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고인물 VS 마동왕 (3)
유다희는 내 귓가에 대고 따듯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한데… 이왕 PK를 하실 거, 저희 길드의 이름을 걸고 뛰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왔다.
그래, 유다희는 똑똑하고 머리 좋은 여자.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이걸 노린 거였나.’
어째 판을 깔아 주는 데에 열심이다 싶었는데 이런 속셈이었군.
마동왕이라는 신예 프로선수가 가진 홍보 효과는 엄청나다.
또한 내가 가진 광역기술은 대규모 길드전을 할 때 어마어마한 전력이 되리라.
내가 유다희의 길드에 들어가게 되면 그녀로서도 상당한 홍보 효과와 전력을 동시에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를 고용하는 데 든 비용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이득.
슥-
천천히 내 허벅지를 더듬어 오는 유다희의 손바닥.
마치 떡볶이집 아줌마 같은 손길이다.
“일단 가입만 하시면 우리 마동왕 님…하고 싶은 것 다 하셔도 돼요.”
귓가에 녹아내리는 그녀의 비음.
하지만.
나는 아직 길드생활을 할 마음이 없다.
…….
어디까지나 ‘아직은’
“무리생활은 별로야.”
일언지하.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
단호했겠지?
‘음, 끝에 목소리가 조금 떨렸을지도.’
하지만 음성변조기 덕분에 전혀 티가 안 났을 것이다.
듣는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겠지.
그러나.
유다희가 누군가?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한다.
“그거야 무리생활을 누구랑 하는지에 따라 다른 것 아닌가요?”
이윽고.
그녀는 나를 향해 상체를 천천히 굽혀 오기 시작했다.
“어디, 라면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할래요?”
동시에.
슥-
유다희는 자신의 오프숄더 끈 한쪽을 내렸다.
어둠 속, 그녀의 하얀 쇄골 라인이 눈 쌓인 것처럼 빛난다.
나와 그녀의 얼굴이 확 가까워졌다.
달달하고 끈적한 살 냄새가 물씬 느껴진다.
“오늘 밤 내내 설득하면 마음이 바뀌시려나?”
유다희는 아직 1시도 되지 않은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군대를 막 전역한 직후, 곧 스물두 살을 앞둔 나이.
원래대로였다면 홀딱 넘어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정신연령은 36살을 목전에 두고 있다.
스무 살의 유다희.
15년 전의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연애감정이 전혀 들지 않는다.
내 골수까지 뽑아갔던 서른넷의 유다희에 비하면 아직 한창 어리고 순진할 나이.
엉뚱한 욕심과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는 깜찍한 태도.
이젠 밉다기보단 그저 앙큼한 막내 동생 같다.
나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라면 뭐 있는데?”
“…네?”
내가 묻자, 유다희는 조금 당황했다.
눈알을 한참 데굴데굴 굴리던 그녀는 이내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부리?”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시마를 싫어해.”
“…그럼 푸라면?”
“나는 매운 걸 싫어해.”
“…그럼 니개새키 짬뽕?”
“나는 중국음식을 싫어해.”
“…그건 일본 음식인데요?”
“일본은 음식은 괜찮은데 거기 총리가 싫어.”
“…?”
내가 계속해서 대답하자, 유다희는 이내 멍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거기에 대고 약간의 훈계를 해 주었다.
“라면의 포화지방산은 혈관에 쌓이지. 화학조미료도 너무 많고 단백질, 무기질, 비타민 등이 모자라다. 인이 많아서 칼슘을 소모시키기도 해. 특히 나트륨의 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지.”
“…??”
“선수 생활을 길게 하려면 식습관도 중요하다.”
정말로 막내동생을 훈계하듯 말해 버렸다.
“…???”
유다희는 멍한 표정으로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럼 얘기 끝났으니 이만 일어나지.”
나는 대화를 일방적으로 종료했다.
차 문을 열기 전에 그녀의 오프숄더 끈을 올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에? 벌써 가시게요?”
유다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에 훤히 드러난다.
하긴, 이렇게 감정을 숨기는 것에 아직 서툰 것도 스무 살의 유다희니까 그런 것이겠지?
서른넷의 유다희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뭐 아무튼.
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꽤나 뜻밖의 상황이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거침없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빨리 집에 가서 레이드 돌아야 돼.’
이번 생에서는 정말 열심히, 건실하게 살기로 마음먹지 않았나?
레이드 돌고 운동하고 푹 자려면 얼른 집에 가야 한다.
...라면?
그건 전생에 평생 먹을 양 다 먹었다. 이제는 안 먹어.
덜컥-
나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한데?
얼른 나가야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손이 나도 모르게 움직였다.
그것은 10년 전, 손에 익을 대로 익은 움직임.
습관이라는 게 참 이렇게 무섭다.
사사삭-
나는 조수석 글로브 박스를 열고는 그 안의 작은 쓰레기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사이드미러 앞에 있는 재떨이를 열었다.
덜컹-
수북하게 쌓여 있는 꽁초들이 압축파일마냥 꽉꽉 눌러 담겨져 있다.
탈탈탈-
나는 쓰레기봉투 안에 재떨이를 털어 넣고는 그 안에 있던 끈적한 오물들까지 봉투 씌운 손가락으로 싹 흩었다.
그러자, 유다희가 크게 당황한다.
“아, 아니! 뭐 하시는 거예요! 이리 주세요! 제가 버려야 하는데…!”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아차 싶었다.
