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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94화 (94/1,000)
  • 94화 올킬(Allkill) (4)

    업 센터(Up center).

    쉽게 말해 안쪽 중앙.

    무대에서 가장 위엄 있는 공간으로 주로 어떠한 선언이나 판결 등이 내려지는 장소.

    나는 여기에 올라와 앉았다.

    지잉-

    캡슐에 앉자 헬멧이 천천히 내려온다.

    나는 여유로운 기색으로 다이브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무대 위에 넘실거리는 드라이아이스 증기 너머를 바라보았다.

    오늘 나는 감히 선언하려 한다.

    내 시대의 개막을!

    …….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싸했다.

    ‘누구임?’

    다들 이런 표정들이다.

    관성 때문에 일단 환호성은 지르지만… 나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다들 뚱한 표정.

    하지만 나는 자신 있다.

    불과 몇 분 만에 저 어색함을 뜨거운 열광으로 바꿔 놓을 자신이.

    *       *       *

    쿵-

    나는 무통증 협곡의 바위 위로 떨어져 내렸다.

    고인물 때와 비슷한 아이템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몸 위에 HP를 올려주는 옵션이 붙은 망토 등을 둘렀기에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건너편 바위 위에는 긴 머리를 휘날리고 있는 여자 하나가 보인다.

    이은비.

    꽤 고클래스의 마법사이다.

    손에 들려있는 무기인 ‘마도서’는 여러 가지 특성을 한 아이템에 기록해 놓은 것.

    마법 스킬과 큰 차이가 없는 개념이다.

    이은비의 마도서는 4클래스짜리.

    현 마법사 랭킹 1위가 5클래스임을 감안하면 그리 대단하게 높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4클래스 범위 안의 마법들을 거의 통달하다시피 한 상태.

    그 숙련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니 조심해야 한다.

    “…….”

    이은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본다.

    어쩐지 불쾌하다는 듯한 시선이다.

    “왠지 기분 나빠. 우리 어디서 마주친 적 있던가?”

    너무 흔한 작업 멘트로군.

    나는 도도한 남자이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자, 이은비는 상관없다는 듯 마법을 캐스팅했다.

    촤아악-

    하얀 끈끈이와 식인식물의 씨앗들이 뒤섞여 퍼진다.

    광활한 황무지가 또다시 기분 나쁜 물질들로 뒤덮였다.

    하지만.

    철퍼덕- 철퍽-

    나는 쏟아지는 오염물질을 전혀 피하지 않았다.

    엄청난 양의 필드 트랩을 그대로 몸으로 맞는 나.

    “……?”

    이은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안 피하지?

    “이걸 그냥 맞는다고? 이해가 안 되네. 그럼 잘 가.”

    이은비는 다시 한 번 마법을 캐스팅했다.

    츠츠츠츠츠-

    시퍼런 뇌전이 그녀의 손에서 불타오른다.

    전 판에 이연호의 ‘라이트닝 볼트’를 압살했던 공격마법 특성 ‘락 다운 쇼크(Lockdown shock)’다.

    상대를 둥근 전류 감옥에 가둬 버린 뒤 강력한 지속 데미지와 상태이상 마비를 거는 기술.

    이 마법은 상대가 있는 곳의 좌푯값을 정확히 계산해 걸지 않으면 무조건 빗나간다.

    때문에 아주 신중하게 써야 하는 기술이었다.

    이은비는 훗날 행정고시를 한 큐에 패스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여자.

    하물며 지금 나처럼 움직이지 않는 대상이 상대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부지지지직!

    이내, 내 몸을 시퍼런 벼락 줄기들이 구처럼 둘러쌌다.

    후두두둑-

    꼴랑 390밖에 안 되는 HP인지라 급속도로 바닥을 보인다.

    하지만.

    나에게는 샌드웜을 죽이고 빼앗은 ‘앙버팀’ 특성이 있다.

    HP 1.

    나는 또 살아남았다.

    그리고.

    꿈틀- 꿈틀- 꿈틀-

    바실리스크의 심장이 거세게 약동한다.

    왼쪽 가슴에서부터 시작된 시커먼 핏줄이 내 전신을 감쌌다.

    동시에.

    퍼퍼퍼퍼펑!

    락 다운의 반사 데미지가 벼락처럼 뻗어나가 이은비를 향했다.

    “헉!?”

    그녀는 당황했다.

    기존의 계획대로 필드만 오염시키고 빠져나갔어야 했다.

    콰쾅!

    이은비는 자기가 쏜 마법 데미지에 휘말려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찌릿- 찌릿- 찌릿-

    마법사 특유의 빈약한 HP가 급격히 줄어든다.

    동시에, 이은비는 상태이상 ‘마비’에 걸려 움직일 수 없게끔 되었다.

