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닳고닳은 뉴비-90화 (90/1,000)
  • 90화 랭커들의 황금시대 (3)

    나는 머쓱한 기분으로 청담동 ‘국K-1’ 연습실을 찾았다.

    오는 도중 경찰서에 들려서 자필로 된 반성문을 적고 오는 길이다.

    ‘다시는 알몸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지 않겠습니다.’

    게임에서 하도 벗고 다니다 보니까 집 밖으로 나갈 때 옷 입는 걸 깜빡했다.

    그 때문에 누가 변태가 나타났다고 신고를 한 모양.

    “거 참. 학교 다닐 때도 선생님한테 게임하고 현실 분간 못한다고 맨날 혼났었는데…….”

    알몸으로 다녔으되 차 안에만 있었던 점이 정상참작 되어 공연음란죄로 기소되는 것은 면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옷 입는 게 어색하네, 이제는.”

    지난 수년간 해 왔던 게 기저귀에 단도만 장비하고 던전을 누비던 것이니……. 겜창인 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어색한 몸짓으로 가면을 쓰고 음성변조기를 달았다.

    준비를 마친 뒤, 연습실의 문을 연다.

    끼긱-

    안에 들어오자 선수들의 열기가 훅 끼쳐 왔다.

    이번 도내리그에서 챌린저 타이틀을 달기 위한 이들의 열정이 느껴진다.

    만약 리그의 꽃인 팀 전에 출전하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질 수많은 듀얼토너먼트 등 개인전들이 많으니 한번 사활을 걸어 볼 만하다.

    ‘다들 열심히 하네.’

    나는 캡슐 앞에 부착되어 있는 모니터로 이들이 무얼 하고 있는지 지켜보았다.

    문득 감회가 새롭다.

    게임이 나온 지 이제 1년이 거의 다 되어 간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이때쯤 이 게임의 존재를 알고 완전 쌩 뉴비로 입문했었다.

    그리고 프로들은 이때쯤 벌써 이 게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다.

    탑 티어 급들은 벌써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머쥐었다.

    나와 그들 사이의 격차.

    초창기에 벌어진 그 1년의 격차는 15년 뒤에 어마어마한 거리로 드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다르다.

    나는 언제나 앞서 나가고 있던 프로게이머들, 그리고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곳에 올라 있던 탑 티어들을 멀찍이 따돌려 버릴 것이다.

    이번에는 내 차례다.

    오직 나만이 이 게임의 진짜 엔딩을 알고 있다.

    그러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바로 그때.

    내 상념을 깨며 불쑥 나타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쓰레기통이었다.

    “닦아 와.”

    이제 막 10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놈 하나가 나한테 쓰레기통을 내밀고 있었다.

    유니폼 가슴께에는 ‘방형근’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는 게 보인다.

    ‘……누구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내 기억 속에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앞으로 대성하지 못할 녀석이다.

    프로가 아니라 하다못해 개인 방송 BJ로도 전혀 뜨지 못할…그저 이 바닥을 스쳐 지나가는 수없이 많은 허수(虛數)들 중 하나.

    “…….”

    나는 말없이 쓰레기통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측은한 마음을 담아 물었다.

    “어디다 버리면 돼?”

    그러자. 곳곳에서 헛바람 집어삼키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방형근은 여전히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 요오즘 3군 신입들은 2군 선배한테 반말 찍찍 하는 싸가지에, 위생 개념도 없고……. 하, 나 이거 진짜. 쓰레기 어디다 버리는지도 선배가 일일이 알려줘야 돼? 으응?”

    녀석은 답답하다는 듯 나를 갈구기 시작했다.

    뭐지 이거? 지금 군기 잡는 건가?

    바로 그때.

    삐걱-

    1군 숙소와 연결된 통로의 문이 열렸다.

    “……!”

    현 한국 랭킹 1위이자 팀 내 랭킹 1위인 임요셉.

    그는 연습실로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는 움찔한다.

    나한테 끔찍하게 당했던 것이 떠오른 모양.

    한편.

    방형근은 그런 임요셉을 보고는 반색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나.

    임요셉은 방형근을 무시한 채 스쳐 지난다.

    그리고 내 앞으로 다가와…….

    “오셨습니까.”

    꾸벅 목례를 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임요셉. 그는 강자에 대한 예의는 투철한 사람이다.

    저번 4:1 PVP로 인해 그는 깨달은 듯싶다.

    나는 동시대의 프로들과 격이 다르다는 것을.

