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93화 (93/1,000)
  • 93화 올킬(Allkill) (3)

    나는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경기장 내부의 화약 냄새, 먼지 냄새, 땀 냄새, 목재 접착제 냄새, 락스 냄새...

    그 모든 것들이 내 폐를 한껏 부풀게 만들었다.

    이제 잠시 뒤면 이 모든 것들이 다 내 것이 되리라.

    그리고.

    “...역시나.”

    앞으로의 경기는 전부 내가 알고 있는 미래 지식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투신 마태강.

    그는 곧바로 2라운드에서도 전투를 이어나갔다.

    규칙 상 PVP리그에서는 포션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단 포션을 회복용이 아닌 공격용, 혹은 자신이나 아군이 아닌 적에게 사용할 때는 예외)

    마태강은 얼마 남지 않은 HP로 다음 상대를 맞이했다.

    그 상대는 한국 랭킹 11위 이근형.

    템트리는 성기사 메타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자유도가 높아서 직업 선택의 기회 또한 무궁무진하다.

    대부분 클래스는 사냥한 몬스터의 ‘호칭’과 ‘아이템’으로 정해지지만, 아직 A급 이상의 몬스터를 사냥해 본 적이 없는 이들은 호칭의 존재를 모를 것이기에 여기까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뭐, 아무튼.

    이근형은 두터운 흰색 갑주와 짤막한 곤봉을 들고 전장으로 나섰다.

    전형적인 몽크(monk) 캐릭터다.

    자기 자신에게 힐 마법을 쓸 수 있는 특성과 높은 HP, 단단한 방어력으로 무장하고 있는 캐릭터.

    그래서일까? 이근형의 별명은 ‘신박’이다.

    ‘신박하다’ 할 때의 ‘신박’이 원래는 온라인 게임에서 만들어진 어휘라는 것은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

    그것은 원래 ‘바퀴벌레처럼 죽지 않는 성기사’를 가리킬 때 쓰던 말이다.

    그 말마따나, 이근형은 절대로 죽지 않는 끈질김을 보유하고 있는 신박한 랭커였다.

    “드루와, 드루와 이 짜샤!”

    이근형은 눈앞에 있는 마태강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도발했다.

    “…….”

    마태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근형을 바라본다.

    마치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어디부터 썰어 볼까 하는 듯한 태도.

    이내.

    맹수는 먹잇감을 한 입 베어 물기로 결정했다.

    쾅!

    마태강은 적의 도발에 기꺼이 넘어가 주었다.

    관통 데미지를 입히는 한 방 기술이 이근형의 가슴팍을 때린다.

    그러나.

    터엉-

    이근형은 방패와 갑옷으로 이중 방어를 시도함과 동시에 곤봉을 휘둘러 자신에게 힐 마법을 걸었다.

    샤랄라라-

    곤봉에서 빛나는 가루가 뿌려져 이근형의 HP를 대폭 회복시킨다.

    “거 참, 흉악한 요술봉이로군.”

    마태강은 짜증스럽게 혀를 한번 찼다.

    반동 데미지 때문에 HP가 또 닳아 버렸다.

    상대방은 회복 메타를 쓰니 무조건 반동기를 쓸 수만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잡 공격만 하다가는 데미지를 줄 수가 없고...’

    큰 기술도, 작은 기술도 쓰기가 뭣하다.

    게다가 상대는 힐러에 올인한 캐릭터도 아니다.

    몽크가 들고 있는 한손 둔기는 맞았을 경우 꽤 아프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마태강이 고민하고 있을 때.

    “……!”

    순간 마태강의 눈이 흔들렸다.

    무대로 올라가기 전, 마동왕이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기고 싶다면 상대가 힐을 쓴 직후 0.1초 안에 밀어내기 기술을 써.’

    그는 왜 자신에게 그런 충고를 했을까?

    샤랄라라-

    고개를 들자, 또다시 자신에게 힐 마법을 걸고 있는 이근형이 보인다.

    힐과 방패 뒤에 숨어서 짓는 저 얄미운 미소라니.

    “드루와 드루와, 자신있으면 드루와~”

    이근형은 곤봉을 흔들며 마태강을 도발한다.

    마태강의 HP는 얼마 없다. 반동기를 두 번 정도밖에는 더 쓸 수 없는 상태.

    ‘좋아. 믿어 보자.’

    그는 마동왕의 충고를 가슴에 새긴 채 앞으로 크게 한 발 내딛었다.

    퍼-엉!

    각반에 붙어 있는 넉백 특성이 발동된다.

    마태강은 별다른 데미지를 주지 못할 걸 알면서도 이근형의 방패를 걷어차 멀리 날려 버렸다.

    …한데?

    이변이 일어났다!

    “오-오오오오오오!?”

    관중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샤랄라라-

    이근형이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힐 마법은 원래 그가 서 있었던 곳에 그대로 시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근형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마태강의 HP가 힐 마법에 의해서 회복된다.

