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109화 (109/1,000)
  • 109화 핑크 덜렁덜렁이의 습격 (1)

    ‘너에게 척살령이 선포되었다!’

    ‘…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과거, 나는 거대한 필드보스형 몬스터 ‘샌드웜’을 잡기 위해 한 가지 꾀를 썼었다.

    그것은 가공의 거부 ‘응씨’를 만들어서 나 자신에게 척살령을 내리고 거액의 현상금을 내거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를 잡기 위해서 수많은 세력들이 모여들었다.

    길드, 사냥꾼, 난다 긴다 하는 랭커들…….

    하지만 그들은 나의 ‘미끼’에 불과했다.

    나는 그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샌드웜을 유인했다.

    결국.

    나를 죽이러 왔다가 졸지에 샌드웜을 만난 현상금 사냥꾼들은 모조리 전멸 당해야만 했다.

    나는 수많은 이들과의 격전으로 지친 샌드웜에게 막타를 먹여 이득을 취했었고 말이지.

    …….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다르다.

    얼마 전에 내려진 따끈따끈한 척살령.

    이건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자발적으로 나의 척살령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모양.

    ‘뭐지?’

    나는 게임에 들어가기에 앞서, 각종 게임 커뮤니티에 접속해 정보를 모아보았다.

    #척살령 #고인물 #현상금 #모이자 #싸우자 #죽이자 #이기자

    하지만.

    꽤 오랜 시간을 돌아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척살령에 대한 정보는 거의 얻을 수 없었다.

    “…흐음.”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접근 방식을 조금 다르게 해야 할 것 같다.

    생각을 기초 단계에서부터 다시 해보기로 했다.

    현재 한국 랭킹 1위인 임요셉의 레벨은 약 20대 후반.

    장비하고 있는 아이템 중 최고 등급이라고 해 봐야 B급 정도일 것이다.

    15년 전 기억에 남아 있는 해외 고수들이라고 해도…….

    용냥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드레이크가 이제 레벨이 30대 초반, 원래 장비하고 있는 아이템 중 가장 고등급이 B+등급이었다.

    현재 그는 나의 도움으로 고르곤을 잡는 것에 성공했고, 그 보상인 A급 아이템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고르곤의 뿔 파편 마름쇠> 한손무기 / A

    고르곤의 뿔은 산산조각난 뒤에도 여전히 위험하다.

    만약 이것의 파편이 살 속으로 파고든다면, 그 부분을 속히 잘라낼 것을 권한다. 돌이 되기 싫다면 말이다.

    -공격력 +1,000

    -독 공격력 +500

    -특성 ‘마나 번’ 사용 가능 (특수)

    바닥에 뿌리는 트랩 계열의 아이템.

    이것이 현 드레이크의 최고 등급 아이템이다.

    게임 역사상 최악의 괴물인 ‘앙신(殃神)’ 조디악 번디베일 역시도 B+등급 장비를 몇 개 가진 것이 다였다.

    -<와두두 여왕의 눈알> 목걸이 / A

    와두두는 집단의식이 뚜렷한 곤충이다. 그들은 동료가 받은 고통을 기꺼이 나누어 짊어진다.

    하물며 여왕의 고통임에야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최대 HP +50%

    -재생력 +50%

    -특성 ‘갹출’ 사용 가능 (특수)

    뭐. 물론 자력으로 손에 넣은 A등급 목걸이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그것을 놈이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결국 세계 최상위권 고수들의 장비가 B~B+급 정도. 간혹 A등급이 한 개 있을까 말까.

    뭐 이런 수준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나를 잡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을 것이란 말이지?”

    레벨은 기껏해야 20대, 장비의 평균 등급은 C+~B정도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와의 격차를 메꾸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다.

    쪽수.

    예나 지금이나, 고수를 잡는 데에는 다구리가 가장 확실하고 편한 방법이다.

    장비나 레벨, 컨트롤.