    “명찰 나온 것 감독님이 전해 드리랬습니다.”

    임요셉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1군을 알리는 붉은 명찰이었다.

    ‘1군 마동왕’

    그리고 붉은 명찰의 끝에는 또다시 작은 뱃지가 보인다.

    ‘N0. 1’

    팀 내 서열 1위를 뜻하는 숫자.

    그것은 원래 임요셉의 명찰 옆에 붙어 있던 뱃지다.

    나는 명찰과 뱃지를 건네받았다.

    음. 하지만 이렇게 받기만 할 수 있나? 인생은 기브 앤 테이크하는데.

    “나도 줄 게 있어.”

    나는 임요셉에게 말했다.

    “……?”

    임요셉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내심 기대하고 있는 눈치.

    나는 그런 임요셉에게 손에 들린 것을 건네주었다.

    …….

    그것은 방형근이 내게 떠넘긴 쓰레기통이었다.

    “닦아 와.”

    내가 쓰레기통을 건네자.

    “……?”

    임요셉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쓰레기통을 받는다.

    “…….”

    방형근의 얼굴은 핏기가 빠져 A4용지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이내, 상황을 눈치 챈 임요셉은 한숨을 쉬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쓰레기통을 집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가면서 방형근을 향해 눈을 한번 가늘게 뜨는 임요셉이다.

    “…! …! …!”

    방형근은 화장실로 가는 임요셉을 쫓아가지도 못한 채 내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나는 그런 방형근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공부 진짜 열심히 해라 너는.”

    *       *       *

    감독실.

    나는 엄재영 감독과 마주하고 앉았다.

    “자, 이걸로 계약 문제는 확실하게 마무리가 되었는데……. 아주 살짝 걸리는 부분이 있다, 마왕아.”

    엄재영은 나를 향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네가 이름이랑 주민등록번호 등을 전혀 공개하지 않아서 내가 신원보증인이 되어 계약을 했잖냐? 그거 때문에 스폰서들 측이 조금 탐탁찮아 하는가 봐.”

    “그래서요?”

    “그래서가 아니라…그냥 그렇다구…….”

    내가 되묻자, 엄재영은 살짝 움찔한다.

    아무래도 연봉계약에 앞서 슬쩍 주도권을 쥐어 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어림없는 소리다.

    나는 외견상으로는 21살이지만 속은 이미 15년간 닳고 닳은 겜창 폐인이다.

    조금 좋게 포장하자면…아주 노련한 사회인이라는 말씀!

    “그럼 연봉협상은 지금…….”

    “아뇨, 이번 리그 끝난 뒤에 바로 하죠.”

    나는 엄재영의 말을 일축해 막아 버렸다.

    리그가 끝난 뒤에 나의 인지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 될 것이다.

    구단주고 지랄이고 나 같은 슈퍼루키 초신성, 흥행보장수표 앞에서는 을이나 다름없다.

    연봉? 백지계약서도 썼는데 백지수표라고 못 받을까?

    리그 중간, 몸값이 가장 높을 때 연봉계약을 해야 하는 것이 제일 좋다.

    물론 나는 백지계약서를 쓴데다가 앞으로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경우라서 가능한 일이지만.

    “중국 같은 데로 가면 정말 백지수표도 가능할지도……?”

    나는 혼자 조그맣게 혼잣말을 했다.

    그러자.

    그걸 들은 엄재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야! 너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하니! 우리가 너 하나 중국만큼 대우 못해 줄까!”

    “어? 아, 들으셨어요? 죄송해요.”

    나는 바로 사과했다.

    …….

    하지만 뭐, 사실 들으라고 한 말이긴 하다.

    한편.

    엄재영의 표정은 복잡하다.

    ‘이 녀석 대체 뭐지? 고작 21살이라는 놈이 마치 닳고 닳은 능구렁이마냥…….’

    그는 나를 마치 노괴물(老怪物) 보듯 한다.

    익숙하다.

    기저귀만 차고 노 히트 런으로 던전을 달릴 때 으레 받곤 하던 시선이니까.

    뭐 아무튼.

    엄재영과 나는 이내 본격적인 일 얘기를 시작했다.

    “그래. 데뷔전 날짜 잡혔다는 말 들었지?”

    “네.”

    “이번 ‘오뚝이배’야. 가장 큰 대회에서 가장 화려하게 날아 보자고.”

    첫 비행부터 짱짱하게 하게 생겼다.

    차악-

    엄재영은 내 앞에 대한민국의 지도를 펼쳐 놓았다.

