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랭커들의 황금시대 (1)
어둠 대왕의 몰락을 지켜본 뒤.
나는 게임 접속을 종료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내 방은 퀴퀴한 반지하 원룸.
하지만 이사를 위해 짐을 죄다 싸 둔 상태인지라 요즘은 집 안에서도 그냥 운동화를 그대로 신고 다닌다.
“침대에 누워 잘 때만 벗고 말이지.”
나는 운동화를 신고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젖을 타고 넘어가자 복잡하던 머리가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다.
게임과 현실.
둘로 나뉜 세상이라지만 나에게는 한 세상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순탄하다.
어떻게 위로 치고 나갈 것인지.
앞으로의 계획이 머릿속에 착착 정리된다.
바로 그때.
지이이잉-
핸드폰이 울린다.
“……뭐지?”
나는 고개를 힐끗 돌렸다. 화면에 뜬 번호는 등록되지 않은 번호.
“네. 누구세요?”
내가 전화를 받자.
핸드폰 너머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어진 씨!]
“…누구?”
내가 되묻자, 목소리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싶다.
[저 LGB의 홍영화요! 켠김에 제왕까지 막내 PD!]
“아아, 영화 씨. 오랜만이에요.”
[대박, 제 번호 등록 안 해 놓으셨어요? 저 지금 완전 서운.]
“미안해요. 핸드폰을 바꿔서 번호가 다 날아갔어요.”
[아앗? 진짜요? 핸드폰 바꾸셨었어요?]
“아뇨.”
[…뭐예요 진짜! 맨날 놀리기만 하고!]
홍영화는 한참 동안이나 나에게 서운하다고 찡얼거린다.
[저번방송에서조금가까워졌다고생각했는데정말너무하세요어떻게사람번호를저장안하실수가있죠저는어진씨번호를뭐라고저장했는지아세요?우리프로그램평생게스트님이라고해놨어요거기에하트도두개나붙여놨는데진짜이건완전배신이야진짜너무해요저완전상처받았거든요?]
“…아, 알겠어요 일단. 지금 저장합니다. 지금 해요.”
[진짜 했어요?]
“네.”
[뭐라고 저장했어요?]
“‘LGB 켠왕 홍영화 PD님’ 이요”
[우와, 완전 사무적. 정말 딱딱하신 분이네요. 하트는?]
“당연히 안 붙였죠.”
[쳇.]
보지 않아도 보인다.
홍영화가 통통한 볼을 내밀고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이.
…….
뭐, 이쯤 티키타카 했으면 됐다.
미녀와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지금은 좀 바쁘단 말이지.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에이, 저희가 뭐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는 사이인가요?]
내가 묻자, 홍영화는 슬쩍 너스레를 떤다.
그리고는 말미에 슬쩍 용건을 덧붙였다.
[다름이 아니고, 이제 슬슬 새 콘텐츠로 방송 제작하려는데……혹시 한 번 더 출연하실 의향이?]
“일 있어서 전화한 것 맞네 뭐.”
[아니에요! 공적으로는 그렇고, 사적으로는 어진 씨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예요!]
홍영화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리고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당황해서 파닥거린다.
그녀의 당황한 모습을 보는 게 재미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켠왕에 다시 한 번 출연할 생각은 없었다.
당분간은 말이지.
“죄송하지만 요즘은 바빠서 출연하기 힘들 것 같고, 다음 달 중순 정도에는 시간 한번 내 볼게요.”
[아앗!? 저희야 감지덕지죠! 그때는 개인적으로도 시간 한번 내 주세요! 제가 아는 케이크 맛집이 있는데…아, 남자들은 케이크 별로일까나? 그럼 곱창 집 맛있는 데 알아요!]
홍영화는 한 달 뒤가 어디냐는 듯 기뻐했다.
[그럼 일단 다음 프로그램 제작은 다른 콘텐츠로 해야겠네요. 예비로 생각해 둔 게 있어서 다행이에요.]
“음, 방송 늘 잘 보고 있어요. 다음 콘텐츠는 뭔가요?”
