고 그러겠지?”

    “진짜 그 동굴 보이스 꼭 다시 듣고 싶어요. 현실에서는 목에 상처가 있으셔서 음성변조기를 차고 계신다던데. 게임 속에서라도 맘껏 들었으면….”

    “그러고 보니 유다희 교주님은 자차 안에서 직접 얘기도 나누셨다는데?”

    “꺄악! 부럽다 정말! 그럼 가면 속 얼굴도 보셨을까?”

    “나는 그분 가면 속이 어떻든 좋아할 거야. 너무 카리스마있잖어~”

    “으앙, 어떻게든 다가가고 싶다. 간만에 사생질이나 해 볼까요?”

    그녀들은 마동왕이 얼마나 멋있는지를 이야기하며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마동왕에게 다가가고 싶은 그녀들에게 다가온 것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펄럭-

    눈앞을 스쳐 지나는 무언가.

    “…응?”

    성벽 위에 서 있던 마교 여인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들의 얼굴에 달빛을 등진 무언가가 스산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높은 성가퀴 위.

    요철의 튀어나온 부분에 사뿐히 내려앉은 존재.

    ‘괴인(怪人)’

    달을 등진 그는 어둠에 젖은 망토를 바람에 펄럭인다.

    그러자, 망토 안으로 괴인의 몸속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이!

    “꺄아아아악! 바바리맨이야!”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것은 게임이다. 현실이 아니라.

    현실에서 저러고 다니면 변태 바바리맨에 불과하겠지만, 게임에서 저러고 다니면 조금 의미가 달라진다.

    진짜 무시무시한 고수.

    적에게 한 대도 맞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갑옷 대신 두르고 다니는 존재들.

    바로 고인물이다!

    “피, 핑크!”

    변태 사내의 피부색을 확인한 마교 여인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검은 망토 안으로 들여다보인 것은 선명한 핑크색 속살!

    마교의 척살대상인 ‘BJ고인물’이 아니던가!?

    “…큭큭큭.”

    이내, 고인물은 허리춤에서 날카로운 송곳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쉬익-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가퀴 아래를 내달려 마교 여인들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소, 손에 뭐야!? 뭘 들고 있는 거야!?”

    “진정해! 저건 그냥 평범한 송곳이다!”

    “우리를 몇 명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마교 여인들은 저마다 칼과 창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사사사삭-

    고인물은 어마어마한 순발력으로 마교 여인들의 공격을 피했다.

    마치 냉장고 뒤로 숨는 바퀴벌레 같은 움직임!

    푸푸푸푹-

    그리고 빈 공간마다 칼 같이 송곳을 찔러 넣는다.

    “이 자식! PK수치가 두렵지도 않나보지!?”

    “호호호! 멍청한 놈! 너도 곧 죽게 될 거다!”

    “응, 카르마 올려 봐야 너만 손해야~”

    마교 여인들은 죽어 가면서도 회심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분별한 PK를 감지한 근위대 NPC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붕- 붕- 부웅-

    성벽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근위병들은 투창을 던져 고인물을 노린다.

    그러나.

    퍽! 퍽! 퍼엉-

    고인물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창 사이를 얄밉게도 빠져나간다.

    그리고는 간 크게도 근위병들을 역으로 공격한다!

    콰직-

    근위병 하나가 고인물의 송곳에 목을 맞아 살해당했다.

    이건 온 세상의 NPC들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뜻!

    그것을 본 마교 여인들은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벌린다.

    “와 진짜 미친 놈인가!?”

    “평생 포션 안 살 건가 봐! 장비도 경매소에 안 팔 셈인가!? 아이템 수리도 못 할 텐데!?”

    “모든 플레이어들에게 몬스터 취급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뜻!? 뭐 저런 또라이가…….”

    무대포도 이런 무대포가 없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고인물은 마교 여인들 사이를 마구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이익!”

    동료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본 한 여자가 뿔이 났다.

    그녀는 품속에서 커다란 폭죽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게 뭔 줄 알아!? 신호탄이야! 쏘는 즉시 천 명이 여기로 몰려올 거다! 너를 잡으려!”