10년 전, 나는 우연히 그녀의 차 조수석에 탔던 적이 있다. 그때는 평범한 국산 차였지만… 아무튼.
유다희는 그 당시만 해도 호구였던 나를 각별하게 챙겨주는 ‘척’하며 어장관리를 했었다.
하지만.
그랬던 그녀가 딱 한 번, 나에게 진심을 보인 적이 있었는데…
* * *
어느 비 오는 날 밤.
별조각을 많이 쏜 대가로 땄던 1일 데이트 권의 마지막 순간.
‘오빠 갈게 다희야.’
나는 유다희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차에서 내렸었다. 그때만 해도 평범한 소형차였지.
그 당시, 나는 마시던 우유 곽을 뜯고는 그 안에 유다희의 차 안 재떨이를 한번 비워 준 적이 있다.
뭐라도 해 주고 싶었는데 더 해 줄 게 없어서 했던 행동.
‘오빠 뭐 해요!? 이리 줘! 내가 할 거야!’
그때도 유다희는 크게 당황해서 나를 말렸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재떨이를 비워 줬다.
‘내가 가면서 버릴게.’
그때 내가 웃으면서 한 말에, 유다희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었다.
뒤늦게 듣기로는, 유다희는 그때 처음으로 마음이 한번 움직였었다고 했다.
자신의 재떨이를 비워 준 남자는 내가 처음이었다나?
뭐,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진심이었는지 가식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재떨이.
꽁초, 담뱃재에 스며든 가래침, 씹던 껌, 치렁치렁한 치실, 커피 찌꺼기…
참으로 다양한 것들이 담겨 있었던 그때 그 재떨이.
나는 그것을 작은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가는 길에 버렸었다.
유다희는 그런 거 안 해 줘도 된다고 극구 사양했었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그녀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그 뒤로 그녀의 차를 다시 타게 되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혹시나 그럴 때를 대비해 언제나 자동차의 재떨이를 비우는 연습을 했었다.
혹시라도 그녀의 차에 다시 타게 되었을 때 너무 좋아서 까먹지 않도록, 아예 습관을 들여놓기 위해.
하다못해 택시를 타도 그곳의 재떨이를 비워 주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일 뿐.
지금은 현실이다.
“개호구였네, 나 진짜.”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습관이란 것이 정말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아니, 이 경우에는 노예근성이라고 해야 하나?
바스락-
손을 꽉 움켜쥐자 쓰레기봉투 안에 든 담배꽁초들이 움직인다.
다시 내려놓고 싶었지만, 이왕 봉투에까지 담아 버린 것 어쩌겠나?
“이건 내가 가다가 버리지.”
나는 습관처럼 손에 든 쓰레기봉투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조수석 문을 닫고 재빨리 나가 버렸다.
쿵-
문이 닫힌다.
* * *
후두둑- 후두둑-
언제부터일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창을 타고 창살처럼 흘러내리는 빗줄기.
축축한 유리 위로 뿌옇게 번지는 네온사인.
“…….”
유다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텅 빈 조수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마동왕이라는 남자.
어째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훅 들어오는 돌발성.
뚝뚝 끊어지는 단답형 말투.
싸가지가 없어 보일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태도.
...
하지만.
어쩐지 기묘한 감정이 고개를 드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 봐 온 남자들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비굴하고, 얍삽하고, 눈치 보고, 여자의 몸에만 굶주려 있고.
언제나 자신에게 잘 보이려 비위를 맞추고 실없게 웃는다.
어쩌다 눈을 보면 시선은 언제나 자신의 가슴이나 다리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는 마치 속마음을 들켰다는 듯 후다닥 눈알을 굴린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눈으로 눈을 바라본다.
하지만 단순히 눈만 마주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깊은 내면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행동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더욱 더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자기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더 먼 곳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리는 남자.
그런 남자를 유다희는 오늘 처음 보았다.
신선한 느낌이다.
그리고.
“…….”
그녀는 시선을 살그머니 돌려 재떨이를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비워진 재떨이.
꽁초와 가래침, 커피 찌꺼기, 말라붙은 맥주, 사용한 치실이나 씹던 껌, 코딱지들이 엉겨 붙어 검고 끈적했던.
유다희는 그런 재떨이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재떨이.
마세리티 팬들럼의 럭셔리한 재떨이 겉면 디자인과 달리, 그 안은 실로 더럽고 추악하기 그지없다.
그래서 유다희는 재떨이를 열어 남에게 보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꼭 자신의 내면을 보여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동왕.
저 사람은 예고도 없이 불쑥 재떨이를 열어젖히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것을 비워 냈다.
“…….”
유다희는 핸들에 가만히 머리를 댔다.
그러고 보니, 고인물에 대한 속생각.
속에서 부글부글 끓다 못해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 감정을 처음으로 토해 드러내 보인 이도 그였다.
[뒤]
라는 한 글자로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났고, 자신의 깊은 곳의 더러움을 ‘보고’ ‘듣고’ ‘치워 준’ ‘치워 줄’ 남자.
“…….”
유다희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다만.
봉긋한 왼쪽 가슴을 손으로 한번 꾹 눌러 보았을 뿐이다.
“뭐야, 술도 안 마셨는데 심장이 왜 이렇게…”
비 오는 밤.
차 안.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두두두두두두두-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조금은 낯선 소리 하나가 끼어들고 있었다.
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