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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고닳은 뉴비-86화 (86/1,000)
  • 86화 어둠 대왕 (3)

    ‘내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나를 들여다본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피안(Jenseits Von Gut Und Bose)』 中-

    .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심연의 어둠 속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 뒤로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

    1시간?

    하루?

    어쩌면 1년?

    10년까지는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그렇게 길지 않았을 수도…….

    1분.

    혹은 1초?

    아니면 그보다 더 짧았을지도 모른다.

    “……!”

    나는 황급히 눈을 떴다.

    온 시야를 캄캄하게 물들이고 있던 어둠.

    그것은 지금 말끔하게 씻겨 나간 상태였다.

    시야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나는 황급히 상태창을 켜 몸 상태를 점검해 보았다.

    “……이런.”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입꼬리가 저절로 비죽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이어진

    LV: 39

    호칭: 바실리스크 사냥꾼(특전: 맹독) / 메두사 킬러(특전: 마나 번) / 샌드웜 땅꾼(특전: 가뭄) / 어둠 대왕 시해자(특전: 선택)

    HP: 1/390

    나는 살아남았다.

    사냥은 성공했다.

    레벨이 2 오르고 새로운 호칭 ‘어둠 대왕 시해자’가 생겨났다.

    파스스스…….

    내 입에서 검은 가루가 바스라저 내린다.

    할로윈 구름과자 돛대의 흔적이다.

    제 역할을 휼륭히 다하고 전사한 구름과자.

    이 아이템은 곧 완전한 잿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려 갔다.

    사용 기간 최종 만료다.

    꼴깍-

    나는 반사적으로 포션을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너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았기 때문일까? 찰나의 순간 정신줄을 놨던 모양이다.

    접속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

    고개를 들자 그제야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눈앞에 어둠 대왕이 보인다.

    [아아…아아아아…….]

    어둠 대왕은 비통한 탄식을 내뱉으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내 몸이…내 백성들이…어둠에…아아, 안 돼…이 성은 이제…….]

    어둠 대왕은 지금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절규했다.

    하지만 그가 바라보고 있는 현실은 내가 바라보는 것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는 세계관 속의 존재였고 나는 세계관 밖의 존재니까.

    나는 주저앉은 자리에서 어둠 대왕의 말로를 지켜보았다.

    “……으음, 확실히 원래 대사랑은 다르네.”

    5년 전, 내가 놈을 처음으로 죽였을 때.

    어둠 대왕은 별다른 대사를 내뱉지 않았다.

    [크핫-하하하하! 이히히히히히!]

    그저 살육과 피에 절어 있는 모습으로 미친 듯이 웃어 대기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어둠 대왕은 어떤가?

    [아아…나는…앞으로…어떻게 되는 것일까…아아…….]

    그 역시도 나와 함께 10년을 젊어진 것일까?

    어둠 대왕은 내 기억 속 대사들과 완전히 다른 말들을 중얼거렸다.

    실로 비통하고 처연한, 하지만 아직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군주의 위엄.

    그리고.

    그는 이내 천천히 어둠 속으로 잠겨든다.

    어둠 대왕의 뒤에 열린 시커먼 암흑 구멍에서 수없이 많은 손이 나와 어둠 대왕을 끌어당겼다.

    […….]

    “…….”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이내.

    꾸르륵- 꾸륵-

    어둠 대왕은 포탈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마치 물속으로 잠겨드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동시에.

    [꺄아아아아아악-]

    먼 곳에서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녹아내리는 듯한 단말마.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과 슬픔에 잠긴 이만이 내지를 수 있을 법한.

    그리고 나는 그 비명소리의 진원지를 알고 있다.

    아마 전 스테이지에 있던 서큐버스들이 지르는 비명이리라.

    서큐버스들은 어둠 대왕을 섬기는 시녀, 어둠 대왕이 타락하기 전에도 그를 모시던 시녀들이었다.

    고성의 주인이 어둠에 잠식당할 때, 그녀들 역시도 같이 물들었다.

    그리고 지금.

    악의 군주가 죽었으니 이제 그녀들 차례임이 마땅하다.

    [아아아……. 아아……. 아….]

    먼 곳에서 들려오던 비명소리는 이내 사그라든다.

    그리고 종국에는 완전히 들려오지 않게끔 되었다.

    이윽고.

    땅그랑!

    어둠 대왕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아이템 하나가 떨어졌다.

    그것은 오래된 피를 머금은 듯 검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는 작고 둥근 것.

    아무런 장식도 없는 투박한 반지였다.

    츠츠츠츠츠-

    검고 붉은 아우라가 반지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불길함. 두려움. 섬뜩함. 위압감. 오싹함. 소름끼침…….

    다양한 음차원의 기운들이 뿜어져 나오는 반지.

    반짝!

    내 눈은 바닥에 떨어진 이 반지를 향해 빛난다.

    3신기 중 마지막 아이템!

    드디어 이것이 드랍되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한 발, 한 발을 내딛어 바닥에 반지를 향했다.

    이윽고.

    그것은 내 손아귀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양 순순히, 자연스럽게.

    “My precious!”

    나는 반지를 손에 든 채 몸을 파르르 떨었다.

    -<혈액포식자의 링> 반지 / A+

    “적의 피는 곧 나의 포도주이니라.”

    -어둠 대왕-

    -물리 공격력 +2,000

    -어둠 저항력 +50%

    -특성 ‘혈액포식자’ 사용 가능 (특수)

    압도적인 스텟!