    마비에 걸릴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기우뚱-

    이은비는 당황하는 표정 그대로 자기가 서 있던 바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밑에는 내가 있다.

    쫘악-

    나는 손바닥을 들어 떨어져 내리는 이은비의 머리통을 그대로 후려쳤다.

    파삭-

    묵직한 지진파가 담긴 손바닥, 사람 두개골 하나를 박살내는 것쯤은 쉽다.

    골통이 부서지며 뻘건 안개가 피어오른다.

    허공에 무지개가 걸렸다.

    <‘피카레스크 마스크’가 붉게 물듭니다.>

    <‘연쇄살인’ +1스텍이 추가됩니다>

    그 와중에 패시브 공격력이 1 상승했다.

    고인물 때와 비슷한 공격이었지만 아이템이 특성을 발현하는 것은 품이 두꺼운 망토와 로브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또 워낙에 순식간에 이루어진 딜 교환이라서 판독 카메라로도 리플레이가 불가능할 정도다.

    “잡히면 뚝배기 깹니다. 참고로 뚝배기=머리입니다.”

    다소 철 지난 유행어.

    나는 고개를 들어 엘리트즈 팀원들을 쳐다보았다.

    부들부들……

    맏언니인 이금비는 동생의 죽음에 격분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언니를 만류하며 나온 상대는 막내인 이동비였다.

    “상대는 HP 1이야. 괜히 접근해서 싸울 것 없잖아? 내가 원딜로 끝낼게.”

    과연 장래의 외무고시 합격생답다.

    그녀는 놀라운 교섭능력으로 맏언니를 진정시킨 뒤 앞으로 나섰다.

    까락-

    그녀는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나를 조준했다.

    하지만. 그렇게 둘 내가 아니다.

    쾅!

    나는 발을 굴렀다.

    꾸르르륵-

    ‘불걸음’ 특성이 개화되었다.

    대지는 온통 불길에 뒤덮여 녹아내린다.

    용암의 늪!

    그렇다. 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용암의 호수가 생겨났다.

    콱- 콰긱-

    나는 왼손과 오른손을 들어 용암으로 변해 버린 대지에 가져다 냈다.

    꿀렁- 꿀렁- 꿀렁-

    내 오른손의 지진이 땅을 파헤쳐 용암의 파도를 일으켰고 내 왼손의 와류가 그것을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바닥에 깔려 있던 끈끈이, 식물 씨앗, 마름쇠 등은 죄다 용암 뻘에 삼켜져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으아아아앗!?”

    활을 들고 있던 이동비는 난데없는 현상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바위는 어느새 용암 호수로 가라앉아 버렸다.

    철썩-

    이윽고 밀려온 뜨거운 파도가 이동비를 휩쓸었다.

    그녀는 그대로 와류에 실려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리고 천천히, 와류 중심부에 도사리고 있는 나에게로 끌려왔다.

    턱-

    이동비는 곧 내게 멱살을 내주게 되었다.

    그리고.

    파삭-

    나는 끌려온 이동비의 머리통을 그대로 밟아 으깨 버렸다.

    <‘피카레스크 마스크’가 붉게 물듭니다.>

    <연쇄살인 리스트에 1명이 추가 기록되었습니다>

    <기본 공격력이 +1 상승합니다>

    “네 다음 뚝배기.”

    너무도 쉽게, 또 꽁승을 가져간다.

    피카레스크 마스크 역시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한편.

    그 광경을 본 이금비는 격분했다.

    “이 새끼!”

    그녀는 바톤 터치를 할 시간도 없이 몰살당한 두 동생의 원한을 갚기 위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차앙! 스릉-

    쌍검을 빼든 그녀는 놀라운 스피드로 용암의 바다 위로 솟은 암초들을 건너뛴다.

    하지만.

    촤악-

    나는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만 발로 바닥의 용암 뻘을 걷어차 탄알처럼 쏘아낼 뿐이다.

    철썩-

    허공으로 뛰어올랐다가 용암탄에 맞은 이금비는 이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물총고기가 쏜 물줄기에 맞은 파리처럼.

    그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용암 뻘 속으로 파묻힌다.

    “제기랄!”

    이금비는 얼굴을 태우는 용암을 마른세수로 걷어냈다.

    “어디냐!”

    기왕 떨어진 것 접근전으로 확실하게 승부를 낼 생각이다.

    그녀는 용암의 소용돌이 중앙에 있는 나를 향해 번개같이 쌍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당신 공략이라면 지겹게 봤어.’

    나는 이금비가 프로리그에서 경기하는 것을 수없이 많이 봤다.

    대부분의 경우 그녀는 이겼지만, 질 경우도 꽤 있었다.