    그들로서는 넘사벽 몇 개는 넘어야 만날 수 있는 나를 잡기 위해서라면 필시 꽤 많은 수가 몰려들었을 터.

    그리고 그만한 집단이 생겨났는데 커뮤니티가 조용할 리가 없다.

    나는 ‘척살령’이라는 키워드 대신 새로 생겨난 거대한 집단 위주로 검색을 했다.

    #길드 #공격대 #레이드 #클랜 #클럽 #동아리 #소모임 #척살 #의뢰 #PK

    뭐든 좋다.

    갑작스럽게 생겨난, 꽤나 고레벨로 이루어져 있는, 그리고 왠지 모르게 비밀스러운.

    그런 집단.

    이내.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수상한(?) 집단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마교(魔敎)>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구성원들의 평균 레벨이 상당히 높다.

    자기들끼리의 결속력도 꽤나 끈끈한 것 같았다.

    길드 자체가 제법 폐쇄적인 편인지 안에 무슨 공지가 올라가 있는지 어떤 활동을 주로 하는지도 불명확하다.

    애초에 길드명도 무슨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길드명이다.

    “마교가 뭐야 마교가. 무협 RPG야?”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이 길드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자.

    이 길드의 숨겨진 풀 네임이 뜬다.

    <‘마’동왕사랑‘교’>-마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뭐야 이건?

    나는 황당한 마음에 입을 반쯤 벌렸다.

    마교의 정체는 바로 ‘마동왕 팬클럽’이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팬클럽이 생겨나 있을 줄이야!

    재빨리 마동왕 계정으로 접속해 채널을 열자, 마교의 교주(?)로 추정되는 이에게 온 메일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동왕 님! 마교의 ‘교주’ 유다희입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말았다.

    ‘얘는 여기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놀랍게도, 유다희는 그녀가 이끌던 거대 길드인 ‘YouDie’길드에서 핵심 인력들을 빼 ‘마교’를 꾸린 것이다.

    천천히 메일 내용을 읽어 보자 입이 점점 벌어진다.

    <마동왕 님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팬으로서, 지난 번 고인물의 파렴치한 행위는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것입니다. 감히 비열한 수를 써서 마동왕님에게 부당한 PK 승을 가져간 그 놈의 존재를 저희 마교 측에서는 절대로 그냥 묵과할 수 없으며 반드시 피의 복수를…>

    요약하면 ‘우리 오빠 때린 놈 뒤졌어!’ 이거다.

    …따지고 보면 먼저 고인물에게 시비를 건 것은 마동왕이 아닌가?

    한데 이런 반응은 대체 무엇일까? 열성팬들의 마음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뭐…어차피 내가 나한테 시비건 것이긴 하지만…”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머리를 긁었다.

    하기야, 마동왕과 고인물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열성팬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화날 수 있는 일이긴 하겠다.

    그러고 보니, 지난 번 유튜뷰 연말 시상식에서 유다희를 만났던 것이 떠오른다.

    족발 뼈를 손아귀 힘으로 으깨 부수던 그 모습을 생각하자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는 계속해서 유다희의 메일을 읽어 내려갔다.

    <저는 고인물 그 자가 북쪽으로 레이드를 간다고 하는 정보를 입수, 그가 접속할 시기를 노려 중앙 대륙 쪽 경비병 NPC들과 협의하여 포위망을 펼칠 생각입니다.>

    <이미 뜻을 같이하는 수많은 마교인들이 있으니 척살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혹시 제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거나 주제 넘는다고 생각되시면 ㅇ월 ㅇ일까지 답장을 보내주세요. 바로 중단하겠습니다ㅠㅠ!!! 만약 답장을 주시지 않는다면 저희 나름대로 임의대로 계획을 세워 실행…>

    <그럼 마동왕님의 소중한 의견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희 올림♥->

    “…나를 사랑하니까 나를 죽이겠다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나의 복수를 위해 나를 죽이겠다니.