    “자. 서울 인천을 포함해서 총 10개의 도내리그가 열려. 우리는 그 중 서울 대표를 뽑는 리그에서 시작하게 될 거야. 규칙은 알지?”

    대회의 시스템과 룰은 간단하다.

    5명이 한 팀을 이루어 나가서 상대 팀의 멤버들과 1:1로 대결하는 것.

    이긴 사람은 계속해서 다음 상대와 싸워 나갈 수 있다.

    이쪽 팀 한 명이 저쪽 팀 5명을 올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경기 중간 중간에 선수 교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스타x래프트보다는 x권 태그매치에 가까운 방식으로, 1:1 경기 도중 같은 팀 멤버와 바톤 터치를 할 수가 있다는 것.

    HP가 0이 될 때까지 교체 횟수는 자유.

    때문에 선수끼리의 궁합과 조합도 상당히 중요한 편이었다.

    단순히 1:1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조합을 잘못 짜면 1:5가 될 수도 있는 것이 뎀의 PVP리그이다.

    그 외에도 여타 시스템들은 비교적 간단한 편이다.

    대부분 오래된 E스포츠의 룰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챌린지리그와 베스트리그의 시즌 차이마다 차기 시즌 챌린저를 가리거나,

    챌린지리그에서 올라온 선수와 베스트리그에서 강등당한 선수를 경합시키거나,

    챌린지리그에서 각 조 2위 이상을 한 선수들을 뽑아 베스트리그에서 3위 이상의 기록이 없는 선수들과 듀얼토너먼트를 시킨다거나.

    이런 식으로 팀전과 단체전, 개인전 등이 꾸준히 열리고 있었으므로 선수들은 기량만 된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랭킹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언제든지 랭킹이 끌려 내려올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찌익-

    엄재영은 서울 쪽에 붉은 사인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지금 우리 ‘국K-1’의 가장 큰 라이벌은 ‘엘리트즈’라는 팀이야. 이번 서울 대표 경합전 때 가장 큰 적이 될 거다.”

    대진표를 보니 국K-1과 엘리트즈는 하필 1회전에서 만났다.

    ‘물론 나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추첨을 통해 대진표가 정해지기 전에, 나는 이미 어떤 팀이 어떤 팀과 붙는지 모조리 꿰고 있었다.

    국K-1과 엘리트즈의 격돌 역시도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15년 전의 가장 핫한 빅이슈이자 앞으로 10여 년 동안 꾸준히 회자될 레전드 명승부였기 때문이다.

    ‘토토 역배가 미친 듯이 터졌던 경기이기도 하고.’

    나는 15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며 아득한 추억에 잠겼다.

    그때 나도 돈 꽤나 벌었었지.

    애초에 종잣돈이 푼돈이었기에 티끌 뻥튀기해 봤자 티끌이었지만…….

    “……? 마왕아. 무슨 생각 하니?”

    엄재영은 그런 나를 보며 갸웃한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15년 전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 15년 전? 7살 때는 왜?”

    “그냥요. 별 것 아니에요.”

    내 말에 엄재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지금부터 ‘엘리트즈’에 대해 설명해 줄 테니 집중해.”

    “네.”

    나는 다시 대진표로 시선을 돌렸다.

    이내, 엄재영은 설명을 시작했다.

    “…….”

    나는 하품을 참아 가며 열심히 들었다.

    다 아는 내용이었다.

    엘리트즈는 국K-1과 동시에 생겨난 라이벌 프로팀이며 대기업들의 스폰을 받아서 자금도 빵빵하고 선수 풀도 넓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랭킹 1위였다가 임요셉에게 밀려 랭킹 2위가 된 ‘폭풍’ 홍지노가 리더로 있으며 최근 세 명의 신규 랭커를 영입해 라인업이 한층 더 두터워졌을 것이다.

    엄재영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엘리트즈의 선수 라인업 자료를 내밀었다.

    “그 세 명이 아주 골치야. 바톤 터치를 이용한 합격술이 거의 예술이거든. 사실상 1:3으로 싸우는 거나 다름없어. 요셉이는 홍지노 견제해야 하니까 히든 카드로 빼 두고, 나머지 우리 애들 중에 얘들을 막을 수 있을 애가 있을지 걱정이다.”

    하지만.

    나는 자료를 보지 않는다.

    다만 그저 웃을 뿐이다.

    “간만에 보네.”

    자료 1페이지에 대문짝만 하게 박혀 있는 세 명의 신규 랭커들.

    그녀들은 바로 금은동 자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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