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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110화 (110/1,000)
  • 110화 핑크 덜렁덜렁이의 습격 (2)

    -띠링!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당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나는 게임 접속 직후 바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수풀, 달그림자가 드리워진 호수.

    이곳은 중앙대륙 남부의 한 숲, 내가 목표로 하는 중앙대륙의 북부 성벽과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나는 그 숲 가운데에서도 가장 외지고 텅 빈 공간에 섰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로그아웃하고 로그인을 하는 습관은 여전하다.

    “…어디보자.”

    나는 고개를 돌려 바닥을 쳐다보았다.

    바닥에는 C등급의 한손무기 하나가 떨어져 붉은 빛을 뿌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대충 만든 돌도끼> 한손무기 / C

    구석기인이 대충 만든 돌도끼. 그래도 맞으면 상당히 아프다.

    -공격력 +100

    -암석 공격력 +10

    -특성 ‘단단한 피부’ 사용 가능 (특수)

    저것은 내가 로그아웃 전에 저기에 던져 놓은 것.

    썩 대단한 등급의 아이템은 아니지만, 그래도 경매소에 3~5만 원 정도의 가격으로 올려놓으면 초보자들이 충분히 살 만하다.

    “음, 아무도 안 왔나 보군.”

    누군가 이곳을 지나갔다면 분명 저 아이템을 주워갔을 것이다.

    이것이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은 그동안 여기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나는 아이템을 회수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혹시나 해서 몸을 가릴 로브라도 하나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바스락-

    뒤에서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

    고개를 돌리자, 꽤나 예쁘장한 여자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무척이나 공교롭다.

    하필 이럴 때에 여기에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내가 약간 당황하는 순간.

    여자는 나를 알아본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 혹시 고인물 님?”

    이런, 이제 일반 유저까지 나를 알아보는 건가?

    내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그녀의 두 눈이 싸늘하게 좁아진다.

    “하긴,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변태가 달리 또 있을라고?”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 들어오는 붉은 글귀.

    <마교>

    그것은 길드명이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늦었다.

    당황한 나보다 작정하고 행동한 그녀의 행동이 더 빨랐다.

    퍼펑-

    그녀는 나를 향해 대뜸 사각형의 고무 상자 비슷한 것을 던졌다.

    -<정령들의 랜덤 염색 키트> / D

    아주 오래 전. 정령들이 악마들에게 멸종당하기 전에 만들어진 아이템이다. BOX 속에는 정령들이 친 장난이 그대로 남아 깃들어 있다.

    …열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지도?

    그것은 나에게 닿는 즉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졌고…

    -띠링!

    <‘정령들의 랜덤 염색 키트’의 효과가 발동됩니다>

    <캐릭터의 용모가 24시간 동안 특정한 형태로 변해 고정됩니다>

    <…핑크의 정령이 당신에게 관심을 표합니다>

    <…대머리의 정령이 당신에게 관심을 표합니다>

    <…알몸의 정령이 당신에게 관심을 표시하려다가 맙니다>

    나는 졸지에 이상한 외형으로 변하게 되었다.

    “으아아아아!? 뭐야 이게!”

    비명이 절로 나온다.

    나는 대머리가 되었고, 전신의 피부색이 핑크색으로 물들어버린 것이다!

    <삽화>

    마교 여자는 재빨리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꼴좋다! 마동왕 님의 원수! 변태! 죽어!”

    그녀는 나를 향해 저주 섞인 욕을 남긴 채 사라져 버렸다.

    …뭐, 전부 사실이기에 0의 데미지를 입었지만 말이다.

    “…젠장.”

    쫓아가서 죽이고 싶었지만, 나에게 실질적으로 데미지를 입힌 것이 아니기에 함부로 PK를 걸 수도 없다.

    “이게 무슨 꼴이야. 랜덤 염색 박스라니…”

    나는 몸을 내려다보았다.

    대머리가 된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전신이 핑크로 물들어 버린 것은 치명타다.

    펄럭-

    급한 대로 인벤토리에서 아무 망토나 후드를 걸쳐 봤지만, 밖으로 삐져나온 손이나 발 등은 어떻게 가릴 수가 없다.

    알몸, 핑크, 대머리.

    기묘한 3종 세트가 완성되었다.

    “큰일이네. 이대로는 포위망을 뚫을 때 엄청 집중받을 텐데…”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은 북대륙.

    가혹한 기후와 고레벨 몬스터들 때문에 이제껏 아무도 가지 못한 미개척구역이다.

    대격변!

    이 거대한 패치 및 업데이트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북대륙을 공략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북대륙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앙대륙의 초보자마을을 통과해야 한다.

    유다희가 교주로 있는 마교 길드는 지금 그 초보자마을의 북쪽 성벽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그 길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변장을 해야 하는데…

    “핑크 알몸 대머리로는 변장을 해도 쉽지 않겠군.”

    뭐, 전신을 죄다 다른 아이템으로 가리면 핑크색 몸은 가릴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그 자체로 엄청 수상한 복장이 되지 않겠는가?

    “북쪽 성벽을 통과할 때에는 마동왕으로 잠깐 변신할까 했는데…그것도 다 텄네.”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섰다.