    ‘…아하!’

    마태강은 정수리에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힐러가 자힐을 할 때, 그것은 무조건 자신에게 들어오는 게 아니다.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을 계산한 뒤 힐이 미치는 범위를 연산해 구현하는 것.

    그리고 그 힐 마법이 구현되기까지는 약 0.1초 정도의 딜레이가 발생한다.

    그 찰나의 순간.

    힐 마법의 주체인 힐러를 멀리 날려 버리고 힐이 구현되는 공간 안에 끼어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 효과를 대신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

    멀리 나가떨어진 이근형은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든다.

    샤라라라-

    또다시, 이근형의 머리 위로 힐 가루가 쏟아졌다.

    번쩍-

    마태강의 눈빛이 폭사되었다.

    뻐엉!

    마태강은 또다시 이근형을 걷어차 옆으로 날려 버렸다.

    그리고 그 힐을 대신 받았다.

    HP가 또다시 차오른다.

    “우와아아아아! 성바퀴를 저렇게 잡네! 진짜 신박하다!”

    “와 대박! 넉백 특성인가 저게?”

    “저 특성 되게 흔하잖아? 저게 힐러 잡기 딱이네! 나도 구해서 써야지!”

    “에이, 밀어내기 특성은 근데 그 외 다른 데서 쓸 데가 없어. 그리고 힐 마법이 터지는 타이밍을 일반인이 어떻게 맞춤?”

    “저건 투신이니까 되는 거다 진짜...”

    관중들은 투신의 플레이에 열광한다.

    이근형은 쩔쩔매던 끝에 결국 바톤 터치를 선언했다.

    “제, 젠장! 그만 드루와! 저리가! 교체! 교체!”

    HP가 빨간 바닥을 드러낸 이근형은 이내 허둥지둥 뒤로 물러나 도망쳤다.

    그리고.

    드디어 최종 보스가 출동한다.

    금은동 자매!

    최강의 연계 합격술을 자랑하는 엘리트즈의 비밀병기가 ‘무통증 협곡’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투신이 무대에 오르기 전, 나는 그에게 이근형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힐러의 힐을 봉인하는 법.

    PVP는 물론 몬스터에게도 통하는 방법이다.

    천재적인 재능과 눈썰미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

    이 공략의 발견은 힐러라고 해서 손이 느리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준 좋은 사례였다.

    ‘원래는 우연히 발생하는 현상을 투신이 운 좋게 캐치하는 것이지만…….’

    그렇다.

    원래대로라면 투신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영문도 모르고 이근형을 이긴다.

    무작정 접근전을 벌이며 난투를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HP가 회복되는 현상을 겪게 되고, 나중에 PVP동영상을 돌려 보던 차에 그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다.

    어차피 ‘우연히’, ‘알아서’ 발견하게 될 공략이기에 내가 선수 쳐서 생색 좀 냈다.

    한편.

    내가 마태강에게 충고하던 것을 같이 들었던 엄재영, 그는 입을 딱 벌린 채 나를 돌아본다.

    “너 진짜 신인 맞냐?”

    “에이, PVP는 신인 아니죠.”

    “아니, 랭커들이랑도 붙어 본 적 있어?”

    “한 번도 진 적 없어요.”

    “……?”

    다소 문맥이 맞지 않는 내 대답을 엄재영은 잘도 알아들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대화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엘리트즈의 멤버 홍지노가 패배한 직후, 기대주였던 이근형 역시 바통 터치로 도망쳐 겨우 살아남았다.

    시작이 별로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턱-

    이내, 세 번째 멤버가 전장으로 출두했다.

    바로 이은비였다.

    그녀는 투신의 공격성을 보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으레 방어력이 약한 마법사라면 투신 같은 근접 딜러를 조금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지만…….

    “씨앗 범벅(Seed hash-up).”

    이은비는 그저 침착하게 마법 특성을 발현할 뿐이다.

    이윽고.

    수없이 많은 식물의 포자가 허공에 나부낀다.

    쏘옥- 쏙-

    황량한 돌밭에 식물들이 고개를 내밀며 피어나기 시작했다.

    “…….”

    마태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식물들은 흡혈식물들로 일단 밟기만 하면 체력을 빼앗는다.

    더욱 기분 나쁜 것은, 밟으면 밟을수록 빼앗기는 HP의 양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씨앗을 밟으면 최대 HP의 0.001%를 빼앗긴다. 2개째에는 0.002%, 3개째에는 0.003%…….

    그렇게 HP를 빼앗기는 것도 열 받지만, 그렇게 해서 성장한 식물은 또 날카로운 이빨로 공격해 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끈끈한 구덩이(Sticky pit).”

    이은비는 곧바로 다른 광역 특성을 뿌렸다.

    꿀렁- 꿀렁- 꿀렁-

    필드가 온통 허연 점액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이동 속도가 느려질 것 같은 마법이다.

    씨앗+끈끈이 조합.