    초보자 마을의 북쪽 성벽으로 13개로 나누어 각 구역마다 하나의 신호탄을 배치해 놓았다.

    이곳은 제7경비구역.

    고로 이 구역에서 신호탄이 터진다면 이쪽으로 나머지 다른 12 구역의 마교 병력들이 모조리 몰려드는 것이다.

    하지만.

    “…큭큭큭큭.”

    고인물은 잘려나간 근위대의 머리를 한 손에 든 채로 음침한 핑크색 미소를 짓는다.

    어디 한번 할 테면 해 보라는 듯.

    그 무시무시한 핑크색 살기에 마교 여인들은 움찔했다.

    “못 쏠 줄 알아!? 어디 두고 보라고!”

    여인은 악에 받친 소리로 소리쳤다.

    그녀는 이내 하늘을 향해 폭죽을 높이 들어올렸다.

    “My life for 마교!”

    이윽고.

    하늘로 붉은 빛줄기가 솟아오른다.

    뻐엉-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마교 여인들은 승리를 직감했다.

    이제 곧 천 명, 아니 예비역들까지 포함해 2천이 넘는 척살대가 이쪽으로 집결할 것이다.

    ...

    한데?

    뻐엉-

    뻐엉-

    뻐엉-

    뻐엉-

    뻐엉-

    뻐엉-

    뻐엉-

    뻐엉-

    뻐엉-

    뻐엉-

    뻐엉-

    뻐엉-

    요란한 폭죽 소리가 12번 추가로 이어진다.

    “……?”

    마교 여인들은 이게 무슨 조화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는 붉은 빛줄기 12개가 더 보인다.

    13개의 경비구역에서 13개의 폭죽이 일제히 터져 오른 것이다.

    *       *       *

    콰쾅!

    성가퀴 하나가 무너졌다.

    근위대가 던진 아틀라틀들이 구멍 난 벽돌과 함께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푹- 찍-

    송곳에 찍힌 근위병과 마교인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크크크크…….”

    고인물!

    그는 핑크빛 알몸을 뽐내며 달빛을 등지고 섰다.

    달빛에 물든 대머리가 반짝- 하고 핑크를 뿌린다.

    저 신들린 몸놀림에 벌써 몇 명이 죽은 것일까?

    성가퀴보다 높게 쌓인 시체들이 벌써 성벽을 뒤덮었다.

    몸이 날랜 한 여인이 재빨리 길드 채팅창에 외쳤다.

    “여기는 남서쪽! 제11경비구역! 지원 바랍니다!”

    ...

    하지만 아무도 답이 없다.

    콰쾅!

    고인물은 지금 이 순간도 날뛰고 있다.

    근위대들의 투창을 얄밉게 피해 다니며 마교와 근위대를 농락한다.

    마교 여인은 절박하게 다시 외쳤다.

    “제11경비구역! 지원 바란다고!”

    그러자, 답이 돌아왔다.

    [우리도 못 가!]

    길드 채팅창에 소리 지르던 여인은 뜻밖의 대답에 놀라 할 말을 잃었다.

    황급히 채팅창을 켜서 자세히 보니…….

    [제1경비구역 대상 발견! 지원바람!]

    [제2경비구역 고인물 출현! 전멸직전!]

    [제3경비구역 적 출현! 제 4 구역도! 어느 쪽이 진짜인가 알 수 없음!]

    [제5경비구역…]

    .

    .

    채팅창엔 저마다 지원을 요구하는 말로 가득했다.

    “아아아악!”

    셩벽마다 비명소리가 빗발친다.

    다들 갑자기 나타난 괴인, 핑크색 대머리 알몸 사내를 상대하는 것에 정신이 없다.

    …….

    문제는 그 변태 괴인이 한 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13인의핑크알몸대머리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드높은성벽이적당하오)

    제1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2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3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4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5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6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7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8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9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10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11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12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제13의핑크알몸대머리가달려나가오.

    .

    .

    핑감도(乒瞰圖).

    상당히 난해한 풍경.

