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95화 (95/1,000)

95화 고인물 VS 마동왕 (1)

리그가 끝난 지 며칠이 흘렀다.

팀 엘리트즈를 이기고 올라간 국K-1은 별다른 이상 없이 경합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물 오른 마태강, 첫 승부에서의 부진에 이를 악물은 임요셉.

그 둘을 당해낼 팀은 서울 내에 없었다.

당당히 서울 대표 자격을 따게 된 국K-1은 막대한 스폰서들의 추가 유치에 힘입어 그 기세로 10도 리그의 서울 대표로 출전하게 되었다.

…….

그리고.

나는 토토로 ‘첫 리그에서만’ 49배의 엄청난 배당을 거머쥐게 되었다.

자기 자신에게는 판을 걸 수 없어서 본명으로 건 베팅.

어차피 마동왕은 엄재영의 신원보증으로 만들어 낸 가공의 인물이 아닌가?

내가 실명을 까고 배당금을 찾는 것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맨 처음 걸었던 돈은 현금 10억 남짓.

그리고 세금을 깔끔하게 떼고 난 뒤 내게 돌아온 돈은…….

*       *       *

촤악-

물살을 가르는 매끄러운 몸.

떡 벌어진 어깨, 배에 선명한 8팩, 군살 하나 없는 팔다리.

나는 물안경을 벗으며 수면 위로 올라왔다.

“푸하!”

수영장 트랙을 20번쯤 왔다갔다 해도 지치지 않는다.

체력 관리를 꾸준히 하는 보람이 있었다.

전생에 가느다란 팔다리, 축 늘어진 뱃살로 대표되던 몸매일 때에는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었는데… 참 감개무량한 변화다.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서 몸이 좋아진 것도 있지만, 무려 15살이나 어려진 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

나는 샤워실로 가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아직도 주름 하나 없는 이 얼굴이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촤악-

나는 탈의실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오피스텔 로비로 나왔다.

이곳 수영장은 내가 이사 온 오피스텔에 딸린 수영장.

그 외에도 헬스장 등 편의시설들이 입주민에게는 항상 무료로 개방되어 있다.

쪼르륵-

나는 수영장 입구 앞 카페에 들어가 무료로 제공되는 커피와 토스트를 받아 테이블 앞에 올려두었다.

그리고는 영어신문을 한 장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음, 오. 미국 증권가가 시끄럽군. WSJ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나는 신문을 보며 연신 혀를 끌끌 찼다.

그때.

“Hey.”

옆자리에 앉은 금발 미녀가 나를 향해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You're holding it upside down.”

*       *       *

부우웅-

포르쉐 크로커다일이 묵직한 엔진음을 내뱉는다.

나는 차를 몰아 밤거리로 나왔다.

원래라면 레이드를 돌 시간이지만, 오늘은 특별히 밤에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캡슐방 부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돈을 벌 때도 됐다.”

지금까지 내가 한 것은 어디까지나 쌈짓돈을 만지작거렸던 것.

진짜는 지금부터다.

종자돈이 넉넉하게 마련되었으니 본격적으로 머리에 그려 둔 사업 계획을 현실에 옮길 때가 된 것이다.

크르릉-

차를 몰고 좁은 거리로 진입하자.

“와, 오늘 무슨 날인가?”

사람들이 거리에 바글바글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금요일 저녁이구나.’

밤거리가 한창 핫할 때다.

밤을 걷어 버릴 듯 찬란한 네온사인들 아래로 젊은 남녀들이 무수히 오간다.

벌써부터 술에 취해 간판 밑에 주저앉은 사람들.

이제 막 흥이 오른다는 듯 N차를 달리는 사람들.

쉴 새 없이 아스팔트 위로 흩뿌려지는 전단지, 명함.

곳곳에서 들려오는 잔 부딪치는 소리, 토하는 소리, 웃음, 고함, 호객행위들…….

“…신기하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밤거리의 그 모든 것들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15년 전, 게임 폐인이었을 때는 아예 접해 보지도 못한 세상이었다.

그때.

차를 천천히 몰고 있는 내 앞으로 뭔가가 보였다.