    그리고 지는 경우에는 대부분 패인이 똑같았다.

    메인 공격 패턴인 X자 가르기.

    전에 투신을 비롯한 모든 선수들의 목을 잘라 갔던 끝내기 기술.

    바로 이 기술의 치명적인 단점 때문이다.

    말이 X자 가르기지 사실 두 개의 검이 동시에 그어질 수 없다는 것.

    그것이 문제다.

    X자 모양의 참격이 뻗어나간다지만, 잘 보면 그것은 /와 \의 조합이다.

    두 개의 검은 결코 같은 시간대에 한 좌표를 지날 수 없다.

    그랬다간 부딪치기 때문이다.

    오른손과 왼손이 동시에 움직이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 오른손이 먼저 지나가고 난 다음에 왼손이 지나간다.

    설명이 장황했지만, 파훼법은 간단했다.

    몸을 좌로 한번, 우로 한번 리드미컬하게 흔들어 주는 것이다.

    스팟-

    나는 눈 깜빡할 사이 몸을 두 번 흔들었다.

    “……!”

    이금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마도 그녀의 눈에는 X자 모양의 참격이 내 몸을 그냥 관통해서 지나간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마치 형체가 없는 유령을 공격한 것 마냥.

    쩌적-

    나는 HP 1의 상태로도 거침없이 움직였다.

    큰 공격을 해서 빈틈이 생긴 이금비를 향해 지진을 때려 박는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임요셉을 죽였을 때처럼 계속해서 말이다.

    꼬르륵…….

    이금비는 내 지진파에 눌려 용암 속에 담겨지고 말았다.

    그녀는 결국 영원히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피카레스크 마스크’가 붉게 물듭니다.>

    <‘연쇄살인’ +1스텍이 추가됩니다>

    “네 다 뚝.”

    ‘네, 다음 뚝배기’의 줄임말.

    내가 고개를 들자.

    “…….”

    나를 내려다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몽크 녀석이 보인다.

    이근형.

    녀석은 이내 단단한 갑옷, 높은 HP, 짤막한 곤봉을 들고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온다.

    임요셉의 하위호환.

    매우 매우 하위호환.

    방어력이랑 HP만 높은 거북이들은 나의 좋은 먹잇감일 수밖에 없다.

    마치 거북이를 밟고 점프하는 마리오처럼, 나는 이근형을 발로 밟아 죽여 버렸다.

    “네 다음 뚝...”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아, 다 죽여 버렸지.

    아직 얼마든지 더 날뛸 수 있지만, 아쉽게도 이제는 더 싸울 상대가 없다.

    역올킬(逆Allkill)!

    투신이 홍지노를 3연뻥으로 잡았기에 사실 올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금은동 3자매에 의해 궤멸 직전까지 몰렸던 ‘국K-1’의 멱살을 잡고 여기까지 캐리(Carry)해 왔다.

    심지어 초반에 이은비의 마법 공격을 일부러 허용한 뒤로 단 1의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

    퍼펙트 게임(Perfect Game)!

    홍지노가 투신에게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 완벽한 역올킬이 떴을 것이다!

    푸슉-

    게임을 종료한 뒤 캡슐을 벗자.

    저 멀리 엘리트즈의 감독이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옆에서는 엄재영이 붉은 카펫을 들고 부산을 떨고 있었다.

    탁-

    나는 헬맷을 내려놓고 무대 중앙에 섰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꾸벅 인사했다.

    특별한 소감은 밝히지 않았다.

    한데?

    내가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주변은 조용하다.

    환호성도 휘파람 소리도 전혀 들려오지 않는다.

    ‘…어라?’

    나는 살짝 당황했다. 왜 다들 이렇게 반응이 없지?

    나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스포트라이트가 너무 눈부셔서 관객석 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소리로 반응을 좀 보려고 했는데…….

    ‘너무 놀라서 소리도 못 지르나?’

    그것은 아닐 것이고.

    ‘설마 여기 모인 이들이 전부 금은동 자매의 팬이라서?’

    그것도 아닐 것인데.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무대 옆에서 엄재영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

    한데 그 역시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저 금붕어처럼 입만 크게 뻐끔거리며 손을 파닥댈 뿐이다.

    이내, 엄재영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귀를 마구 가리켰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캡슐에 들어가기 전에 쓰고 있던 헤드셋을 아직 안 벗었구나.

    나는 손을 들어 헤드셋의 한쪽 이어패드를 뒤에서 뗐다.

    땀에 절은 두툼한 패드가 쩍- 소리를 내며 귀에서 떨어지는 순간.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어마어마한 굉음이 내 귀를 찢어놓을 듯 밀려들기 시작했다.

    내 인생 최대의 소리.

    스타디움 천장이 날아가 버릴 정도의 환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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