    13인의 핑크, 알몸, 대머리 사내가 일제히 성벽 위를 질주한다.

    열세 개의 덜렁덜렁(?)거리는 핑크가 달빛 물든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렸다.

    이 ‘이상’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체 어떤 정신세계를 가진 이가 창조해 낸 광경일지 심히 의심스러워진다.

    “호에에에엥- 제발 날 죽이지 마! 현질까지 해서 산 아이템이 드랍되면 난…!”

    “사망 패널티는 싫어요! 죽이지 말아 주세… 꺄악!”

    “으아! 내 레어템 부수지 마! 수리불가란 말…아악!”

    13인의 고인물에게 밀려 속절없이 무너지는 포위벽!

    뿌득-

    마교 교주 유다희는 그 광경을 보며 이를 갈았다.

    “바지라도 좀 입어라 이 미친 새끼야!”

    그녀는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핑크 괴인 하나의 뚝배기를 절반쯤 깨 부숴 버렸다.

    “…큭큭.”

    괴인은 반쯤 무너진 차단석에 기대어 주저앉는다.

    몸에는 서른 개가 넘는 창이 박혔고 한쪽 팔과 다리는 불과 번개에 지져져 까맣게 타들어갔다.

    심지어 유다희가 휘두른 배틀액스에 맞아 얼굴의 절반이 날아간 상태이다.

    그런 상황에서.

    푸시시식-

    핑크 괴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그대로 녹아 버렸다.

    시커먼 액체로 변해 흩어지는 고인물.

    그 정체는 바로 도플갱어였다!

    <도플갱어> -등급: ? / 특성: 1/3, 연쇄살인

    -서식지: 도리안 그레이의 숲

    -크기: ?

    -정체를 알 수 없는 암흑물질.

    생명체인지조차도 불분명.

    도플갱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다희는 이를 뿌득 갈았다.

    대체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이, 이, 이, 이 빌어먹을 샊…!”

    길드 채팅창에는 계속해서 다급한 채팅들이 올라온다.

    -교주님ㅅ라려줏메ㅛ

    -지우너 바라단 지우ᅟᅥᆫ!!

    -살려줏요

    -전ᅟᅧᆱ멸당해ㅆ다고!!

    .

    .

    엄청난 인명피해가 잇따르고 있었다.

    한 곳에 모일 시간도 없이 각개격파 당한 13개의 척살대.

    뒤늦게 합류한 근위대의 도움으로 대부분의 고인물 도플갱어들을 죽이기는 했지만…….

    “두 구가 빠져나간 것 같아! 제1구역과 제13구역이야 누나!”

    유창의 보고를 받은 유다희는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

    처음과 끝 부분의 척살대가 포위에 실패하는 바람에 구멍이 뚫려버렸다.

    유창은 계속해서 보고했다.

    “제1구역의 고인물은 서쪽! 제13구역의 고인물은 북쪽으로 갔대!”

    “병력을 둘로 나눠!”

    유다희는 거침없이 지령을 내렸다.

    공격대를 편성, 통솔, 지휘하는 그녀의 재능은 상당히 뛰어난 것이었다.

    유다희는 금방 마교의 잔존세력들을 규합했고 이를 둘로 나눴다.

    1천 명의 병력!

    한 쪽은 서쪽으로 간 고인물을 추격하는 500 결사대.

    다른 한쪽은 북쪽으로 간 고인물을 추격하는 500 결사대다.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이 자식.”

    유다희는 이를 갈며 500명의 결사대원들을 이끌고 출격했다.

    단순히 자기에게 피해를 입힌 것에 대한 복수만이 아니다.

    핑크색 고인물을 쫓는 그녀의 눈동자 역시 핑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 님을 죽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 주마!”

    유다희는 동생 유창을 이끌고 말에 올랐다.

    그리고 거침없이 서쪽과 북쪽, 둘 중 하나의 방향을 향해 말머리를 몰았다.

    왠지 모르게 조금 더 신경이 쓰이는 쪽.

    질긴 인연의 끈이 이어져 있는 쪽.

    지금껏 그 어떤 랭커도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쪽.

    북쪽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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