내가 묻자, 홍영화는 순순히 이야기를 꺼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요즘 업계에서 뒷소문이 꽤나 핫한 랭커가 한 명 있거든요. 그 사람이 이번에 프로로 데뷔한다고 해서 취재하려고요!]
……어라?
그 랭커 왠지 나도 잘 아는 사람일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나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사람이 인터뷰 허가 해 준대요?”
[아뇨. 구단 측에서 다 거절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래서 내일부터 그 집 앞으로 잠복취재 하려고요.]
“……유명한 구단이에요?”
[그럼요! 서울 랭킹 1위니까요! ‘국K-1’이라고…….]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음, 왠지 제가 아는 사람 같네요.”
[네? 에이, 어진 씨도 잘 모르실 걸요? 워낙에 신비주의에, 게다가 심지어 불법 지하리그 출신이라고 하던데….]
“그래요? 저는 알 것 같은데….”
[에에이, 완전 은밀하신 분이라서 모르실 거예요. 어진 씨 그리고 저번에 아는 랭커 분들 거의 없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럼 영화 씨가 말씀하신 ‘그분’의 정체를 제가 안다 모른다로 내기 하실래요?”
[오호? 그래요! 좋아요!]
그러자, 홍영화는 무슨 자신감인지 흔쾌히 내기를 수락했다.
“벌칙은 뭘로 하실래요?”
[음, 제가 이기면 어진 씨가 우리 프로그램에 10번 출연해 주기!]
나쁘지 않다. 어차피 나는 무조건 이길 테니까.
“그럼 제가 이기면 영화 씨는 뭘 해 줄 수 있어요?”
그러자.
[…으음.]
홍영화는 머뭇거린 끝에 대답했다.
[언제든 부르시면 밥 친구나 술 친구 해 드릴게요! 10회 동안만!]
나는 즉석에서 대답했다.
“그건 됐고요. 대신 나중에 영화씨도 제 개인방송에 10회 출연해 주세요, 그럼.”
[에엥? 밥이랑 술 친구는?]
“전 혼밥 혼술파라…….”
그러자 홍영화는 뾰로통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도 제가 이길걸요? 제가 취재하려는 대상은 완전 신비주의에 완전 베일에 휘감긴 암흑랭커라서….]
홍영화는 여전히 자신만만하다.
나는 그녀의 자신감을 바로 부숴 주었다.
“그 사람…마동왕이죠?”
[꺄악!?]
핸드폰 너머에서 홍영화가 깜짝 놀라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 옆에서는 조태오 부장이 시끄럽다고 투덜거리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요즘 언랭에서 핫한 슈퍼루키 초신성이라면 마동왕 밖에 없죠.”
[맞아요! 그 도도하기로 소문난 임요셉 씨도 깍듯하게 모신다던데요? 듣기로는 이미 팀 내에서 비공식 1위라고…….]
“맞아요. 게다가 얼굴도 잘생기고 인성까지 좋다고 하더라고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다나?”
[그, 그래요? 그건 처음 듣는데…. 아무튼 와, 어진 씨 진짜 발 넓으시구나! 저번에 인맥 좁다고 하셔서 저는 모르실 줄 알았어요. 다른 랭커분들 이름도 하나도 모르시고 그러기에….]
“주의해야 할 랭커들의 이름은 기억하죠.”
[오, 그 말씀은 마동왕 미만 잡이다? 나머지는 기억할 가치도 없는….]
“네.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
홍영화는 장난이 통하지 않자 기가 막힌지 입을 다물었다.
이내, 그녀는 다시 흥분한 기색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어진 씨가 이렇게 인정할 만한 사람이면 분명 대단한 사람이겠죠?]
“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게임계의 역사를 새로 써 내려 갈 인물이랄까?”
[오오! 그 인터뷰를 저희가 좀 인용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저는 마동왕 씨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내가 말한 건 전부 사실이다.
나는 게임계의 역사를 새로 써 내려 갈 생각이 있고 또 나 자신을 꽤나 사랑한다.
…그러니까 거짓말이 아니라는 말씀.
이내.
나와 홍영화는 전화통화를 훈훈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럼 나중에 뵈어요! 개인방송 게스트 필요하시면 주말이나 공휴일에 언제든 연락 주시고요!]