    필드는 마치 바질 씨앗 음료수를 잔뜩 뿌려 놓은 것처럼 변했다.

    “이런 빌어먹을!”

    마태강은 재빨리 구덩이를 헤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교체.”

    이은비는 얄밉게도 필드만 오염시킨 채 바톤 터치를 한다.

    탁-

    다음으로 나온 이는 막내인 이동비였다.

    궁수인 그녀는 주머니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마름쇠와 압정들이었다.

    후두둑- 후두둑- 후두둑-

    이동비 역시 필드에 독 데미지를 주는 함정들을 잔뜩 깔아 뒀다.

    그런 뒤 활을 들어 마태강을 쏘기 시작했다.

    퍼퍼퍽!

    “크윽!”

    마태강은 화살비를 맞으며 이를 악물었다.

    범위가 제한된 상황에서의 1:1 원딜은 마법사보다 궁수가 압도적으로 강하다.

    거기에 HP를 흡수하는 씨앗과 끈끈이들 탓에 함부로 발을 움직일 수도 없다.

    독 압정과 마름쇠들 역시 쫙 깔려 있다.

    필드 전체가 순식간에 장악되었다.

    졸지에 살아 있는 샌드백 신세가 된 것이다.

    “두 명이랑 싸우는 것 같군.”

    마태강은 이를 뿌득 갈았다.

    그는 화살 세례에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탁- 퍼억-

    마태강은 천재적인 피지컬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거나 쳐낸다.

    이는 이동비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와아, 대단한 재능이네!”

    이동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마태강이 오염된 필드를 빠져나오는 즉시.

    “바톤 터치.”

    마지막 주자와 교체를 선언했다.

    턱-

    이내 마지막 주자가 지칠 대로 지친 마태강 앞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쌍검을 든 칼잡이.

    금은동 자매의 맏언니인 이금비였다.

    그리고 참고로.

    그녀의 별명은 ‘끝내기 퀸’이다!

    *       *       *

    “태강아! 빠져! 바톤 터치 해!”

    엄재영이 모니터를 보며 소리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엄재영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그냥 두는 게 나을 겁니다.”

    “뭐!? 왜!? 저러다 태강이 죽어!”

    “어차피 뭘 해도 죽어요.”

    “…….”

    “이왕 죽을 거면 원 없이 싸워 보기라도 해야죠.”

    “…….”

    “어차피 죽은 목숨인데 상대 HP를 조금이라도 깎아 놓으면 이득이고요. 보아하니 한 대 정도는 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확신에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내 말에 엄재영은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이윽고.

    내 말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뎅겅-

    이금비의 쾌검 2연참!

    X자로 휘둘러지는 쌍검에 맞은 마태강의 목이 몸통과 분리되었다.

    하지만!

    투신은 과연 투신!

    마태강은 그 가운데에서도 이금비의 복부에 묵직한 미들킥을 날리는 데에 성공했다.

    “큭! …끈질긴 놈.”

    이금비는 10% 가량 증발한 HP를 보며 혀를 찼다.

    그 와중에도 끝까지 딜을 박고 죽다니, 과연 대단한 집념과 컨트롤이다.

    *       *       *

    정규리그에 첫 데뷔한 금은동 자매의 연계 합격 전략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대부분 1:1 대전에 익숙해져 있던 선수들은 그녀들의 숱한 바톤터치 전략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송병건의 클로킹은 오염된 필드에서는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그는 이은비의 광역 마법에 데미지를 입다가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이연호는 이은비와의 1:1 마법 대결에서 패해 무릎을 꿇었다.

    지형 데미지 탓도 있지만, 이은비에 비해 마법 속성의 바리에이션이 적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임요셉은 끈끈이+흡혈식물+마름쇠의 밭에 빠져 화살과 마법에 난자당하다가 끝났다.

    버티기는 오래 버텼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마법사 이은비의 트리플 킬!

    그녀는 국K-1의 1군 로스터이자 현 한국 랭킹 탑 티어들인 임요셉, 이연호, 송병건을 연달아 잡아내면서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열광.

    토토 배율은 다시 엘리트즈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원래 역사에서 국K-1:엘리트즈=3:1 이었던 배율은 국K-1:엘리트즈=1:7까지 역전되었다.

    생각보다 판이 커졌다.

    ‘전설의 역배’라고 유명해졌던 이 판의 배율은 21배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무려 7*7! 49배!

    국K-1에 힐러 캐릭터가 없다는 변수가 상당히 크게 작용한 듯싶었다.

    49배면 토토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배율이다.

    물론 그중 7배짜리 역배를 먹기 위해 패색이 완연해 보이는 국K-1에 거는 사람은 없겠지만.

    …….

    아니.

    있다.

    적어도 여기 하나는 있단 말씀이지.

    펄럭-

    나는 팀 국K-1의 ‘NO. 1’ 뱃지가 달린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무대의 계단을 올라 업 센터(Up center)로 향했다.

    지금껏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부글부글-

    고인 물이 뜨겁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