머리를 요란하게 염색한 여자 몇몇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빠! 같이 놀아요!”

“차 예쁘다! 우리 드라이브 하고 싶은데!”

전생이었다면 감히 말도 붙여보지 못했을 미녀들이었다.

위이잉-

나는 차 창문을 내렸다.

“이거 택시 아니에요.”

순수한 의미에서, 그냥 알려 주려고 한 말이다.

“뭐야 재수 없어.”

그녀들은 내 차 앞 도로에 침을 탁 뱉고는 쌩 가 버렸다.

“참, 세상 요지경일세.”

나는 고개를 들어 거리를 쭉 바라본다.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부축한다.

젊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향해 웃는다.

그 복작복작하고 화려한 거리에 어쩐지 내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그때 깨달았다.

‘아, 나는 이런 게 체질에 좀 안 맞는구나.’

나이를 속으로만 먹어서 그런 걸까?

부릉-

나는 미련 없이 페달을 밟아 캡슐방 부지로 향했다.

역시 나는 끝없이 위로 질주하는 게 좋다.

싸우고 부딪쳐서 성과를 만들어 내는 그 일련의 레이스, 그때만이 살아있다는 감각이 느껴진다.

이런 거리는 결국 공허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

절대 젊은 놈들 기에 눌려서 도망가는 게 아님.

아무튼 아님.

부웅-

내가 막 페달을 밟아 거리를 빠져나오고 있을 때.

“…어?”

나는 순간 차를 멈췄다.

빵-

뒤에서 클락션이 한번 울렸지만 욕은 반쯤 들려오다가 말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거리 정면을 바라보았다.

엄청난 미녀 하나가 뒤에 남자들을 줄줄 몰고 다니고 있는 게 보인다.

조막만 한 얼굴에 큰 눈, 오똑한 코, 오밀조밀한 입술이 다 들어있다.

몸매는 또 어떤가?

게임에서 만났던 서큐버스 급 몸매가 그대로 현실에 재현되었다.

그녀는 도도한 걸음걸이로 거리를 지나갔고 클럽의 대기줄에 서 있던 남자들은 홀린 표정으로 우르르 몰려든다.

유다희!

거리의 여왕벌이 등장했다!

문득.

나는 얼마 전에 마동왕의 계정으로 받은 SNS 메시지가 떠올랐다.

[부탁이 있어요.]

유다희가 보내왔던 페이크북 메시지.

‘아 참, 그러고 보니 답장한다는 것을 깜빡했다.’

나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는 그녀에게 SNS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       *       *

한편.

유다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상태였다.

“아, 술방 한번 하기 더럽게 힘드네.”

그녀는 오늘 개인방송을 위해 술집을 찾았다.

주량 인증을 하는 콘텐츠를 내보낼 생각으로 단골 칵테일 바를 찾았는데 하필 오늘이 불금일 줄이야.

그녀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눈앞에는 눈이 반쯤 풀린 남자 하나가 실실 웃고 있다.

“오빠 이번에 차 새로 뽑았는데. 드라이브 안 할래?”

묘하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있는 이 남자.

유다희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카라를 올려 가슴골을 가렸다.

“너 차 뭔데?”

유다희가 묻자, 남자는 대답 대신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리모콘 키를 삑 눌렀다.

가로등과 음식물 쓰레기 더미 옆에 세워진 밴츠 C클래스가 눈에서 번쩍 빛을 뿜는다.

그러자.

삑-

유다희 역시 주머니에서 리모콘 키를 꺼내 눌렀다.

크르릉-

보도블럭 옆에 세워진 마세리티 팬들럼이 묵직한 숨소리를 토해냈다.

“…….”

남자는 자동차 키를 손에 든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지금껏 유다희를 졸졸 따라오던 남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켜라, 누나 피곤하다.”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유다희가 신물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남자들은 조용히 물러나 길을 텄다.

차에 타기 직전, 유다희는 고개를 들어 거리를 쭉 바라보았다.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부축한다.

젊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향해 웃는다.

그 복작복작하고 화려한 거리에 어쩐지 그녀의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그때 유다희는 깨달았다.