    이 무 모 엇 순 인 은 가.

    답장을 보내려 했지만 이미 날짜가 지나 버렸다.

    윤솔의 뷰티 방송을 돕느라 신경을 못 쓴 것이 패인이었다.

    “심지어 계획이…굉장히 실현 가능성 있는데?”

    내가 북쪽으로 조금씩 올라가면서 사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도 놀랍지만, 중앙대륙의 경비병들과 연계를 할 생각을 한 것도 놀랍다.

    중앙대륙, 초보자 마을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하나같이 B+급의 실력을 가진 NPC들.

    놈들이 PK범을 잡는다는 이유로 마교에 협조하게 되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경비병들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까딱해서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기라도 하면 카르마 수치가 미친 듯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거의 모든 NPC들과의 상거래가 불가능하게 되어 게임 이용에 큰 지장이 가게 될 것이다.

    장비를 팔 수 없거나 포션 등의 소모품도 사지 못한다면 랭커들에게 있어서 큰 패널티가 되겠지.

    심지어 프로게이머라면 더더욱.

    경비병을 길드 차원에서 부리는 것이야 마을 자경단장에게 신청서와 마을 발전기금을 내고 합당한 이유만 제시하면 되는 것이기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보통 레이드에 실패한 몬스터가 마을까지 내려와 난동을 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NPC들이라지만, PK범을 잡는 것에는 굉장히 협조적이니…

    나는 내 PK수치 ‘카르마’가 얼마나 되는지 떠올려 보았다.

    도플갱어 카이저에게서 얻은 히든 피스 ‘피카레스크 마스크’가 대부분의 카르마를 대신 흡수해 주었기에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NPC를 속일 때에나 가능한 것.

    경비병들 옆에 마교 측 플레이어들이 포진해 있다면 그것도 힘들 가능성이 크다.

    “…이거 귀찮게 됐네.”

    나는 슬그머니 고인물 계정으로 접속해 메일함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간악한 꼼수를 일삼는 더러운 게이머 ‘고인물’에게 정의의 불벼락을 내릴 것이다! -북쪽사는마교인->

    <너 같은 변태가 어딜 감히 마왕 오빠를 건드려!!! 죽여버릴거야!! -마교LOVE♥->

    <마왕 님에게 폐 끼친 것 사과하시고 자살해주세요^^ -마동왕사랑™->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

    .

    .

    마동왕의 팬들에게서 온 저주 메일들이 한가득 쌓여 있다.

    아니, 고인물도 나고 마동왕도 나인데 이 온도차는 대체 무엇?

    혹시나 해서 고인물의 팬들이 보낸 메일도 확인해 보니?

    <고인물 횽! 눈치 있지? 여기서 횽이 죽어줘야 재밌는 거 알지^^?>

    <진짜 이 상황에서도 살면 그건 예능감 없는 거다~~ㅋㅋ>

    <고인물아 분위기 파악 좀 해라, 한번은 좀 죽어줄 때도 됐잖니. 마교 교주 예쁘드만~~>

    <그동안 언제 죽나 언제 죽나 하는 맛으로 봤는데…오늘은 제발!!>

    <횽이 죽는 거 보고 싶어요! 죽으면 후원 많이 할게요!>

    <덜렁거리면서 죽어주세요!>

    <나는 횽이 죽을 때가 제일 섹시하드라ㅋㅋㅋ>

    <죽을 때 제 이름 한번만 불러주세요~~^^>

    .

    .

    “…이야, 어떻게 하나도 도움이 안 되네.”

    이쯤 되면 팬이 아닌 것 아니냐?

    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메일함을 껐다.

    그리고 굉장히 생경한 감정 상태로 캡슐 앞에 섰다.

    “관성 때문에 일단 들어가기는 한다만…”

    절로 한숨이 새어나온다.

    고인물, 겜창, 외길 인생 15년.

    그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세상에, 살다 살다 게임하기 싫은 날이 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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