나중에 내 개인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로 한 홍영화는 벌칙임에도 불구하고 나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긴, 내 방송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꽤 유명해졌으니까.
여기 출연할 수 있는 것은 작은 방송국의 게임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새끼 PD에게는 상당히 유익한 기회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나한테도 완전 개이득인 장사다.
먼 훗날, 홍영화의 몸값은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게 된다.
나중에는 돈이 있어도 초대하기 힘든 귀하신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에이스를 개인방송에 10회나 불러낼 수 있다니, 이런 꿀 같은 기회가 어디 있겠나.
나는 지금까지 녹음된 통화 내역을 비밀 폴더 속에 확실하게 저장해 놓았다.
‘뭐, 상부상조 하는 거지.’
말미잘과 소라게의 관계랄까?
나는 이 음침한 반지하 소라 속에서 몸을 쫙 펴고 기지개를 켰다.
어서 빨리 더 큰 집으로 옮겨가야 할 텐데….
“빨리 현금이 마련되어야 할부랑 융자 털고 옮기지.”
통장 잔고에는 착실히 광고 수익, 후원금, 아이템 판매 대금 등이 들어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 모자라다.
내가 할부와 융자까지 써 가며 현금 자산을 비축하는 이유는 단 하나!
토토리그!
얼마 되지 않아 열릴 전국 최대 규모의 프로리그 PK 대항전!
그곳이 바로 노다지다.
시장이 워낙 좋기에, 첫 판부터 역배 21배가 터지는 엄청난 기염이 토해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날을 위해 지금까지 10억이 넘는 현금을 모아두었다.
“…오래도 기다렸다.”
기껏해야 6주 남짓을 기다린 것뿐이지만 왠지 더럽게 질질 끌어 온 기분이다.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이것은 구단 측에서 만들어 준 마동왕 전용 유령 폰이다.
연락하는 사람은 오직 ‘국K-1’의 감독 엄재영뿐.
나는 핸드폰을 들어 안에 저장된 문자 메시지를 열었다.
<마왕아! 데뷔전 날짜 잡혔다! 0월 0일 전국 최대 규모 프로리그 ‘오뚝이배’가 열리는데 거기에 네가 ‘메인 5’중 마지막으로…(중략)…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메시지 확인하는 대로 연습실로 와줘!>
엄재영 감독, 그는 나를 마왕이라 부른다.
나를 그런 콘셉트로 데뷔시키는 게 목표라나?
“…흐음.”
나는 고개를 돌려 달력을 쳐다보았다.
0월 0일.
이번에 식품 관련 대기업인 ‘오뚝이’에서 주최하는 거대한 프로리그가 열린다.
모든 것이 계산대로 착착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멍석이 쫙- 깔리고 있으니 한 판 제대로 놀아 볼 기회다.
‘마동왕’의 화려한 프로 데뷔.
그와 동시에 터지는 ‘고인물’의 토토 역배.
모든 것이 다 나의 설계대로.
전에도 말했듯, 이제는 나의 시대다!
“가즈-아!”
나는 연습실로 와 달라는 엄재영 감독의 말에 외출 준비를 했다.
끼긱-
녹슨 철문을 열고 반지하 소라고둥 밖으로 나간다.
크릉-
포르쉐 크로커다일이 묵직한 엔진음을 토해 냈다.
나는 차의 컨버터블 지붕을 확 열어젖히고는 엑셀을 밟았다.
수억을 호가하는 오픈카를 몰고 거리로 나서자.
“…!”
“…!”
“……!”
수없이 많은 시선들이 나를 향해 집중되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 이목과 관심들.
‘아, 스타는 피곤하구나.’
나는 전생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엄청난 시선들을 받으며 거리를 달려 나갔다.
노 히트 런(No hit run)!
게임에서도 그랬지만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나를 막지 못해!
…….
그리고.
질주하는 나를 돌아본 모든 이들은 죄다 입을 떡 벌린 채 핸드폰을 든다.
“경찰이죠? 여기 웬 미친놈이 알몸으로 차를 몰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