‘아, 나는 이런 게 체질에 좀 안 맞는구나.’

반년 전 스무 살 때 클럽에 처음 가보고 메스꺼움을 느낀 뒤부터는 일체 밤거리에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는 게임 속에서 몬스터와 유혈이 낭자한 레이드를 치루는 것이 더 좋았으니까.

“대체 이 밤거리에서 무슨 시간 낭비들을 하고 있는지...”

이럴 시간에 던전 한 번을 더 돌겠다.

‘아무래도 술방은 집에서 혼자 해야겠네.’

차라리 단골 바 보다는 편의점에 들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유다희가 막 차를 타고 거리를 떠나려 할 때.

-띠링!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

유다희는 핸드폰을 돌아보았다.

SNS를 통한 알림이 하도 많이 와서 대부분 알림을 꺼 둔 상태.

하지만 유일하게 알림 소리가 나도록 설정해 둔 것이 몇 개 있기는 있다.

순간.

“……!”

유다희의 두 눈이 커졌다.

[ㅇㅇ]

페이크북 메시지 답장이 왔다.

상대는 얼마 전 연락을 시도했던 마동왕!

그녀는 핸들을 잡은 손을 놓고 바로 차 시동을 껐다.

SNS를 켜자, 얼마 전 자신이 보냈던 메시지 내용이 떴다.

[유다희: 암흑랭킹 대세!! 마동왕님~~♥♥♥] -오후 9:42 읽음√

[유다희: 올리시는 방송 언제나 잘 보고 있어요오♥^ᗨ^♥] -오후 9:42 읽음√

[유다희: 다름이 아니라 부탁이 하나 있어서 연락드렸는데요오... (;◔д◔)] -오후 9:43 읽음√

[유다희: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저희 길드를 위해 PK한번만 해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д←)ッ] -오후 9:45 읽음√

[유다희: 꼭 척살하고 싶은 상대가 하나 있어서 그러는데...(Ĭ ^ Ĭ) 대적할 수 있는 랭커가 마동왕님 하나 뿐인 것 같아서...(´▽`;)] -오후 9:48 읽음√

[유다희: 길드 차원에서 연락드리는 것이니 당연히 보수는 섭섭지 않게....◕‿◕✿] -오후 9:49 읽음√

.

.

‘고인 물’을 죽여 달라는 사주.

이 메시지를 보낼 때만 해도 마동왕은 불법 지하리그에서 유명한 존재였다.

하지만 양지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후, 정식 프로 선수가 된 이상 암살의뢰 따위는 받지 않을 것 같아서 지레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동왕: ㅇㅇ]

전혀 뜻밖의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유다희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는 혀를 빼물고 메시지를 한자 한자 정성스럽게 입력하기 시작했다.

[유다희: 꺄아 ♥◟(ˊᗨˋ)◞♥ 부탁을 들어주신다니 넘모 기뻐요오 (✿> д<)ッ 그럼 어디서 만나 접선하면 될까요오!?]

유다희는 잔뜩 흥분한 상태로 답장을 기다렸다.

어차피 온라인에서 주고받는 것이니 채팅으로 의뢰를 진행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기록이 남는 것은 껄끄러우니 구두로 진행하는 것이 낫다.

그런 유다희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밖]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밖? 야, 밖 어디! 밖이 다 너네 집이냐? 사람 밖치게 만드네 진짜.”

유다희는 투덜거리며 핸드폰 타자를 쳤다.

[좋아요오오오♥!! 그럼 언제 뵐까요๑•ิܫ•ั๑?]

유다희가 묻자.

[지금]

또다시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이 새끼가 돌았나. 성격 급해 가지고는… 젊어 보이던데 말도 짧고… 하여간 게임 잘하는 놈들은 죄다 싸가지가…….”

유다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녀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문 뒤 짜증스럽게 투덜거린다.

[저는 지금도 좋아요♪◝(・ω・)◟♬ 마침 밖에 나와 있던 참이거든요♥♥ㅎㅎㅎ어디로 가면 될까요!?]

그러자.

또다시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뒤]

-작가의 말-

유다희: 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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