    그리고 최강의 특성!

    3신기 중 가장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내 손에 들어왔다!

    남이 쓰면 소름 끼치는 아이템이지만 내 손에 들어오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나는 홀린 듯한 시선으로 반지를 쳐다보았다.

    “진짜 사기 아이템이네.”

    +2,000! 반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높은 공격력.

    거기에 어둠 저항력이 총 50%나 상승한다!

    대격변이 일어난 후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어둠 속성 공격을 해 오는 것을 감안하면 물리 방어력이 50% 증가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좋은 옵션이다.

    …….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 반지의 가장 압권은 마지막의 특수 옵션일 것이다.

    ‘혈액포식자’

    먼 옛날. 어둠 대왕을 난공불락으로 통하게 했던 최강, 최악의 흡혈 기술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이것이 있는 한, 나는 적의 HP를 계속해서 빼앗아 가며 싸울 수 있다.

    할로운 구름과자보다 까마득히 상위에 있는 옵션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최대 HP가 적은 쪼렙(나 같은?)에게는 별 효과가 없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그것은 내게 있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일.

    이렇게 해서.

    ‘신살자(神殺者) 세트’라고도 불리는 ‘3신기’가 모두 모였다.

    상대에게서 흡혈을 하며 HP를 항상 꽉 채운 상태로 만들고 강한 공격을 받으면 HP 1 상태로 살아남는 동시에 반사 데미지로 반격한다.

    그리고 또다시 흡혈로 풀피를 채운다.

    이것이 바로 알몸 노히트 런을 가능하게 만드는 최고의 고인물 메타!

    이제 이 세계에 나를 죽일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게끔 되었다.

    ‘…이제는 나의 시대다!’

    나는 두 주먹을 꽉 쥔 채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런 내 환희에 응답하듯.

    수많은 알림음들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띠링!

    <세계 최초로 ‘어둠 대왕’ 레이드에 성공하셨습니다!>

    <세계 최초의 ‘어둠 대왕’ 솔로 레이드입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이름을 남기시겠습니까?>

    <솔로 레이드 랭킹 집계 중...>

    <1위. ‘고인 물’ / 0데스 0기브업 / 21시간 3분 0초>

    <최초 정복자의 이름이 아카식 레코드에 기록됩니다>

    .

    .

    그리고.

    일반적인 안내음과는 다른 것들도 있었다.

    <어둠 대왕이 죽었습니다. 그가 부활할 때까지 남대륙엔 밤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이면세계에 잠겨 있던 수억 개의 눈이 ‘고인 물’ 님을 향합니다>

    .

    .

    어둠 대왕이 리젠될 때까지 남대륙에는 밤이 오지 않는단다.

    꽤 재미있는 설정이다.

    ‘어둠 특성을 가진 몬스터들이 꽤나 위축되겠군.’

    나는 픽 웃었다.

    어둠 특성을 쓰는 일부 플레이어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유저들에게도 좋은 일일 것이다.

    …….

    한데?

    방을 나서려던 나는 이내 걸음을 멈췄다.

    ‘잠깐만?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수많은 알림음들 중, 분명 없어야 할 알림음이 끼어 있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바로 이 알림음이다.

    보상은 이미 받지 않았던가?

    나는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혈액포식자의 링을 내려다보았다.

    어둠 대왕을 잡으면 낮은 확률로 드랍되는 아이템.

    하지만 나는 첫 클리어인지라 100%의 확률 보정을 받아 이것을 손에 넣었다.

    …한데 무슨 보상이 또 따로 주어진다는 것일까?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대왕의 제전 (2)’ 구역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 몰라.’

    괜한 알림음이 뜨진 않았을 것이다.

    혈액포식자의 링이 떨어진 이후 보상이 지급된다는 메시지가 따로 떴으니, 분명 뭔가가 있긴 있으리라.

    이윽고.

    나는 어둠 대왕이 앉아 있던 옥좌 뒤에서 무언가를 찾아냈다.

    그것은 작은 금고였다.

    주의를 기울여 살피지 않으면 절대로 찾을 수 없을 만큼 작은 금고.

    하지만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예전에는 분명히 없던 지형물이네.’

    그렇다.

    15년 전의 모든 기억을 되짚어 봐도 어둠 대왕을 잡은 뒤에 이런 금고를 발견했다는 공략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공략, 첫 발견자에게만 주어지는 히든 피스인 셈이다!

    ‘미믹은 아니겠지 이거?’

    미믹(Mimic).

    가끔 이런 곳에 보물상자로 위장하고 있는 몬스터가 있다.

    손을 넣으면 바로 깨물어버리는 무서운 함정종(陷穽種) 몬스터.

    하지만 다행히도 금고는 정말로 금고였다.

    까라락-

    내가 금고의 손잡이를 돌리자, 이내 아이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평범하게 생긴 하나의 목걸이였다.

    거무튀튀한 외형의 작은 브로치.

    이것은 금고 안의 어둠 속에서도 독보적으로 어둡게 보인다.

    그리고.

    그 목걸이를 보는 순간.

    “…! …! …!”

    나는 선 채로 얼어붙었다.

    손발이 옅게 떨려온다.

    세상에!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것이지?

    나는 딱딱하게 굳은 혀를 간신히 꾹꾹 눌러 가며 중얼거렸다.

    “조디악 그 자식…이걸 여기서 얻었던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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