    그때.

    “이봐, 어진.”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중저음.

    드레이크의 목소리였다!

    ‘그래, 드레이크가 함께한다면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자고로 궁수는 은신의 대명사 아니던가!

    넘버 원 궁수 드레이크라면 분명 주목받지 않고 성벽을 은밀하게 타넘을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돌아선 내 눈에 보인 이는…

    “나도 당했다, 어진.”

    나와 완벽하게 똑같은 처지의 핑크 빡빡이였다.

    *       *       *

    나와 드레이크는 야음을 틈타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언덕에 섰다.

    부웅- 붕-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D급 몬스터인 살육 벌이 몇 날아다니다가 드레이크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

    언덕이 텅 비게 되자, 우리는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초보자 마을의 성벽을 살폈다.

    “사람이 엄청나게 많군.”

    드레이크는 눈살을 찌푸렸다.

    초보자마을을 굳게 둘러싸고 있는 성벽 위.

    높은 성가퀴 사이마다 검붉은 옷을 입은 플레이어들이 철통같은 수비를 하고 있다.

    전원이 마교인이다.

    심지어 고인물에게 원한이 있는 다른 길드, 중 고등학생들로 이루어져 있는 ‘인천연합’도 보인다.

    YouDie 길드의 유다희와 인천연합의 장태익이 손을 잡은 모양.

    드레이크는 성벽에서 눈을 떼고 나를 돌아본다.

    “그때 샌드웜에게 당한 두 개 길드가 ‘마교’로 뭉쳤군.”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아니, 대체 그동안 뭘 하고 다녔기에 저들이 이렇게까지 하나?”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미움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할 뿐이다.

    “그냥, 나 자신과 싸웠을 뿐이야.”

    “…?”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마동왕도 나고 고인물도 나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성벽의 근황을 살폈다.

    [마동왕 님을 죽인 간악한 고인물 놈에게 정의의 불벼락을!]

    [무찌르자 고인물! 그간의 원수를 씻어내자!]

    [핑크색만 보이면 무적권 철퇴부터 날려라!]

    [우리의 주적은 핑크!]

    성벽 위에서 쩌렁쩌렁 들려오는 구호들.

    세상에, 이렇게까지 아가페적인 증오는 처음 본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유저들이 아니다.

    성벽 사이사이로 보이는 근위병 NPC들, 저것들이 진자 골칫거리였다.

    초보자 마을의 근위병.

    그들은 ‘아틀라틀’이라는 투창을 들고 다닌다.

    근거리에서는 장창과 효자손처럼 생긴 몽둥이를 이용해 싸우고 원거리에서는 몽둥이와 창을 결합한 뒤, 창을 뿌리듯 던져 상대를 요격한다.

    약 300km의 속도로 날아오는 이들의 투창은 거의 300미터 이상을 날아가기도 한다.

    참고로 근위대의 스텟은 B+급 몬스터에 필적할 정도, 그리고 그들을 통솔하는 근위대장은 A급 몬스터와도 일전이 가능할 급이다.

    만약 초보자 마을에서 난동을 피웠다가는 곧바로 이들에 의해 제지된다는 소리.

    그리고.

    그런 근위대가 지금 마교 길드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

    PK범의 초보자 마을 입성을 막겠다는 것이 표면적인 슬로건이다.

    “…오늘 나를 무조건 잡아 죽일 기세인데?”

    나는 턱을 쓸며 고민했다.

    아무리 나라도 저렇게 많은 인원을 상대로 PK를 벌일 수는 없다.

    몬스터라면 패턴대로 행동해 잡으면 되지만 불특정 다수의 플레이어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거기에 300미터 이상을 날아오는 근위대들의 아틀라틀은 아무리 나로서도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것이고…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변장이지만.

    “하지만 그것도 ‘핑크’ ‘대머리’ ‘알몸’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불가능해졌잖아.”

    그러자, 드레이크가 나를 벌레 보듯 쳐다본다.

    “…알몸은 강제로 된 게 아니라 자유의지 아닌가?”

    “…드레이크.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는 드레이크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지금 저 마교인들을 돌파해 북쪽 성벽을 넘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레이드는 힘들어진다.

    대격변!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S+급 몬스터와의 기나긴 전쟁!

    이것들에 대비하려면 북대륙으로의 모험은 꼭 필요한 것이다.

    “… … …”

    나는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며 고민했다.

    야밤.

    핑크색 피부를 가진 대머리가 알몸으로 제자리 회전을 하고 있는 모습.

    누가 봤다면 오들오들 떨며 도망칠 풍경이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다.

    이내.

    “그렇지!”

    나는 묘수 하나를 떠올렸다.

    겜창이 괜히 겜창이 아니다.

    나는 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시간낭비 없이 안전하게, 목적을 달성할 방안을 찾아낸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며 얼마간 잠수 좀 타겠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시간낭비 할 것 없이 바로 움직이자.”

    나는 핑크 대머리 드레이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무슨 방법이 있나?”

    드레이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초보자 마을의 성벽 위, 마교의 철통같은 포위망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지금부터 재미있는 걸 보여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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